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욱(미국 스탠퍼드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은 <민주주의의 모험>(인물과사상사) 책머리에서 “이 책을 정치적으로 또는 진영 논리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썼다. “한국에서는 진영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나처럼 해외에 있는 이들이 나름 기여할 공간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할 뿐이고 정치 참여에는 관심이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2022년 4월~2023년 3월 ‘신동아’ 연재 글을 토대로 다시 쓴 책엔 윤석열 정권이나 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판이 많다. 진영 논리 폐해도 여러 번 지적한다. 신기욱은 현재 한국을 “진영 논리가 판을 치고 사회는 분열되어 있으며 정치는 실종되어가”는 상황으로 진단하면서 ‘중도’나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다. ‘국제적 리더’ ‘선진화’도 기준이다. 두 정권에 대한 비판도 이런 잣대들에 따라 진행한다.
우선 윤석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해외에 비치는 정치지도자로서 윤석열의 이미지도 아직은 긍정적이지 않다. 그는 강골 검사, 반페미니즘, 반중국으로 투영되고 있다. 바이든과 같은 전통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지도자상과는 거리가 멀다. 스트롱맨의 이미지가 후보가 되는 데는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도 민주사회를 운영해나가는 정치지도자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신기욱은 “이미지 개선과 이를 뒷받침할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서울대·50대·남성과 관료 중심 인선도 비판 대상이다. 신기욱은 “ ‘검찰 슈퍼네트워크’로 얽힌 그들만의 폐쇄적 리그에 갇혀 문재인 정부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검찰과 관료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능력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며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와 경험을 듣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와 통로를 차단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학연, 지연, 혈연으로 얽힌 폐쇄적 슈퍼 네트워크의 담장을 허물어야 한다”고 했다.
신기욱은 여러 차례 윤 정권의 반페미니즘 이미지와 이대남 표에 초점을 둔 젠더 전략 문제를 지적한다. 프랑스 유력 통신사인 AFP가 윤석열을 “반페미니즘 정치 신인”으로 규정한 점 등을 예로 들며 “글로벌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나 성정체성 문제는 매우 민감한 이슈다. 반페미니즘 이미지가 고착화할 경우 글로벌 리더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데 큰 제약이 된다”고 지적했다.
신기욱은 “윤석열 정부가 반중 정서를 정치에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일 관계가 최악에 빠진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아무리 국민 정서가 중요하고 중국이 못마땅한 점이 많다고 해도 국익 차원에서 차분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문 정권을 두고는 진보적 시민사회 인사들의 청와대와 내각 진출, 도덕적 우월감과 반대 세력 ‘구악’ 규정, 이분법적 논리, 부동산 정책 실패 등을 비판한다. “부동산 등 민생 정책의 실패와 ‘내로남불’로 대표되는 도덕적 해이 등으로 민심이 이반하면서 거센 정권교체의 바람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불행하게도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세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고도 말했다. 신기욱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상호존중과 관용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신과 규범을 내재화하지 못했다. 또 다수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했다”고도 지적했다.
신기욱은 상대를 악마화하는 현재 정치 문화를 지적하며 존중과 대화를 강조했다. “특히 젠더 갈라치기와 같은 정체성의 정치나 개딸에 의존하는 팬덤 정치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정당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 과정에서 나온 소위 ‘친윤(친윤석열)’ 논란은 다원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라고 지적한다. 국회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부결표를 던지지 않은 의원들을 겨냥한 이른바 ‘수박 색출하기’ 같은 협박도 민주적인 정치 문화 형성에 걸림돌로 본다.
신기욱은 ‘다양성’과 ‘열린 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하고 배려하며 균형을 찾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민주적 가치이자 정책적 과제”라고 했다. 반일 민족주의 등을 두고 “혈통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이미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같은 피를 나눈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닌, 정치적·시민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민족 개념을 재정립할 때”라고 했다. 그는 “외국인 결혼 이주 여성, 조선족, 탈북민 등을 혈통에 관계없이 존중해야 열린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신기욱은 한국의 다문화주의 프로그램이나 정책이 외국인을 한국 사회와 문화로 동화하는 데 편중된 점과 타문화에 대한 자국민의 이해를 돕는 일에는 소홀한 점을 지적한다. “가령 베트남 신부에게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김치 만드는 법은 알려주지만 자국민, 하다못해 그 신부의 한국인 가족에게 베트남의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선도하고 돕는 노력은 부족하다.”
‘민주주의의 모험’이란 제목은 “민주주의는 꾸준한 모험을 통해 발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불안정성과 위기가 있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결국 정상적인 경로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에서 붙였다.
책은 스탠퍼드대학 프랜시스 후쿠야마(스탠퍼드대 교수), 안병진(경희대 교수)과 각각 진행한 대담을 부록으로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