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는 오만했고, 똑똑하기보다 비열했다”

뉴욕 | 유희진기자 worldhj@kyung

부동산 파생상품 트레이더 김항주씨의 고백

# 속도에 목숨을 건다

미국 최대 저축은행 워싱턴 뮤추얼에서 일했던 재미교포 김항주씨(34·사진). 지난 8년간 외환 전문 헤지펀드 QFS, 얼라이언스캐피털, 구겐하임파트너스 등 월가의 여러 회사를 거치며 월가의 흥망성쇠를 경험한 부동산 파생상품 트레이더(설계인)다.

미국 월가에서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일했던 김항주씨가 지난 13일 뉴욕 맨해튼 32번가에서 기자와 만나 자신이 겪은 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 월가에서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일했던 김항주씨가 지난 13일 뉴욕 맨해튼 32번가에서 기자와 만나 자신이 겪은 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올해 초 워싱턴 뮤추얼에서 근무하고 있던 부서가 없어지면서 월가를 나오게 된 그는 현재 알파리서치캐피털이라는 금융 부티크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요즘 하는 일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예전에는 월가에서 고공행진하는 부동산을 가지고 파생상품을 만들어 장사를 했는데 지금은 가치가 떨어진 부동산을 가지고 거래를 연결해주는 고물 장사를 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 13일 뉴욕 맨해튼 32번가의 한 찻집에서 만난 그는 남방에 편안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분주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일”이라며 “중간 중간 휴대전화로 거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끊어질 수 있으니 이해해달라”고 양해를 구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국으로 이민오기 전 서울 매봉역 앞 비닐하우스에서 어렵게 살았다는 그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월가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1992년 조지 소로스가 영국에서 환투기를 해서 1조원을 벌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봤어요. 돈을 이렇게도 벌 수 있구나라고 깨달았죠. 새로운 세계가 보였습니다. 그 때 이쪽 분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인생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에 진학해 금융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금융을 전공했다. 졸업 후 월가에 첫발을 내디딘 후 2005년 월가의 마지막 직장인 워싱턴 뮤추얼에서 본격적으로 모기지 파생상품 일을 시작했다.

모기지 대출회사에서 주택담보부채권(MBS)을 사들여 그 것을 패키지화하고 구조화하는 작업을 해서 기관투자가들에게 팔았다. 혼자 한 달에 1조달러 규모의 거래를 했다.

# 한달 100만달러 거래는 보통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효율성과 속도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에요. 한 개인에게 1조달러 정도 맡기는 건 예사죠. 안에서 일하다보면 이게 참 모순이 많아요.” 그는 프랑스의 한 투자은행의 사례를 들었다.

“올해 초 프랑스의 한 투자은행이 7조원의 손실을 보았는데 이 손실을 나게 한 장본인은 서른살 먹은 트레이더였어요. 이 사람이 선물시장에서 매도할 것을 매수한 거죠. 이렇게 포지션을 반대로 해서 7조5000억원을 까먹었는데 그 사람 연봉이 3억원에서 5억원 사이예요. 의사 결정 과정이 너무 복잡한 것도 좋지 않지만, 월가는 효율성을 위해 그 많은 과정을 생략하다 보니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 거죠.”

그는 월가 내부의 모습을 묘사하며 시종일관 전쟁터에 비유했다.

“월가에서는 연구원들을 영입해 모델을 개발하게 하죠. 이게 파생상품으로 시장에 나오는 거예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는 연구원들을 전쟁터에서 쓸 무기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복잡한 수학 공식이 이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해요. 그런데 이 연구 개발자들이 무기를 만들면서 너무 복잡하게 만들려다보니 한 가지를 빼먹었어요. 계산을 해보면 최종적으로는 이 무기가 아군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거죠.” 그는 바로 여기에서 위험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트레이더인 저는 그 무기를 받아 들고 옮겨요. 전쟁터에서 저는 그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 무기가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그 사이에 보호장치를 이것 저것 집어 넣습니다. 금융용어로 위험 헤지(방지 혹은 분산)를 한다고 하죠. 구조화를 하고, 묶는 것(패키지)이 바로 이런 작업들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도 오류가 났어요.”

# 월가 사람, 능력 과신으로 기차와 함께 추락

연구원들이 아군도 죽일 수 있는 수학식을 만드는 실수를 했다면 트레이더들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떤 것도 다 헤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했다.

“부동산시장 전체 가격이 떨어지는 것처럼 시장 전체가 망가지는 위험은 절대 없앨 수 없는 것인데, 없앨 수 있다고 믿은 거예요.”

그는 월가 사람들이 “오만했다”고 평가했다.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인데 집값이 언젠가는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겠어요? 다만 자신의 머리와 능력을 너무 과신해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 직전까지만 장사를 한 후에 기차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생각한 거죠. 근데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기차에 탄 채 함께 추락한 겁니다. 심지어 이 떨어지는 기차에 가속도까지 붙었어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거죠.”

# 월가 사람들에 대한 편견

그는 월가 사람들이 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건 환상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투자은행 1위인 골드만삭스가 돈 버는 방법을 보면 똑똑한 게 아니라 비열해요. 기름을 잔뜩 사놓고 시장에 소문을 퍼뜨립니다. ‘오일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그럼 시장에서는 소문이 퍼지고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발전해 시장이 반응을 합니다. 상상이 가시죠?” 가격이 오를 때 골드만삭스는 미리 사두었던 기름을 풀어 돈을 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파워가 있었으니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힘들겠죠.”

월가가 벌여놓은 일들을 풀어나가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것 또한 월가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월가는 인적 자원에 의해 돌아가는 동네예요.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 줄 아는 고도의 전문직들이 모여 있었죠.” 그는 만화에서 흔히 묘사되는 소림사 무술 배우기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소림사에서 3년 동안 밥하고 빨래 해준 후 무술을 배우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듯이 월가가 그랬어요. 학벌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 월가라는 동네에서 3~4년 고생하며 기술을 배워요. 위험을 헤지하는 것, 투자자들 입맛에 맞게 상품을 짜는 것 등을 배우죠. 그러면 세계 금융계를 좌우할 수 있었죠.”

# 월가 안에서만 돌고 도는 금융기술

그렇게 해서 배운 기술들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월가 안에서 돌고 돌았다. 그래서 밖에서는 들여다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만들어 놓았다.

그 대가로 월가 사람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해 부실이 터져나오기 전까지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월가 생활 10년차를 눈앞에 두고 있던 그는 1년에 약 3억원에서 5억원 정도의 연봉을 받았다. 월가의 관례로 10년차가 넘으면 통상 연봉이 수직 상승한다. 말하자면, 그는 고액 연봉을 코앞에 두고 좌절한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잘나갔는데 중간에 꺾여버리니까 막막하고 허탈감이 밀려왔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려움이 밀려왔어요.”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내가 한 일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을 벌고 너무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과연 월가는 정당했을까 생각했더니, 아니었어요. 월가는 방종으로 흘렀어요. 사람들 또한 고액 연봉만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질주하며 달렸죠. 1년에 적어도 4번은 호화 해외 여행을 다니고, 별장을 사고, 아이들도 고급 사립학교에 보냈죠. 요즘 그런 사람들 중 해고된 후 잠못이루는 사람 많을 겁니다. 월가는 현재 금융회사의 무덤이 되고 있어요.”

# 투자은행 설립은 망하는 지름길

투자은행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에 “망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의견을 밝혔다. “일단 한국은 투자은행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월가의 투자은행은 의사결정 단계가 매우 짧고 빠르게 움직이죠. 가장 높은 사람까지 가는 데 두 단계밖에 안걸려요. 하지만 한국은 위계질서가 얼마나 분명한가요.” 그는 한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이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직원들에게 수조원을 다루도록 허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환경도 좋지 않아요. 미국은 처음에 따로 시작했다가 금융상품이 엮이기 시작하면서 위에서 꼬여 상황이 악화됐죠. 한국은 어떤가요. 이미 계열사끼리 얽히고 설켜 있어서 기본부터가 꼬여 있어요. 여기에 금융상품까지 얽히기 시작하면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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