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선택권을 앗아간 시대가 고통의 원인···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레벤느망’

백승찬 기자
영화 <레벤느망>은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임신중절을 다룬 소설 <사건>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영화 <레벤느망>은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임신중절을 다룬 소설 <사건>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소설 <사건>을 영화화하는 감독 오드리 디완에게 촬영 직전 안톤 체홉의 인용구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정확히 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적절한 때에 따라올 것이다.”

에르노는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프랑스의 소설가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픽션으로서의 소설에 근접한 적도 있지만, <자리>(1984)부터는 작가 개인의 체험과 기억을 해부하듯 들여다보며 쓰고 있다. 2000년 출간된 <사건> 역시 1964년 작가가 겪었던 임신중절 경험을 상세히 풀어낸 소설이다. 영화 <레벤느망>은 이 책을 원작으로 한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 표지.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 표지.

젊은이들의 떠들썩한 파티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가벼운 유혹과 거절이 곳곳에서 이어진다. 대학생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은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3주차’라는 자막과 함께 안이 자신의 팬티 안쪽을 살피는 모습이 보인다. 산부인과를 찾은 안은 의사에게 “남자와 관계 한 적 없다”고 둘러대지만, 의사는 단호하게 임신 사실을 알린다. 4주차에 기숙사방으로 임신 확인서가 날아온다. 안은 증서를 찢는다.

아이를 낳으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안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임신중절을 하려 하지만, 이는 당시 불법이었다. 어떤 의사도 안을 도우려 하지 않는다. 친구들마저 안을 외면한다. 안은 홀로 방법을 수소문한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임신중절이 가능한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소설이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1인칭 시점으로 그려냈듯이, 영화도 철저히 안의 입장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좌우의 풍경을 스펙터클하게 잡지 않고, 1.37:1의 화면비를 사용해 안을 화면 중심에 둔다. 카메라는 안을 목덜미 뒤쪽에서 잡아내곤 한다. 이 역시 안의 시선으로 세상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또래 대학생들 사이에서 안은 “이제 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고 말한다. 안 이외의 사람과 풍경은 종종 뿌옇게 흐려진다.

영화 <레벤느망>은 젊은이들의 떠들썩한 파티 장면으로 시작한다. 왓챠 제공

영화 <레벤느망>은 젊은이들의 떠들썩한 파티 장면으로 시작한다. 왓챠 제공

영화 <레벤느망>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영화 <레벤느망>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영화 <레벤느망>에서 카메라는 주인공인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의 목덜미 뒤쪽에서 비추곤 한다. 이는 안의 시선으로 세상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왓챠 제공

영화 <레벤느망>에서 카메라는 주인공인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의 목덜미 뒤쪽에서 비추곤 한다. 이는 안의 시선으로 세상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왓챠 제공

소설에서 안의 임신중절 시도는 비교적 간략하게 처리된다. 뜨개질바늘을 이용해 스스로 시도하는 대목은 단 두 문장이다. 간호조무사의 시술 묘사는 그보다 상세하지만 고통 묘사는 “나는 내내 울었다. 계속 아팠고, 배 속에 묵직한 느낌만이 있었다”는 정도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시청각적 체험을 증폭시킨다. 이 영화로 세자르영화제 신인여우상을 받은 바르톨로메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끔찍하게 새어나오는 비명으로 표현한다. 관객은 안의 등 뒤쪽에 놓인 카메라를 통해 그 고통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실제 상영시간을 몇 배나 늘인 듯 간접 고통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컷을 나누어 기교를 발휘하지 않고 상황을 길고 정직하게 보여준다. 여성을 출산 장치로 간주하고 선택권을 앗아간 시대가 이 고통의 원인이다.

영화에서 안의 부모는 식당을 운영하며 라디오의 대중적 프로그램에 폭소하는 소박한 서민들로 표현된다. 안은 집안에서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았고 화이트 칼라 직종에 종사할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다. 출산으로 학업을 포기한다면 그 가능성도 사라진다. 안이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단호하게 중절을 시도하는데는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오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다. 실제 에르노 역시 노동계급 출신이며, 많은 소설에서 계급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냈다.

바르톨로메이는 촬영을 하며 “항상 ‘안은 군인이다’라는 한 문장을 기억했다”고 말했다. 안은 도망치지 않고 용기 있게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3주차에서 시작해 12주차까지 흐르던 자막은 중절 이후 달라진다. 한동안 놓았던 학업을 재개해 시험을 치는 날은 ‘7월5일’로 표기된다. 안은 재생산을 위한 시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시간을 되찾는다.

훗날 에르노는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에르노는 중절수술 이후 피를 쏟아내 병원에서 보냈던 1월 20, 21일을 여러 해 동안 기념일로 여겼다고 한다. 소설 <사건>에선 “이제 아이들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이런 시련과 희생이 필요했음을 안다. 내 몸속에서 재생산이라는 폭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차례가 되어 세대들이 거쳐가는 장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라고 적었다.

영화 <레벤느망>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영화 <레벤느망>의 한 장면. 왓챠 제공

<레벤느망>은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봉준호 감독이었다. 1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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