‘행복 대본’ 강요하는 세상…불행 ‘당하는’ 사람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사라 아메드의 저서 ‘행복의 약속’이 꼬집는 지배 기술로써의 행복

[이진송의 아니 근데]‘행복 대본’ 강요하는 세상…불행 ‘당하는’ 사람들

“오빠… 최고로 행복하되 가급적 혼자 계셨으면 좋겠어요.” 최근 영화 <헌트>에 출연한 정우성은 팬들의 ‘주접’으로도 유명하다. 행복하되, 혼자 있어달라는 말은 신아영 아나운서가 예능 프로그램 <비디오 스타>에 출연해 정우성에게 남긴 덕담(?)이다. 이 대사는 사랑하는 대상이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결혼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모두의 스타로 남아주길 바라는 팬들의 명언으로 등극했다. 관습적으로 해석하면 이 문장은 모순적이고 이중적이어서 웃음을 유발한다. 전통적으로 행복은 ‘결혼’이라는 표상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행복하려면 결혼해야 하고,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결혼·행복 패키지’는 웨딩 시장의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패키지’처럼 세트로 단단히 묶여 있다. 동시에 이런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결혼은 내가 사랑하는 너의 행복일 수 있지만, 그 행복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급적 네가 결혼하지 않은 채 행복해서 나를 행복하게 해주면 좋겠다.”

이런 말은 굳이 정우성이 아니라도, 평범한 ‘나’의 일상에 깊이 침투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해봤을 말.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 대체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런 식의 발화는, 사라 아메드식으로 말하면, ‘네가 타인의 기대를 배반하면 타인의 행복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의무’로 전환된다. 행복해야 하는 의무? 그게 뭐가 나쁘지? 행복은 좋은 것인데? 바야흐로, 행복의 시대다. 모두가 행복을 말하고, 행복을 찾는다. “행복하자” “행복하세요” “어디서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는 가장 무난하고 무해한 덕담이고,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은 시대정신이 되었다. 각국의 행복지수를 조사한 리서치 결과는 잊을 만하면 미디어에 오르내리고,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유명 인사나 연예인도 행복을 고민하고 질문한다. 행복은 무엇일까? 무엇이 행복하다는 것일까?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진송의 아니 근데]‘행복 대본’ 강요하는 세상…불행 ‘당하는’ 사람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정성혜·이경란 역, 후마니타스, 2021)(사진)에서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를 질문함으로써, 행복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지배 기술로 기능하며 우리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지 분석한다.

소위 ‘행복 지표’라는 것이 있다. 행복의 정도와 사회적 지표 사이의 상관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행복 지표를 통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더 행복한지 알 수 있고, 또 행복을 ‘예측’할 수 있다. <정직한 후보>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 정치인 주상숙(라미란 분)은 선거 유세에서 외친다. “여러분, 돈 많다고 행복한 거 아닙니다. 하지만, 샤넬백 내팽개치면서 페라리 핸들에 기대서 울면, 폼 나잖아요!” 지금은 물질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여전히 부는 중요한 행복 지표다. 돈이나 명예보다 압도적인 행복 지표는 앞서 잠시 언급했듯, 결혼 또는 ‘행복한 가정’이다. 어떤 곳에서 행복을 발견하면 그 장소는 좋은 것, 상품으로 장려해야 하는 것이 되며, 상관관계는 곧 인과관계이자 장려의 근거로 탈바꿈한다. ‘결혼했더니, 행복하다’ → ‘결혼하면, 행복하다’ → ‘행복하려면, 결혼해라’. 트랜스포머도 울고 갈 3단 변신 과정은 곧, ‘행복의 원인을 알고 있으니 행해야 하는’ 행복의 의무로 이어진다.

‘행복하려면 이래야 한다’, 결혼·돈·명예 등 사회적 지표와 상관관계 만들어 삶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
비혼주의자·장애인·이주민·난민·퀴어 등을 ‘행복의 원인이 박탈 당했다’ 여기며 교정과 변형의 대상으로 삼는다
새로운 행복의 약속이 필요한 시점…‘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고백하기 전, 내가 말하는 행복은 어디를 목표로 삼는지 돌아봐야

그런데 세상에는 결혼할 수 없는 사람들,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결혼을 욕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법적 제약에 가로막힌 성소수자, 결혼 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결혼이 금기시되는 장애인, 비혼주의자, 난민 등. 이들은 행복의 원인을 박탈당한 동시에, 추구하도록 권유받는다. 행복 관념은 결국 ‘누가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누가 ‘올바른’ 방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도덕적·사회적 구별 짓기를 포함한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학이 잘못된(행복하면 안 되는, 즉 결혼할 수 없거나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불안, 올바른(행복해야 되는, 즉 사회적 기준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돌려줘야 한다는 욕망을 포함하지는 않는지 의심한다. 이는 매우 타당해 보인다. 행복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로 ‘변화’하라는 교정의 폭력은 행복의 당의정을 입고 이렇게 발화된다. “그렇게(정상적이지 못한 존재로) 살면 불행하잖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한편, 행복의 원인을 이미 ‘소유’한 사람은 으레 행복할 것으로 간주된다. “멀쩡한 배우자에 예쁜 자식 있겠다, 집 있고 차 있겠다, 네가 뭐가 불만이야?” 이것이 행복의 의무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한 주부”상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행복한 노예” 신화에 대한 흑인들의 비판, 이성애를 “가정의 지복”으로 감상화하는 것에 대한 퀴어들의 비판을 경유하며 행복이 사회적 규범을 사회적 선(善)으로 재기술해온 역사를 밝힌다. 이를 통해 행복이 어떻게 삶의 위계를 형성하고 ‘좋은 삶’을 향유할 수 없는 사람들을 불행의 자리에 몰아가는지 드러난다.

행복은 특정한 것에 방향을 맞춰 따라야 할 규범이자 의무이고, 이에 따른 훈련과 계발을 요구하는 지배의 테크놀로지이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고, 여성은 날씬해야 하며, 결혼 적령기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익숙한 당위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의 행복을 위해서’. 이때, 노력으로도 안 되는 행복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은폐된다. 어떤 삶은 존재 그 자체로 행복의 경로에서 실격당한다. 윤미래는 ‘검은 행복’에서 이방인이고 배제되었던 자신의 인생을 노래한다. “유난히 검었었던 어릴 적 내 살색/ 사람들은 손가락질해 내 Mommy한테/ 내 Poppy는 흑인 미군/ 여기저기 수근대 또 이러쿵저러쿵 (…) 열세 살은 열아홉 난 거짓말을 해야 해/ 내 얼굴엔 하얀 화장 가면을 써달래/ 엄마 핏줄은 OK 하지만 아빠는 안 돼 매년 (…) 세상이 미울 때, 음악이 날 위로해주네.” 퀴어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진 IF의 ‘Rainbow’는 결국 자살을 암시하면서야(“다음 세상엔 더 나은 세상에서 태어나자”) “난 행복해”라고 말한다.

행복은 또한 젠더화되어 있다. 사라 아메드가 설명하는 페미니즘의 역사는,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순응과 행복의 의무에 불만을 토로하며 때로 결혼과 가족이라는 재생산 제도를 벗어난 여성들이 일으킨 소란의 역사이다. 이러한 행복한 가족, 행복한 공동체, 행복한 정서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여성은 ‘정서 소외자/이방인(affect alien)’이 된다. “정서 이방인/소외자”란 “좋은 느낌을 나쁜 느낌으로 바꾸어버려서 (남들의) 흥을 망치는 사람”이다(49쪽). 다른 말로는 ‘킬 조이(기쁨을 죽이는)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이 있다. 행복할 의무를 수행하면서 불행을 느끼는 “정서 소외자”는 다른 식의 행복을 위해 규범적 행복을 깨는 장치가 필요함을 드러낸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어릴 때부터 화목한 명절 가족 모임이 싫었다.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자들만이 허리가 휘도록 수발을 들어야 했다. 내가 좀 더 자라 왜 여자아이들만 과일을 깎아야 하고, 음식을 만든 여자들이 밥을 제일 늦게 먹는지 문제를 제기하자 ‘단란한 식탁’은 금방 얼어붙었다. 나는 ‘싸가지 없고 유세 떠는’ 정서 소외자가 되었다. 사라 아메드는 여성이 행복의 공동체에서 자기 욕망을 발설하고 실현하려 할 때 불행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간주되는 것을 “정서적 변환(affective conversion)”(67쪽) 개념으로 설명한다. 정서적 변환이란 행복을 유지하려면 ‘나쁜’ 느낌은 ‘좋은’ 느낌으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은근한 사회적 강제를 지칭하며 이 때문에 “폭력을 드러내는 행위”, 즉 부당함을 지적하는 행위는 곧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다른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는 “폭력의 원인”으로 둔갑한다. 이것은 정서 소외자에게 늘 따라붙는, “부드럽게 말하라”는 요구로 이어진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사라 아메드는 말한다. “불행할 자유가 없다면, 행복할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 조금 더 쉽게 풀어쓰자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세상이 설정한 ‘행복’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고도 내가 나로 살아갈 자유가 없다면, 아프거나 이주민이거나 장애가 있거나 퀴어거나 결혼하지 않았거나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는 삶이 불행하다는 이유로 부정당하면, 행복할 자유는 내가 나로 살아가는 선택을 박탈하고 나를 교정과 변형의 대상으로 만든다.” 행복하자는 덕담을 건네기 전에,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지극한 사랑 고백을 하기 전에, 내가 말하는 행복은 어디를 목표 지점으로 삼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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