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겸양의 미···현대미술 속 동양 미의식 조명

도재기 기자

학고재갤러리, 기획전 ‘의금상경(衣錦尙絅)’

‘비단옷 위에 삼베옷 걸치듯’ 동양 미의식 응축한 회화 55점 선보여

단색화 원로~소장작가 15명 참여, 중국 왕쉬예 작품도 첫 선

“한국 현대미술의 힘과 정신, 정체성 살펴보기”

학고재갤러리의 ‘의금상경’ 기획전에 나온 장승택, 김현식 작가 작품의 전시 전경(사진 위). 사진 아래 왼쪽은 장승택의 ‘겹회화 150-23’(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220×170㎝), 오른쪽은 김현식의 ‘Beyond The Color(o)’(2021, 에폭시 레진에 아크릴릭·나무틀, 54×54×7㎝). 학고재 제공

학고재갤러리의 ‘의금상경’ 기획전에 나온 장승택, 김현식 작가 작품의 전시 전경(사진 위). 사진 아래 왼쪽은 장승택의 ‘겹회화 150-23’(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220×170㎝), 오른쪽은 김현식의 ‘Beyond The Color(o)’(2021, 에폭시 레진에 아크릴릭·나무틀, 54×54×7㎝). 학고재 제공

동서양은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나 표현하는 방식에서 달랐다. 그림은 물론 문학이나 음악, 건축과 조경, 공연 등 각 부문에서 마찬가지다. 미의식의 차이이자 특성이다. 글로벌화 속에 뒤섞여 융합되고 있지만 그 독특성은 여전히 알게 모르게 작품들의 저변에 깔려 있다.

현대미술에 녹아든 동양의 미의식을 조명하는 기획전 ‘의금상경(衣錦尙絅)’이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에 마련됐다. ‘의금상경’은 ‘화려한 비단옷 위에 수수한 삼베옷을 차려 입는다’는 의미다. 동양 고전인 <시경> <중용> 등에 언급되고 있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여성 장강이 위나라 임금과 결혼할 때 화려한 비단 옷 위에 백성들의 위화감 등을 고려해 삼베옷을 걸쳐 입었고, 이를 본 위나라 백성들이 그의 덕성을 기린 노래 ‘석인’(碩人·높으신 님)을 부른데서 유래한다.

‘의금상경’(또는 의금경의)은 이후 아름다움을 굳이 내보이기보다는 내면에 숨기고 감추듯 쌓고 쌓으면 자연스레 드러난다는 동양 미의식, 삶의 도리로 이어졌다. 시·서·화에서 외형·형식보다 내면·내용을, 직설보다 은유를, 잘난 체하기보다 겸손과 양보의 겸양을 강조하는 것이다. 동양화에서 달을 표현할 때 서양에서와 달리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구름을 그려 달을 표현하는 홍운탁월 기법, 텅 빈 공간으로 사유를 유도하는 여백의 미, 인물의 외형보다 정신을 담아내는 전신사조 등과 비슷한 맥락이다.

‘의금상경’ 전에서 이동엽, 최명영 작가의 작품 전시 전경(사진 위), 아래는 최명영의 ‘평면조건 22-710’(2022, 캔버스에 유채, 130×130㎝). 학고재 제공 사진 크게보기

‘의금상경’ 전에서 이동엽, 최명영 작가의 작품 전시 전경(사진 위), 아래는 최명영의 ‘평면조건 22-710’(2022, 캔버스에 유채, 130×130㎝). 학고재 제공

이번 의금상경 전에는 모두 15명 작가의 회화 55점이 선보이고 있다. 80대 원로 단색화 작가부터 40대 소장작가, 작고 작가와 중국 작가까지 다양하다. 작품철학이나 표현방식·재료는 다르지만 작품들이 지닌 공통적인 고갱이, 미의식은 ‘의금상경’으로 수렴된다.

전시 기획자인 이진명 미술평론가와 우찬규 학고재 대표가 동아시아의 원초적 미의식이라 할 의금상경, 겸양의 미학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을 엄선한 것이다. 이진명 기획자는 “의금상경의 의미와 가치를 지향하고 또 다채롭게 표현한 동시대 작품들을 통해 작가들의 정신성, 작품성을 살펴보고자 한다”며 “이는 한국 현대미술의 힘과 정신, 나아가 정체성을 재고·확립하는 작업의 하나”라고 밝혔다.

전시장에서는 근래 주목받는 단색화의 대표주자인 원로 최명영(82)과 이동엽(1946~2013)의 작품을 만난다. 담백한 화면 속에 작업의 수행성·정신성을 강조하는 최 작가 작품은 손가락에 물감을 입혀 몸의 움직임·감각이 그림에 작용하도록 함으로써 화면에 특유의 리듬감도 드러난다. 한국미를 순백의 순수로 해석해 ‘백색 회화의 거장’이라 불린 이동엽의 ‘사이-여백 908’(1991)에도 동양 미의식이 응축돼있다. 두터운 질감과 갈색계통의 자연적인 색채, 절제한 화면구성 등으로 고향집 흙 담장 등 갖가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박영하 작가(69)의 ‘내일의 너’ 연작도 있다. 작품명은 작가의 작업 화두이자 부친 박두진 시인이 제시한 것이다.

색채의 향연이라 할만한 장승택·김현식 작품도 나란히 내걸렸다. 두 작가는 마치 수행하듯 몸과 정신을 집중해 수십번에 이르는 반복적 행위의 힘든 작업 과정으로 유명하다. 장 작가 작품에서 관람객 눈에 보이는 색은 사실 수많은 색들이 속에서 다투고 또 화해하면서 겹겹이 쌓인 결과다. 색과 색면의 폭, 여백, 붓질 흔적 등의 여러 요소를 감상할 만하다. 김 작가는 에폭시를 칼로 그어 물감을 바르는 반복적 과정을 수행한다. 결국 화면은 관람객 시선을 끝없이 빨아들이는, 시공을 초월한 듯한 무한한 시각적 깊이가 압권이다.

이인현은 정면만을 강조하는 일반적 회화에 딴지를 걸었다. 작품 틀의 위, 아래, 옆도 화면이다. ‘회화의 지층’이란 명제이자 연작을 통해 그리기보다 안료의 자연스러운 번짐, 스며듦을 추구하고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바다 색깔인 코발트블루로 여백을 만들어 드넓은 바다, 우주를 상상하게 한다. 옆에는 설치미술가 박기원의 회화 연작 ‘넓이’가 있다. 무수한 선들이 그려지지 않은듯 그려져 공간을 생성하며 시간의 흐름, 자연의 순환 등을 떠올리게 한다. 박종규는 디지털시대 속 시그널과 노이즈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 인간 세계의 평형상태를 추구하는 추상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위는 이인현 작품(왼쪽)과 박기원 작품의 전시 전경. 사진 아래는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2022, 캔버스에 유채, 10×160×10㎝). 학고재 제공

사진 위는 이인현 작품(왼쪽)과 박기원 작품의 전시 전경. 사진 아래는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2022, 캔버스에 유채, 10×160×10㎝). 학고재 제공

유일한 외국 작가인 왕쉬예(60) 작품도 국내에 첫선을 보인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분석하고 타자화·대상화시키는 태도에서 벗어나 ‘무차별적 바라보기’라는 명제로 작업한다. 왕 작가를 전시에 추천한 이우환 작가는 “화가들은 대부분 표현에서 존재를 드러내는데 그는 도리어 붓의 숨김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며 “자기를 잊게 만드는 망아의 신비한 쾌감을 선사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또 물감층과 플라스틱 구슬로 화면의 시각적 운율이 드러나는 천광엽, 세상과 사물의 본질을 파고드는 김길후, 혁필화 기법으로 시대의 내면을 담아내는 김영헌, 치열한 재료 연구로 독특한 예술의식을 보여주는 박현주, 극히 가는 선들로 깊이감이 도드라지는 윤상렬의 선형 회화, 무의식적인 붓 터치가 생생한 박인혁의 작품도 관람객을 맞는다.

우찬규 대표는 “이른바 ‘K아트’ 등 한국 미술에 국제적 관심이 높은 상황에서 견고한 미의식과 높은 작품성의 작가와 작품 발굴은 절실하다”며 “이번 전시가 작가들의 치열한 작업, 미술애호가들의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 평론계와 화랑계의 역할을 다시 한번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2월25일까지.

‘의금상경’ 전시장에 왕쉬예의 ‘시공나체·즉(151)’(가운데)과 박현주의 연작 ‘빛그림’(오른쪽), 박인혁의  연작 ‘회색 풍경’이 선보이고 있다. 학고재 제공

‘의금상경’ 전시장에 왕쉬예의 ‘시공나체·즉(151)’(가운데)과 박현주의 연작 ‘빛그림’(오른쪽), 박인혁의 연작 ‘회색 풍경’이 선보이고 있다. 학고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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