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 피해자 가해자 모두 평범한 이들…영화 ‘정순’·‘경아의 딸’

오경민 기자

디지털 성폭력 다룬 두 영화

모녀관계 초점 맞춘 ‘경아의 딸’

딸에게 상처 주고 이해하는 과정

중년을 피해자로 설정한 ‘정순’

가해자도 ‘악마’와는 거리 멀어

김정은 감독의 <경아의 딸>은 경아(김정영·왼쪽)와 연수(하윤경) 모녀의 이야기를 담았다.전주국제영화제 제공.

김정은 감독의 <경아의 딸>은 경아(김정영·왼쪽)와 연수(하윤경) 모녀의 이야기를 담았다.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정지혜 감독의 <정순>은 동네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정순(김금순·가운데)의 시선을 그린다.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정지혜 감독의 <정순>은 동네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정순(김금순·가운데)의 시선을 그린다.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잡히지도 처벌받지도 않던’ 디지털성폭력의 민낯이 지난 몇 년간 드러났다. 2019년 말부터 ‘n번방 사건’과 ‘웰컴 투 비디오(W2V) 사건’의 피해·가해 사실이 자세히 보도되자 디지털성범죄는 공분의 대상이 됐다. 사회적 관심과 경각심은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7일 막을 내린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디지털성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한국경쟁 부문에서 나란히 상을 거머쥐었다.

상의 주인공은 정지혜 감독(27)의 <정순>과 김정은 감독(30)의 <경아의 딸>이다. <정순>은 대상을, <경아의 딸>은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과 ‘CGV아트하우스 배급지원상’을 받았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엄마와 딸이다. <경아의 딸>에서는 딸이, <정순>에서는 엄마가 영상유출의 피해를 겪는다.

<경아의 딸> 사건은 가장 널리 알려진 디지털성범죄의 형태를 띤다. 젊은 여성이 피해자이며, 피해자의 이별 통보에 앙심을 품은 전 애인이 성관계 영상을 유포한다.

경아(김정영)의 딸 연수(하윤경)는 교사다. 헤어진 뒤에도 지속적으로 원치 않는 연락을 해오고, 급기야 일하는 학교 앞에 불쑥 모습을 보인 남자친구는 더 이상 나타나지 말라는 연수의 말에 “후회 안 할 자신있어?”라고 묻는다. 며칠 뒤, 경아는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받는다. 메시지에는 연수가 성관계한 동영상이 첨부돼 있다. 메시지는 경아한테만 전달된 것이 아니다. 영상은 온라인에도 퍼진다. 딸을 엄하게 단속해온 경아는 연수를 만나 “어떻게 만나도 그런 놈을 만나냐”를 시작으로 연수를 탓하는 말만 늘어놓는다. 연수는 학교에서, 경아의 세계에서 사라진다.

<정순>의 피해자는 엄마 정순(김금순)이다. 식품공장 베테랑 직원인 정순은 일터에 새로 나타난 남자 영수(조현우)와 연애를 시작한다. 연애 사실이 알려지자 공장 사람들은 수군댄다. 소문은 두 사람에게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 영수는 ‘평소 허리를 조심히 써야 하는 아저씨’ 정도로 남성 동료들과 조금은 어울릴 수 있게 되지만, 정순은 화장실 험담의 대상이 된다. 여전히 젊은 남직원들 사이에서 겉돌던 중년의 영수는 급기야 정순이 속옷만 입고 자신을 위해 춤추는 영상을 동료들에게 보여준다. 정순의 영상은 직장을 넘어 지역사회에 퍼진다. 정순의 딸 유진(윤금선아)은 엄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두 영화는 단순히 피해사실을 전시하거나 주변의 2차가해, 지지부진한 수사나 솜방망이 처벌 등을 폭로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경아의 딸>은 모녀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같은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의 차별점을 만들어낸다. 연수를 가장 끔찍이 아끼는 사람도, 연수에게 가장 상처를 주는 사람도, 연수가 디지털성범죄를 당한 뒤 가장 마주하기 무서운 사람도 엄마인 경아다. 당황한 나머지 연수에게 상처를 준 경아는 딸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술 취한 남편으로부터 받던 부당한 성관계 요구를 떠올린다. 영화는 엄마와 딸이 가장 친밀한 관계로부터 당한 폭력을 연결지으며 디지털성범죄가 유구한 여성폭력과 별개의 문제가 아님을 말한다. 김정은 감독은 전주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서 “처음에는 연수가 디지털성범죄 피해로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의 꿈을 잃어가는 시나리오를 썼는데, 유사한 소재의 영화와 차별점이 없었다”며 “내가 연수라면 엄마가 영상을 보는 게 가장 무서울 것 같았다. ‘나와 가장 가깝고, 나를 잘 이해해줄 것 같은 존재를 왜 가장 두려운 대상으로 떠올렸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경아의 딸>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모녀의 비중이 비슷한 <경아의 딸>과 달리 <정순>의 시선은 명확하게 정순을 향한다. 중년을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로 설정해 불법촬영이 특정 연령층이 아닌, 모두의 문제라는 걸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정순이 가해자 영수를 선처해주려고 할 때 딸이 비난하자 정순은 소리치며 통곡한다. “너는 똑똑해서 좋겠다…내 일이잖아. 내 일인데 왜 네가 다 알아서 해? 그 양반하고 놀아난 것도 나고, 사진찍은 것도 나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도 난데 왜 네가 다 알아서 해? 왜 나는 네가 말한 대로 해? 왜 나는 가만히 있어?” 정지혜 감독은 씨네21과 인터뷰하면서 “디지털성범죄 사건들이 공론화됐지만 여전히 중년이 디지털성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목소리는 많지 않은 것 같다”며 “젊은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수와 정순의 일상을 망쳐놓는 가해자는 악마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내놓은 상담통계를 보면 가해자의 82%는 연인이나 직장동료와 같은 ‘아는 사람’이다. 연수의 전 남자친구 상현(김우겸)은 지질한 고시생이고, 정순의 남자친구 영수는 안쓰러운 기간제 노동자다. 평범한 얼굴을 한 이들이 촬영물을 유포한 경위 역시 대단치 않다. 상현은 헤어지자던 연수를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영수는 직장동료들 앞에서 ‘진짜 남자’가 되고 싶었다.

다행히 두 영화 모두 희망적으로 끝을 맺는다. 연수는 다음의 일상으로 건너간다. 정순은 새롭게 운전을 배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법촬영 피해는 연수에게는 답답한 모녀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고, 정순에게는 자신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던 일터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연수와 정순은 각자의 삶의 운전대를 잡고 나아간다. <정순>은 올해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아의 딸>은 다음달 개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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