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맛 ‘바비’는 가라···남성이 여성의 1/4, 성별 역전된 세상 ‘오오쿠’

최민지 기자
애니메이션의 제목 ‘오오쿠’는 실제 에도 시대 쇼군을 위해 여성 1000여명을 모아놓은 금남의 공간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여성 쇼군을 위해 미남 수천 명을 모아놓은 곳으로 역전된다. 넷플릭스 유튜브 갈무리

애니메이션의 제목 ‘오오쿠’는 실제 에도 시대 쇼군을 위해 여성 1000여명을 모아놓은 금남의 공간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여성 쇼군을 위해 미남 수천 명을 모아놓은 곳으로 역전된다. 넷플릭스 유튜브 갈무리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오오쿠>는 일본 에도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남성 인구가 여성의 4분의 1로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젊은 남성들이 역병에 걸려 사망하자 여성이 막부의 ‘쇼군’에 오른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오오쿠>는 일본 에도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남성 인구가 여성의 4분의 1로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젊은 남성들이 역병에 걸려 사망하자 여성이 막부의 ‘쇼군’에 오른다. 넷플릭스 제공

[오마주]순한 맛 ‘바비’는 가라···남성이 여성의 1/4, 성별 역전된 세상 ‘오오쿠’

‘오마주’는 주말에 볼 만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를 추천하는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 찾아옵니다.

의자왕과 삼천궁녀, 진나라 사마염과 궁녀 1만명, 오스만 제국의 하렘…. 권력의 곁에는 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미인으로 가득한 궁전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이곳의 여성들은 왕의 사랑을 두고 서로 질투하고 경쟁합니다. 때로는 음해와 모략도 서슴지 않습니다. ‘왕의 여자’들이 벌이는 궁중 암투는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며 그동안 수십, 수백 번 재현돼 왔습니다. 영화·드라마를 넘어 온라인 게임이 등장할 정도이니 고정 팬층이 탄탄한 장르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겨웠습니다.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하던 차에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오오쿠>를 만났습니다. <오오쿠>는 17세기 초·중반 일본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물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하고 260년의 ‘쇼군 시대’를 연 지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전에 없던 평화가 찾아온 일본 열도에 ‘적면포창’이라는 병이 돌기 시작합니다. 일단 걸리면 온몸이 빨간 종기로 뒤덮여 며칠 만에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었죠. 그런데 이 병은 오직 젊은 남성들만 걸렸습니다. 치료법을 찾지 못한 채 병이 전역으로 퍼지면서 남성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순식간에 여성 인구의 1/4 수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최고 권력자도 병마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31살의 3대 쇼군 이에미츠가 적면포창으로 죽고 맙니다. 대를 이을 남성이 없는 상황에서 이에미츠의 어린 딸 치에가 쇼군에 오릅니다. 섭정을 맡은 이에미츠의 유모는 쇼군을 위해 전국의 미남을 에도로 불러들입니다. 그 미남들을 모아놓은 곳이 바로 ‘오오쿠’입니다.

오오쿠는 실제 에도 시대 쇼군의 여성들이 살던 금남의 공간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여성 쇼군만을 바라보는 미남들의 공간으로 반전됩니다. 이들은 쇼군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용모를 화려하게 가꿉니다. 이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대를 잇는 것입니다. 쇼군의 마음에 들더라도 그를 임신시키는 데 실패하면 갈아치워집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사랑은 피어나고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궁중 암투극은 성별 역전 하나 만으로 새로워집니다. 전형적인 캐릭터나 대사도 전혀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젊은 남성들이 역병으로 죽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여성들이 이 자리를 채운다. 대장장이, 상인, 농부, 어부는 모두 여성이다. 아들 부모들은 아들이 병에 걸릴까 집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넷플릭스 유튜브 갈무리

젊은 남성들이 역병으로 죽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여성들이 이 자리를 채운다. 대장장이, 상인, 농부, 어부는 모두 여성이다. 아들 부모들은 아들이 병에 걸릴까 집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넷플릭스 유튜브 갈무리

시리즈는 성별 역전으로 인한 오오쿠 안팎의 변화상을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갑니다. 먼저 서민들의 삶은 크게 바뀝니다. 여성들은 부족해진 노동력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농부도 어부도 상인도 대장장이도 모두 여성입니다. 반면 남성들은 집에 머뭅니다. 부모들은 아들이 병에 걸릴까 집 밖에 내보내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도 버티지 못합니다. 각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 자리는 병사한 아들들 대신 딸들이 넘겨받기 시작합니다.

참신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오오쿠>는 일본의 역사적 사건들을 엮어내며 설득력을 더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실제 오랜 쇄국 정책을 펼쳤는데, 애니메이션 안에선 남성 인구가 적다는 것을 외세에 숨기기 위함이었다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콘텐츠 안에서 성역할을 바꾸는 시도는 그동안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그린 프랑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2019)나 지난 여름 개봉한 <바비>가 대표적이죠. 앞서 나온 두 작품이 시치미 뚝 떼고 ‘가모장 사회’를 만들었다면 <오오쿠>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가깝습니다. 여성들이 요직에 앉는다고 이들의 처지가 특별히 나아지진 않습니다. 여성들은 기존의 돌봄 노동에 더해 모든 노동을 떠맡게 됩니다. 남성들은 귀해진 만큼 전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죠. 사실상 ‘아이 만드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여성 쇼군이 통치하는 세상이라고 태평천하도 아닙니다. 어떤 쇼군은 성군이지만, 어떤 쇼군은 남성보다 냉혹합니다. 여성 쇼군 또한 임신, 출산에 더해 격무에 시달리고요. 저에겐 이 점이 <오오쿠>의 미덕으로 느껴집니다. 이상화도 대상화도 하지 않기에 더 날카롭게 현실을 꼬집을 수 있었다고 할까요.

동명의 만화가 원작입니다. 2004~2021년 연재된 <오오쿠>는 오랜 시간 높은 인기를 누리며 수차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지난 1월에는 공영방송 NHK에서 첫 시즌이 인기리에 방영됐습니다. 다음 달 시즌 2 방영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총 10화입니다. 79분인 1화를 제외하면 전 회차 러닝타임이 30분 미만입니다.

이에미츠(치에)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자리에 오른다. 넷플릭스 유튜브 갈무리

이에미츠(치에)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자리에 오른다. 넷플릭스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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