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전에서 시작되는 도전, 배터리 환생 시나리오

포항 | 이재덕 기자

② 철강의 도시에서 나온 ‘하얀 석유’

에코프로씨엔지 직원이 폐배터리 스크랩을 분류해서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리고 있다. 에코프로씨엔지 제공 사진 크게보기

에코프로씨엔지 직원이 폐배터리 스크랩을 분류해서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리고 있다. 에코프로씨엔지 제공

전기차 배터리 핵심 원료 ‘리튬’
호주·칠레·중국서 대부분 생산
산업 비중 높은데 값 변동 심해

지난달 20일 경북 포항 흥해읍의 영일만 산업단지를 찾았다.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양극재를 생산하는 에코프로 계열사들이 모인 곳이다.

‘철강의 도시’ 포항이 선박 기자재 생산업체를 위해 조성한 단지였지만, 2018년 에코프로가 입주하면서 이제는 ‘배터리 단지’가 됐다. 에코프로그룹의 이노베이션이 수산화리튬을, 머티리얼즈가 전구체를 생산하면, 비엠·이엠이 전구체와 수산화리튬을 결합해 배터리 양(+)극을 구성하는 양극재를 만든다.

배터리 생산 때 나온 셀 스크랩
파쇄·소성 뒤 철·구리 등 분리
황산 용액으로 리튬 성분 추출

이날 기자가 방문한 곳은 에코프로씨엔지(CnG). 폐배터리에서 리튬 등 주요 물질을 회수해 이노베이션과 머티리얼즈에 공급하는 업체다.

씨엔지의 배터리 재활용 공장에 들어서니 커다란 이동형 선반 위에 500㎏ 마대 자루들이 놓여 있다. 자루 안에는 스마트폰 크기 정도의 검고 얇은 판이 가득했다.

직원이 “배터리 기업 A사가 파우치형 배터리를 만들다가 나온 셀(Cell) 스크랩”이라며 “양극판과 음극판, 분리막 등이 붙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극판은 알루미늄박에 리튬·니켈·코발트·망간 등으로 된 양극재가 도포됐고, 음극판은 구리박(동박)에 흑연으로 된 음극재가 발려 있다.

전기차가 본격 도입되면서 리튬이온 배터리 제조공정에서 나온 이 같은 셀 스크랩이 늘어나는 추세다. 2020년 국내 배터리 제조사에서 나온 셀 스크랩은 2만여t 수준이었지만, 올해는 10만t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아직 폐배터리는 흔치 않다. 폐차장에 순수전기차(BEV)가 대거 나오는 3~4년 뒤에야 국내 배터리 재활용 시장도 셀 스크랩에서 폐배터리 중심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폐배터리, 3년 뒤 대거 쏟아져
자동 해체·방전 기술 개발 관건

씨엔지에는 에너지저장장치(ESS)로 쓰였던 배터리팩(배터리셀 묶음)이 가끔 들어온다. 이때는 직원들이 방전기로 배터리팩을 방전시킨 뒤, 셀을 소금물에 담가 잔류 전압을 제거한다. 박석회 씨엔지 대표이사는 “폐배터리가 시장에 대거 나오기 전에 자동으로 해체하고 방전시키는 처리 기술을 개발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이 같은 종류의 셀 스크랩이 담긴 자루를 골라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렸다. 셀 스크랩은 양극재에 따라 포함된 금속과 함량이 다르다. 니켈(Ni)·코발트(Co)·망간(Mn)의 비율이 6 대 2 대 2인 양극재(NCM622)가 포함된 스크랩도 있고, 8 대 1 대 1인 하이니켈 양극재(NCM811) 스크랩도 있다. 망간 대신 알루미늄이 들어간 제품(NCA)도 있다.

셀 스크랩은 파쇄기를 거쳐 소성로(열처리를 위한 가마)로 들어갔다. 셀 스크랩에 붙어 있는 분리막 등이 400~500도 가마에서 소각된다. 남은 것들은 가루를 내는데, 입자의 무게와 자성 등을 이용해 철(포장지), 구리(음극판), 알루미늄(양극판)을 분리해 따로 모은다. 공정의 끝에 있는 기계에서 검은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직원이 검은 분말로 가득 찬 자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블랙 파우더’예요. 리튬·니켈·망간·코발트·흑연 같은 배터리 핵심 광물만 남은 가루죠.”

제련을 위한 침전반응기. 에코프로씨엔지 제공

제련을 위한 침전반응기. 에코프로씨엔지 제공

블랙 파우더가 나오면 제련(금속 추출 과정)에 들어간다. 제련소라고 해서 뜨거운 용광로를 기대했더니 웬걸, 액체 저장 탱크만 여러 대 놓였다. 직원이 “탱크 안에 블랙 파우더와 황산이 담겼다”고 말했다. 블랙 파우더의 리튬 성분이 황산 용액을 만나면 황산리튬으로 변해 블랙 파우더 위에 뜬단다. 이른바 ‘습식 제련’이다. 침전물 빼고 액체(황산리튬)만 거둔 뒤 단지 내 곳곳을 연결하는 파이프를 통해 이노베이션 건물로 보낸다. 황산리튬은 이노베이션에서 순도 높은 하얀 분말로 가공되는데, 바로 양극재 원료가 되는 수산화리튬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리튬은 별 볼일 없는 광물이었다. 당시 전 세계 리튬 수요는 2만t(탄산리튬당량 기준)으로, 60%가 도자기·유리·알루미늄 따위의 생산에 쓰였다. 하지만 전기차가 보급되자 리튬에 ‘하얀 석유’라는 별명이 붙는 등 대접이 달라졌다. 리튬이 배터리 원가의 50%를 차지하는 데다, 생산국이 호주(채굴량 기준 47%)·칠레(30%)·중국(19%) 등 일부 지역에 편중됐기 때문이다.

가격 변동 폭도 상당하고, 배터리와 전기차 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최근에는 전기차 수요 둔화 가능성에 가격이 ㎏당 86위안(1만5700원)까지 떨어졌지만, 2022년만 해도 ㎏당 500위안(9만1000원)에 달했다. 리튬을 폐배터리에서 뽑아내면 이런 불확실성을 크게 낮출 수 있다.

미국은 기업들이 폐배터리를 수거해 미국 현지에서 광물을 추출해 사용하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상 ‘미국산’으로 분류해 보조금을 지급한다. 유럽연합(EU) 의회는 폐배터리에 있는 리튬과 코발트 등 광물을 의무적으로 회수하고 배터리 생산에 재활용 광물을 일정 비율 이상 포함시키는 ‘지속 가능한 배터리법’을 통과시켰다. 배터리 재활용으로 주요 광물의 역외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취지다. 심지어 배터리 원자재의 ‘큰손’ 중국마저 리튬의 호주·칠레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리튬 재활용 산업을 지원한다.

탱크 속에 남아 있는 침전물은 어떻게 처리될까. 전구체를 만드는 머티리얼즈가 침전물에서 전구체 원료인 니켈·망간·코발트 등을 분리한다. 에코프로가 취급하지 않는 음극재 원료인 흑연은 다른 업체가 사간다. 에코프로그룹은 양극재 원료의 6%를 씨엔지의 재활용 광물로 조달한다. 내년에는 10% 수준까지 높인다는 목표다.

최근 전기차 보급이 주춤하자 완성차업체들이 보다 저렴한 전기차를 내놓기 시작했다. 값비싼 니켈·코발트·망간 대신 인산철(FePO₄)을 사용하는 배터리를 장착해 가격대를 낮췄다. 리튬인산철 배터리에는 회수해서 돈이 될 만한 금속이 리튬뿐이다.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재활용할 때도 NCM 재활용 수준의 수익을 낼 수 있을까.

박 대표가 “리튬인산철 배터리에서 리튬 등의 추출을 고도화하는 기술을 산학 협력 방식으로 연구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돈 안 된다’는 이유로 가만있어서는 안 되잖아요. 당장 코스트(비용)는 들지만, 폐기물 줄이는 방안을 찾아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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