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을 넘어 ‘스토리두잉’의 시대…영화관이 달라졌다

김공숙|국립안동대학교·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대중문화평론가

‘시끌벅적’ 영화관의 낯선 풍경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응원 상영회. 관객들이 농구 경기장처럼 막대풍선을 들고 응원하며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NEW 제공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응원 상영회. 관객들이 농구 경기장처럼 막대풍선을 들고 응원하며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NEW 제공

그럴 법해 보이는 주장도 시대가 달라지면 옛이야기에 불과할 때가 있다. 스토리 공학자 가와베 가즈토는 영화와 텔레비전의 공간 차이에 대해 “영화는 영화관 등의 반(反)일상적인 완벽한 몰입의 공간이지만, 텔레비전은 일상적이고 산만한 환경”이라고 했다. 이 말은 팬데믹 이후 OTT 시대에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디지털 기술 발전에 따른 문화 향유의 형태가 지금처럼 바뀔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다. OTT 콘텐츠를 밤새 ‘몰아보기’ 하다 보면, 텔레비전은 산만하기는커녕 완벽한 몰입의 공간이다. OTT는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상 콘텐츠를 무한대로 볼 수 있게 했다. 팬데믹에 지친 관객은 영화도 이미 OTT 플랫폼을 통한 시청에 익숙해졌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고 보니 영화관이 달라졌다. 우선 관람료가 많이 올랐다. 2022년 평균 관람 요금이 처음으로 1만원대가 됐다. 영화관들이 영업손실을 이유로 요금을 1000원씩, 세 차례 올린 연유다. 그럼에도 4D와 아이맥스, 스크린X, 돌비 시네마 등 국내 특수 상영 매출은 증가했다. 1264억원으로 1년 전보다 271%, 관객 수는 865만명으로 252%가 늘었다. 놀라운 기술로 시각적 효과와 심미감을 선사한 천만 영화 <아바타: 물의 길>, 817만명을 기록한 <탑건: 매버릭>(이하 <탑건>) 같은 영화가 일등 공신이다.

2022년은 한국이 칸영화제의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석권한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열렬한 호평을 받은 <헤어질 결심>은 한국에서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었고, <브로커>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공교롭게 두 수상작은 같은 달 개봉했는데, 결과는 볼거리와 톰 크루즈의 팬서비스에 힘입은 <탑건>의 압승이었다. 영화사에 남을 칸 수상작들이 한국에서 아쉬운 성적을 기록한 이유는 작품성과 대중성의 괴리, 거리 두기 해제 이후 관객이 선호하는 작품 성향과 동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수상작들은 K컬처의 위상을 확인시켜 자부심은 높여주었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OTT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비싼 영화관에서 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 것이 사실이다. <헤어질 결심>과 <탑건>을 두고 뭘 선택할까 고심했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왔으니… <헤어질 결심>은 유명 평론가의 리뷰를 열심히 봤던 터라 패스. 관람료가 안 아까울 것 같은 스케일과 친근한 톰 아저씨가 기대되는 <탑건>을 관람했다. 밀려난 칸 수상작들은 OTT 시청으로 대체됐다.

폐쇄된 컴컴한 공간에 조용히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며 몰입하는 모습
이전까지 알고있던 상식적 영화관
타인의 관람 방해는 죄악시 됐지만
이제는 되레 ‘관크’를 유도 한다

OTT가 바꾼 콘텐츠 소비의 변화
시공간을 초월하게 해준 것처럼
영화관이라는 정적 공간도 재해석
함성 울려 퍼지고 OST 떼창까지
관객 참여 이벤트 현장으로 변신

이야기 듣기보다 체험·경험 원해
‘시네마두잉’의 시대가 오고 있다

영화관은 폐쇄된 컴컴한 공간에서 조용히 스크린을 바라보며 몰입하는 ‘지켜보기’ 혹은 ‘훔쳐보기’의 공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관크’가 무색한 시끌벅적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관크는 ‘觀’과 ‘비판적인, 비난하는’ 뜻의 critical이 합쳐진 신조어다. 공연장, 영화관에서 타 관객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떠들거나, 발로 의자를 차거나, 휴대전화를 열어보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모두 관크다. 과거 뮤지컬 관람객들의 과도한 관크가 문제된 적이 있었다.

‘보헤미안 랩소디’ 싱어롱 시사회에서 관객들이 퀸의 곡명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가 적힌 응원수건을 들고 있다. 20세기폭스사 제공

‘보헤미안 랩소디’ 싱어롱 시사회에서 관객들이 퀸의 곡명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가 적힌 응원수건을 들고 있다. 20세기폭스사 제공

그러나 요즘 영화관은 관크를 유도한다. 2018년 <보헤미안 랩소디> 싱얼롱 상영회 때의 폭발적인 반응을 기억한다. 2019년 실사판 <알라딘>의 4DX 싱얼롱(댄서롱) 상영회에서는 자스민 공주의 야광 왕관을 쓰고 야광봉을 든 관객들이 한목소리로 OST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는 파티장을 연출했다. 공주와 알라딘 코스프레를 한 관객도 많았다.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끌어안고 눈물짓고, 정말이지 영화관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일부 관객의 특별한 체험에 그쳤다. 그러나 팬데믹을 거친 영화관은 관객이 참여하고 행동하는 이벤트와 축제의 현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경향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334만 관객을 돌파했다. 국내 일본 애니 역대 흥행 1위 <너의 이름은.>을 능가할 추세다. 더빙판, 자막판을 번갈아 보는 N차 관람 덕분이다. 이들은 조용히 영화만 보는 관객이 아니다. 관크를 깨고 즐기러 영화관에 온다. 마치 경기 관람과 응원을 유도하듯이 열린 ‘영화 응원 상영회’에서는 다양한 구호가 적힌 깃발과 플래카드가 나부낀다. 관객은 매표소에서 미리 나눠준 응원용 막대풍선을 일사불란하게 흔들며 함성을 지른다. 시작 전부터 왁자지껄하더니 영화가 시작되자 운동장이나 체육관 응원이 따로 없다. 캐릭터 이름을 연호하는 것은 기본이고 캐릭터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영화에 몰입한 관객들이 자기도 모르게 캐릭터를 격려하는 말을 내뱉거나 추임새를 할 때마다 폭소와 환호가 터진다. 영화가 끝나도 나가는 관객은 거의 없다. 대부분 남아서 OST를 끝까지 따라 부른다.

<슬램덩크> 응원 상영회는 농구경기장 응원석 분위기와 싱얼롱 영화의 합체인 듯하다. 관객 대다수는 1990년대 농구 열풍에 불을 붙였던 원작의 추억을 간직한 30~40대들이다. 현실의 책임감과 어려움을 잠시 잊고 가장 즐거웠던 10대 시절의 꿈과 낭만을 기억하고 싶어서였을까. 영화의 열기는 쉬 식지 않고 만화책 유통에도 불을 붙였다. <슬램덩크> 만화책 전권 2000세트가 열흘 만에 65%가 팔렸다. 영화는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박스오피스 상위권이다. 4월에 아이맥스 상영까지 협의 중이라고 한다.

뒤를 이어 관객 참여와 출동을 기다리고 있는 영화도 있다. 임영웅의 콘서트 실황을 담은 영화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이다. 다음달 개봉인데, 지난 20일 오전 기준 공식 예매 7만5004명, 예매율 27.1%로 1위다. 아마도 예매자 대다수는 팬덤 영웅시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콘서트 현장과 동일하게 응원봉을 지참할 수 있는 ‘영시봉(영웅시대 응원봉) 상영회’ 날짜 예매는 일반 영화 두 배 이상의 고가에도 순식간에 서버가 마비되기도 했다. 예매 열기와 영시봉 상영회에 대한 기대로 볼 때 N차 관람은 수순일 듯하다. 영화는 작년 12월 고척스카이돔 콘서트를 14대의 스크린X 전용 카메라로 담아내 정면, 좌우 3면의 초대형 스크린으로 웅장한 돔 공연 장면을 보여줄 거라고 한다.

영화 ‘방탄소년단: 옛 투 컴 인 시네마’ 상영 현장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한다.  CJ CGV  제공

영화 ‘방탄소년단: 옛 투 컴 인 시네마’ 상영 현장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한다. CJ CGV 제공

임영웅의 스크린X 콘서트는 K팝에서 배웠다. 이미 방탄소년단(BTS)이 작년 10월 부산에서의 무료 콘서트 영상을 스크린X와 4DX 기술을 입혀 만든 영화 <방탄소년단: 옛 투 컴 인 시네마>와 유사할 것 같다. BTS 스크린X는 예고편만 봐도 대단하다. BTS 부산 콘서트 현장에 가지 못했다 해도 관객이 실제 BTS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관객 행동형 영화들 틈바구니에서 비참여형 ‘보기’만 하는 ‘순수’ 한국 영화들은 맥을 못 춘다. 지난해 말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영웅>은 손익분기점 350만명을 넘기기 위해 분투 중이다. 제작비를 150억원 가까이 들인 <유령>과 <교섭>은 더 힘들다. 설경구, 이하늬, 박소담, 박해수가 나온 기대작 <유령>은 70만명도 못 넘겼다. 황정민, 현빈의 <교섭>도 손익분기점 350만에 한참 못 미치는 171만명이다. 작년 코로나19 거리 두기 해제 후 가장 큰 수혜를 본 영화는 <범죄도시2>였다. 1269만 관객으로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 후가 없다. 698만명이 든 <공조2: 인터내셔날>이 구색을 갖췄을 뿐, 이제 한국 영화 천만 관객 달성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김공숙 교수

김공숙 교수

스토리텔링만으로는 안 된다. 이야기 전달을 넘어 관객의 체험과 쌍방향 소통을 중시하는 스토리두잉(storydoing)이 필요하다. 관객은 일방적으로 스토리를 전달받기보다 직접 경험하기를 원한다. 달라진 관객 참여 영화들은 두잉을 발 빠르게 응용했다. 별것 아니어도 된다. 흔해진 개봉 전 배우의 무대인사도 무시할 일이 아니다. 두잉 차원에서는 효과적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어쩌면 <아바타> 같은 볼거리는 기본이고, 두잉이 더 대세가 될지 모른다.

지난주 문화융합학회 학술대회에서 “K컬처는 움직인다”라는 문현선의 주제 발표에서 얻은 것이 많다. 발표자는 ‘칸이 선택’한 수상작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는 관객의 큰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칸이 버린’ <헌트>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헌트>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절친 이정재와 정우성의 조화와 친절한 팬서비스에, 무대인사를 보려고 온 N차 관객이 많았다. 그러면서 쏟아진 2차 콘텐츠에 힘입어 국내 흥행을 이끌었다. <헤어질 결심>은 관객이 189만, <브로커>는 126만, 칸이 버린 <헌트>는 무려 435만이다. 관객은 이제 단지 보기만 하는 영화에는 만족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참여하고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게 잠정 결론이다.

하나 더 얹겠다. 지금은 스토리두잉에 이어, 시네마도 두잉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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