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매달린 로프를 자를 것인가···연극 무대위에 선 안데스 빙벽 ‘터칭 더 보이드’

선명수 기자

영국 산악인 생존 실화 그린 연극 ‘터칭 더 보이드’

재난 스릴러 같은 대자연 속 ‘생존 드라마’

기울어진 무대로 설산 빙벽 표현

연극열전 세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터칭 더 보이드>는 영국 산악인 조 심슨의 생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다. 연극열전 제공

연극열전 세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터칭 더 보이드>는 영국 산악인 조 심슨의 생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다. 연극열전 제공

산악 조난은 공연보다는 주로 블록버스터 영화가 다뤄온 소재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거대한 설산과 인간을 압도하는 대자연을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 생생하게 구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 <터칭 더 보이드(Touching the Void)>는 연극에선 드문 소재인 산악 조난 상황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두 산악인의 생존 실화를 바탕으로, 현실과 환상을 겹겹이 교차하며 안데스 산맥의 거대한 빙벽을 무대 위로 옮겨온다.

연극은 해발 6344m 안데스 산맥 시울라 그란데 서쪽 빙벽을 초등한 영국의 두 젊은 산악인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의 생존기를 그린다. 조 심슨이 쓴 동명의 회고록이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 데 이어 2018년 영국에서 먼저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올해 아홉 번째 시즌을 맞은 연극열전의 세 번째 작품으로 국내 무대에 처음 올랐다.

공연은 조의 경야(經夜) 장면으로 시작한다. 망자를 장사 지내기 전 가까운 이들이 관 옆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경야지만, 시신을 찾지 못한 조의 경우엔 지킬 관조차 없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다 갔다고 말하는 산악인들 사이에서 조의 누나 새라는 폭발한다. 새라는 조와 함께 등정에 나섰다 혼자 돌아온 사이먼에게 묻는다. “내 동생, 정말 죽었어요?”

연극 <터칭 더 보이드>의 한 장면 . 연극열전 제공

연극 <터칭 더 보이드>의 한 장면 . 연극열전 제공

이어지는 것은 시공간을 넘어선 환상들이다. 사이먼은 시간을 거슬러 조와 첫 등정을 함께했던 알프스 그랑 조라스산 북벽으로, 페루 원정을 계획했던 샤모니 몽블랑 외곽으로, 등정을 준비한 베이스 캠프와 시울라 그란데의 빙벽으로 새라를 데려간다. 마침내 정상에 도달한 순간, 그리고 하산 과정에서의 사고의 순간들이 새라의 눈 앞에 재생된다.

다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조를 자신의 몸과 로프로 연결해 하산하던 사이먼은 악천후로 조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1시간30분을 버티다 로프를 자른다. 새라는 이 결정을 납득할 수 없지만, 직접 조를 매단 줄을 잡아보고서야 그 선택을 이해하게 된다.

공연 후반부에선 크레바스로 추락했지만 가까스로 생존한 조의 외로운 사투가 그려진다. 물도 음식도 없이, 몸의 많은 뼈가 부러진 채로 매달리고 기어서 베이스캠프로 귀환해야 한다.

극한 상황 속 인간의 투지를 그린 전형적인 휴먼 드라마 소재지만, 연극은 후반부에 이르러 일종의 재난 스릴러처럼 긴장감을 조여온다. 제한된 시간 안에 고립된 공간을 탈출해야 하는 조에게 거대한 설산은 그 자체로 밀실이 된다. 극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를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험난한 크레바스를 탈출할 때가 아니라, 베이스캠프까지 불과 3~5㎞ 를 남겨뒀을 때다. 조는 자신의 환상 속에 나타난 누나 새라에게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모두 떠나버려 아무도 없다면, 그 좌절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극한 상황 속 인간의 선택에 초점…‘터칭 더 보이드’의 의미는 모호

대자연을 무대에서 구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에, 연극은 설산이라는 배경 그 자체보다는 그 안의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선택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생존을 위해 친구를 매단 로프를 자를 것인지, 희박한 생존 가능성에 기대 극한의 고통을 견딜 것인지 이들은 매 순간 결정해야 한다. 작품 속 대사처럼 “결국 모든 건 선택”이다.

개막 전부터 관심을 모은 것은 ‘설산을 어떻게 무대에 구현할 것인가’다. 소극장 무대에 산을 옮겨놓을 순 없기에 이 제한된 공간에 연극적 상상력을 더해 공간감을 만들어야 한다. 연극은 경사진 무대와 몰입형 음향 시스템을 적극 활용했다. 단차를 둔 채 기울어 있는 2개의 무대는 크레바스처럼 가운데에 길고 좁은 틈을 뒀고, 배우들은 이 무대에 매달리거나 기어가며 연기한다.

연극 ‘터칭 더 보이드’의 한 장면. 연극열전 제공

연극 ‘터칭 더 보이드’의 한 장면. 연극열전 제공

김동연 연출은 지난 20일 언론 대상 시연을 마친 뒤 “무대 디자인을 수십 번 고친 끝에 지금의 무대를 만들었다”면서 “(설산에 대한) 구체적 표현보다는 인물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관객이 상상할 수 있도록 무대를 단순화했고, 사운드나 빛을 통해 공감각적 느낌을 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가 빙벽에 고립된 상황을 마치 관객이 그 공간에 함께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연극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몰입형 음향 시스템을 사용했다”면서 “대본에서 강조하고 있는 ‘공허의 소리’ 역시 사운드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다만 제목 ‘터칭 더 보이드’가 시사하는 대자연의 공허(Void)가 인물들에게 어떤 의미이며, 그 공허한 아름다움이 등반(혹은 삶)에서 무엇을 은유하는지는 제작진의 의도가 잘 와닿지 않는다.

지난해 사생활 논란으로 활동을 중단했던 배우 김선호가 주인공 조 역할을 맡아 연극 무대에 복귀했다. 김선호와 함께 신성민, 이휘종이 번갈아 연기한다. 조의 동료 사이먼은 배우 오정택, 정환이 연기한다.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9월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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