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14일 뉴욕풍경

뉴욕 | 유희진기자 worldhj@kyung

선진금융의 고향…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4일 모건스탠리 본사 건물. 전광판에서 당일의 증시 상황이 실시간 중계되고 있다. <뉴욕/유희진기자>

지난 14일 모건스탠리 본사 건물. 전광판에서 당일의 증시 상황이 실시간 중계되고 있다. <뉴욕/유희진기자>

지금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금융위기의 진원지 뉴욕.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에 금융폭탄을 터뜨린 뉴욕은 경제위기에 가장 느리게 반응하고 있었다. 막 쇼핑을 끝낸 여성들은 큰 쇼핑백 두세개씩은 들고 다녔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3명 중 한 명꼴로 스타벅스 커피를 손에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뉴욕은 여전히 흥청망청인듯 보였다. 그러나 뉴욕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구석구석을 돌아다닐수록 뉴욕에도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10:40 타임스퀘어

두달 전 파산한 리먼 브라더스 본사 건물이 있던 곳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길을 묻기 위해 48번가의 조그만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아르바이트생 카마라(29)는 길을 묻는 기자에게 바로 건너편에 있는 745번지를 가리키며 그 날을 떠올렸다. “이 주변은 항상 혼잡하지만 리먼의 마지막 모습을 찍기 위해 전 세계에서 취재진들이 몰려든 그 때의 타임스퀘어 주변은 정말 발디딜 틈도 없을 만큼 붐볐지요.” 본사 정문 앞에 설치된 수많은 언론사의 카메라들은 짐을 싸서 나오는 직원들의 모습을 담았다. 인터뷰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끝내 마이크를 들이대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던 카마라는 그 때 ‘회사 하나 망한 게 그렇게 큰일인가’ 싶어 별 생각 없이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맨해튼 중심부인 49번가 745번지. 화려한 3단의 전광판을 앞세운 34층의 고층 빌딩에는 불과 두달 전만 해도 ‘리먼 브라더스’라는 금색의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바클레이즈 캐피털(BARCLAYS CAPITAL)’로 바뀐 건물을 바라보며 카마라는 “당시에는 취재진들이 모여 짐을 싸서 나가는 리먼 직원들의 모습을 찍어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내가 해고 걱정으로 잠을 설치면서 그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인근에서는 ‘모건 스탠리’가 그 날의 증시를 전광판에 중계하며 여전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11:30 우리아메리카 은행 맨해튼 지점

이병웅 이사는 “우리아메리카은행은 다행히 예금을 초과해 대출을 하지 않아 경제위기 속에서도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뉴욕의 호텔비에 혀를 내두르는 기자에게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는 나이와 경력에 비해 과도하게 돈을 벌어 흥청망청 썼던 월가 사람들의 사치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년에 억 단위의 보너스를 받는 30대 초반의 월가 금융인들은 보너스를 받을 때마다 아파트의 평수를 늘렸고 고급 식당에서 고급 술을 마셨다. 그들의 씀씀이에 맞추어 고급 호화 식당들이 속속 들어섰고 다른 가게들까지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연히 월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붕괴는 동시에 월가를 겨냥해 만들어진 고급 식당·명품점들에도 직격타였다. 그는 “지금 당장의 뉴욕은 괜찮아 보이지만 월가에 해고 바람이 불고 있는 이상 서서히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12:30 택시안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뉴욕은 대낮부터 어둠이 짙게 깔렸다. 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던 노숙자들은 비를 피해 건물 사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월가에 가기 위해 올라탄 택시. 택시 운전사 콴(38)은 “경기침체 취재를 위해 월가에 간다”는 기자의 말에, “나도 경제위기의 피해자”라고 응수했다. 그는 “요즘은 직장에서 해고된 젊은 사람들이 단기 아르바이트 삼아 택시 쪽으로 많이 밀려오고 있다”며 “승용차로 불법 택시 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 전보다 수입이 절반은 줄어들었다”고 불평했다. 차가 막혀 20분 정도 지나서야 택시는 세계 금융위기의 진원지이자 택시 기사의 수입을 절반이나 갉아먹은 월가에 도착했다.

13:00 골드만삭스 앞

파산한 리먼 브라더스 본사 건물. 지난 14일 이 건물 간판은 ‘바클레이즈 캐피털’로 바뀌어 있었다. <뉴욕/유희진기자>

파산한 리먼 브라더스 본사 건물. 지난 14일 이 건물 간판은 ‘바클레이즈 캐피털’로 바뀌어 있었다. <뉴욕/유희진기자>

30층은 족히 되어 보이는 붉은색 건물 어디에도 세계 1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를 상징하는 간판은 없었다. 오가는 직원들을 상대로 취재하려는 기자에게 건물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이슈로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다”며 모든 취재를 원천봉쇄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비밀 클럽을 연상케 하는 철저한 보안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경비 태세에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14:40 뉴욕 증권 거래소

폐장시간을 1시간20분 남겨둔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는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선진 금융의 상징이지만 이날따라 그 자부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한 쪽에 명찰을 단 다섯명의 직원은 따로 떨어져 각각 건물에 기대고 서서 담배를 피웠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들어갔다 싶으면 10분 뒤에 다시 나와 초조한 얼굴로 건물 앞을 서성거렸다. 다음날 뉴욕 타임스는 14일 다우증시가 330포인트의 낙폭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15:30 JP 모건 체이스 은행

월가로 가는 입구에 위치한 이 은행 직원 4명이 모여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름 깊은 얼굴이었다. 넥타이를 풀어 헤친 루이스 도슨(33)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곧 감원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다들 아침에 30분씩 일찍 출근해 일을 시작한다”며 “모두들 자신이 해고 대상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16:40 월가 피트니스 클럽

월가 모퉁이에 있는 한 피트니스 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중년 남자 1명만이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기를 하며 땀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피트니스 클럽의 주인은 “월가 사람들은 건강이나 몸매 관리에도 철저해 주식시장 폐장 시간이나 퇴근 전에 들러 운동을 하고 간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월가에 해고 바람이 불기 시작한 후에는 회원 수가 30% 이상 줄었다”며 “등록되어 있는 회원들도 시간을 내기 힘든지 뜸하게 오거나, 오더라도 운동을 즐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17:30 부동산 에이전트 크리스퍼 김

부동산 중개업자 김씨는 “월가가 한창 호황일 때는 그들의 수입에 힘입어 맨해튼 주변의 평균 아파트 가격이 11억원에서 13억원대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들 아파트 가격이 월가의 해고 바람으로 조금씩 빠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올해 월가에 보너스 잔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감당하기 힘든 고가의 아파트를 팔고 싼 아파트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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