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주도
제주의 ‘말(語)’은 뭍과 같은 발음
하지만 ‘말(馬)’은 뭍과 다른 ‘몰’
‘ᄋᆞ’의 경우 뭍에선 대부분 ‘아’로
제주에서는 ‘오’로 고유한 변화
짐작하기 힘든 단어도 수두룩
큰나덜·금묘일=큰아들·금요일
받침 있는 앞글자의 소리가 복사
알고보면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제주도 배경 인기 드라마의 공로
암호 같은 제주말을 세상에 알리며
고립·단절 넘어 ‘사회성’을 녹여
다르지만 같은 말로 생명력 부여
해외여행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비행기가 뜨자마자 곧 내릴 준비를 하는 듯 가까운 곳에 있지만 바다 건너에 있으니 뭍의 사람들에게 제주 여행은 해외여행이다. 해외여행은 색다른 풍광과 별난 먹거리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다른 언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떠난다. 그러나 제주도는 바다 건너에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을 쓰는 곳이니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방심하고 있다가 제주 땅에 들어서면 눈과 귀로 밀려드는 낯선 표기와 말에 당황하게 된다. 이 당황스러움을 누군가는 흥미로워하고 누군가는 불편해한다.
제주도는 다르다. 우리 땅이지만 먼바다에 화산 폭발로 우뚝 솟은 섬이니 육지와 많은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뭍에 사는 이들은 그 다른 것을 즐기려고 가지만 말이 다른 것은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제주도는 섬이다. 고립과 단절의 좁은 공간이니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넓은 뭍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렇게 오고 가는 사람들로 인해 제주도 말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제주어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이들은 제주어의 오염과 소멸을 염려한다. 모두가 틀렸다. 제주도는 다르지만 같은 우리의 땅이고, 다르지만 같은 제주 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제주의 닭은 ‘ᄀᆞᆺ고닥’ 운다
제주도 탐방 일정을 잡은 후 방언을 연구하는 제주대 교수에게 ‘제주도의 지역성과 제주에만 있는 공간성’이 ‘말’로 잘 드러나는 곳에 대한 도움을 청한다. ‘제주도는 말의 땅이니 말 목장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말인가 막걸린가? 처음엔 말장난인가 싶었는데 곱씹어보니 절묘하다. 뭍의 말에서 ‘말(語)’과 ‘말(馬)’은 길이나 높낮이로 구별된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말소리 자체가 달라서 ‘말(語)’은 뭍의 말과 발음이 같지만 ‘말(馬)’은 ‘ᄆᆞᆯ’이다. 세종대왕 시절에는 소리와 글자가 모두 있었으나 뭍에서는 사라지고 제주도에만 남은 소리이다.
그래서일까? 뭍에서는 ‘꼬꼬댁’으로 적는 닭의 울음소리를 제주도 사람들은 ‘ᄀᆞᆺ고닥’으로 듣나 보다. 옛말에 있었던 ‘아’와 ‘ᄋᆞ’를 귀로 구별하고 입으로 발음할 수 있는 제주말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사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ᄋᆞ’가 ‘오’로 바뀌기 시작해 ‘ᄆᆞᆯ’은 ‘몰’이고 ‘ᄄᆞᆯ’은 ‘똘’이고 ‘아’를 가진 대표적인 단어인 ‘ᄒᆞ’다는 진작에 ‘허다’로 바뀌었다. 제주말이 ‘오염’되어가는 것일까? 사람들이 자존심 없이 뭍의 말을 흉내내는 것일까? 제주말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일까?
<돌하르바님 어떵ᄒᆞ문 좋고마씀>이란 산문집에서 제주의 작가들은 제주어가 차츰 사라져가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돌하르방에 하소연한다. 큰일이다. 제주어가 사라진다니. 안타깝지만 방언 연구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들은 틀렸다. 옛날에 제주에서만 쓰던 말만이 제주말인가? 제주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말이 제주말인가? 오늘날의 제주 사람들이 쓰는 말은 오염된 말인가? 전통을 지키고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제주말을 박물관이나 민속촌에 가둬야 한다는 말인가?
‘ᄆᆞᆯ’이 ‘몰’이 되어도 이 말은 제주의 말이다. ‘ᄋᆞ’가 뭍에서는 대부분 ‘아’로 바뀌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오’로 바뀐 것은 제주어만의 고유한 변화이다. 닭이 ‘ᄀᆞᆺ고닥’하고 울다가 ‘꼬꼬댁’하고 울더라도 이 닭은 제주의 닭이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제주도 사람이다. 야생마는 풀밭에 풀어놓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고 번식하듯이 제주도의 말도 그렇게 대를 이어 변해온 것이다. 오히려 옛날 제주의 말을 그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말(語)을 말(馬)처럼 길들이려는 생각이다.
우린 잘 랄아들어, 뭍엣것이 못 달아듣지
제주 토박이조차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뭍에서 온 연구자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것이 ‘큰나덜, 지집바이’ 등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다. 표준어의 ‘큰아들, 계집아이’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물옷이 ‘물롯’이 되고 ‘금요일’이 ‘금묘일’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덜, 아이, 옷, 요일’처럼 첫소리가 없는 단어가 받침이 있는 단어와 결합될 때 앞의 소리가 ‘복사’되는 것이다. 이렇게 단어에서만 나타나는 줄 알았는데 ‘당근밧데(당근밭에), 물건갑비(물건값이)’ 등에서도 나타난다.
“우린 잘 랄아들어, 뭍데서 온 사람들이 못 달아듣지.”
더 놀라운 것은 60년 넘게 물질을 해온 제주 해녀의 이 말이다. ‘뭍에서’는 물론 ‘잘 알아들어’와 ‘못 알아듣지’ 등과 같은 구절에서도 소리의 복사 현상이 나타난다. 제주 해녀의 말을 한 시간 가까이 듣다 보니 점점 ‘잘 랄아듣게’ 된다. 그런데 순전한 제주어로 말하는 팔순의 해녀는 뭍에서 온 이들의 말을 처음부터 ‘잘 랄아듣고’ 있다. 어찌 된 일일까? 표준어와 제주어가 다른 만큼 제주어가 표준어와 다른데 이 할망은 따로 훈련이라도 받은 것일까?
아니다. 제주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제주어뿐만 아니라 표준어를 완벽하게 알아 말하고 들을 줄 안다. 뭍의 말과는 많이 달라서 뭍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이 어려우니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표준어를 익힌다. 인위적으로 익힌 표준어이니 ‘서울 사투리’를 쓰면서 표준어 화자라고 믿는 서울 사람보다 더 완벽한 표준어 화자일 수도 있다. 이처럼 제주도 사람들은 이중언어 화자로서 뭍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뭍에서 온 사람, ‘뭍엣것’이다. ‘섬것’은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뭍에서 온 이들은 그렇지 않다. 제주어가 많이 달라 소통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무런 준비 없이 제주도에 온다. 해외에 가게 되면 못 먹고, 못 싸고, 못 잘까 봐 단어 몇 개라도 외워서 가는데 가까운 해외인 제주도에 올 때는 빈 머리와 빈 가슴으로 온다. 그러니 제주도 사람들이 뭍의 말을 잘 ‘랄아듣고’ 뭍의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뭍의 말을 쓴다.
‘뭍엣것’이나 ‘무테꺼’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말이다. 긴 세월 동안 탄압과 소외를 당해온 제주 사람들, 특히 70여년 전 4·3사건을 겪은 제주 사람들이 가진 육지 사람들에 대한 반감, 두려움, 거부감이 담긴 말이다. 이에 대응하여 자신들을 ‘섬것’이라고 부르지만 이 또한 꺼려지는 말이다. 색다른 섬의 모습을 기대하고 찾아온 뭍의 사람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혹시라도 색다른 볼거리와 먹거리는 기대하면서 색다른 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진 뭍엣것이라면 반성할 일이다. 색다른 말도 제주의 매력 중 하나이고 이 섬에 사는 이들은 뭍에서 온 사람들과 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삼달리 블루스
제주어가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은 조사나 어미 등이다. ‘아’ 소리는 귀가 민감해야 들리고 들리더라도 일정하게 나타나니 ‘말’이라 발음해도 ‘말’이라 들으면 된다. ‘오름’이나 ‘코지’ 같은 생경한 말은 각각 작은 기생화산과 바다로 툭 튀어나온 땅을 뜻하는 ‘곶’이란 것을 알고 나면 금세 적응된다. 그러나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에서 ‘갑니까’를 뜻하는 ‘감수광’은 낯선 어미 때문에 처음에는 알아듣기 어렵다. 나아가 “제주도 사투리로 말 호난 무신 거예 고람신디 몰르쿠게?(제주도 사투리로 말하니까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요?)”는 암호처럼 들린다.
제주도 사람들의 제주어에 대한 사랑은 깊고 고민은 많다. 제주도의 풍광만큼이나 다른 지역의 말과 큰 차이를 보이는 제주도의 고유한 말은 제주도의 자산이자 제주도 사람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순전히 제주어로만 된 노래 <몬딱 도르라>, 시집 <나 마암에 불 삼암서 마씀> 등을 만든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노래와 시가 ‘모두 함께 달리자’나 ‘내 마음에 불을 때고 있다’란 뜻을 다른 지역 사람, 심지어 제주의 젊은이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노래는 같이 불러 즐기고 시는 같이 읽어 느끼자는 것인데 그럴 수 없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나 <웰컴투 삼달리>가 고맙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것은 물론 제주도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이들은 제주말을 쓴다. 제주말을 잘 아는 이들의 시각으로 보면 완벽한 혹은 정확한 제주어가 아니다. 표준어에 오염된 혹은 제주와 제주어를 잘 모르는 뭍엣것의 시각이 묻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힘은 너무도 크다. 제주어가 이상하거나 절대 못 알아들을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렸다. 제주말로도 따뜻하고도 정겨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렸다. 제주말도 모두와 함께 통할 수 있는 ‘이 땅의 모든 말’ 중 하나임을 증명했다.
제주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며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돌아봐야 하는 지점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은 고립과 단절의 공간이다. 하지만 제주도가 고립과 단절의 공간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없다.
제주말의 순수성과 고유성만을 고집하는 것은 고립과 단절의 길로 가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표준어나 다른 지역의 말을 적당히 섞어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이자 다른 지역으로의 도약이나 다른 지역과의 연대를 위한 폭넓은 발걸음이기도 하다.
며칠 동안 제주어 조사를 같이한 ‘어쩌다 섬것’과 제주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어쩌다 늘 섬것’의 행태가 묘하게 대비된다. 하나는 방언 전시를 위해 잠시 제주에 왔고, 다른 하나는 타지에서 와 10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둘 다 본디 뭍엣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사흘 만에 해녀들의 말을 다 알아듣고 소통하는데 다른 하나는 10년이 넘도록 제주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제주어는 절대로 알아듣지 못할 말이라고, 제주말을 알아듣는다고 믿는 것은 ‘번역’을 보고 안 것을 착각하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씁쓸하다. 제주에 발령받자마자 육지로 전출 신청을 해놨다는, 늘 육지만 바라보고 섬과 거리를 두는 이의 모습이 씁쓸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늘 제주도만 바라보고 제주어는 순수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모습도 씁쓸하다. 몸을 들썩이게 하는 블루스 음악이 나오면 저마다 무대로 나서서 춤을 춰야 한다. 이 무대는 제주의 삼달리일 수도 있고 서울의 어딘가일 수도 있다. 어디서든 섬의 사람과 뭍의 사람이 어울려 흥겹게 즐기면 된다. 제주의 말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블루스 선율에 맡기면 된다.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