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업들이 사업보고서를 통해 총수와 전문경영인이 지난해 얼마나 받았는지 공개했다. 업황에 따라 보수 규모에 부침이 있었지만 바뀌지 않은 부분도 있다. 미등기 임원인 총수 일가가 전문경영인보다 고액 연봉을 받는 관행이 주요 기업에서 지속됐다는 점과, 여전히 기업들이 구체적인 보수 산정 기준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롯데쇼핑 사업보고서를 보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 중인 롯데쇼핑에서 지난해 19억원을 받았다. 이는 대표이사인 김사무엘상현 부회장보다 3억원가량 더 많은 액수다. 회사 측은 “급여는 직급, 근속년수, 직책 유무, 회사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고 상여는 매출액, 영업이익 등 회사의 경영 성과와 리더십, 윤리경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신 회장은 롯데물산과 호텔롯데에서도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들 회사는 아직 사업보고서를 공시하지 않은 만큼 신 회장의 총 보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2022년 신 회장은 양사 대표이사보다 두 배가 넘는 보수를 받았다.
기업 실적 악화에도 임금이 오른 경우도 있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지난해 이마트에서 약 37억원을 받았다. 강희석 대표이사와 권혁구 사내이사보다 적었지만, 이들이 퇴직금을 받은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가장 많이 받은 셈이다. 2022년 당시에도 정 회장은 36억원을 받으며 강 대표이사보다 13억원가량 많았다. 이마트는 최근 실적 악화로 창립 후 첫 희망퇴직을 시행했다.
이마트는 보수 산정 기준에 대해 “이사회에서 결의한 임원 보수규정에 따라 경영 성과를 고려해 성과급을 지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영 성과에 대해서는 “회사의 재무 성과 등으로 구성된 계량지표와 중점 추진 사항 이행, 핵심과제 평가 등의 비계량지표를 합산해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이마트와 신세계에서는 줄곧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과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 등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 중인 총수 일가가 보수 상위권을 차지했다.
박문덕 하이트진로그룹 회장은 지난해 하이트진로로부터 77억원을 받으면서 같은 기간 12억원을 받은 김인규 대표이사보다 약 6배 많이 받았다. 하이트진로는 임원 보수 산정 기준에 대해 “전년 영업이익 달성률의 계량지표와 핵심과제 이행 정도 등의 비계량지표를 평가해 임원 보수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이사회 결의로 정한 기준금액의 87∼119% 수준에서 지급한다”고만 설명했다. 구체적인 개인별 기여도 등 평가 결과에 대해서는 따로 밝히지 않았다.
책임지지 않는 미등기 임원
기업 임원은 등기 이사와 미등기 이사로 나뉜다. 주주총회를 거쳐 선임되는 등기 이사는 이사회를 통해 새로운 사업 진출이나 주요 자산 매입·매각 등 회사의 경영상 중요한 결정에 참여한다.
반면, 주총을 거치지 않고 선임되는 미등기 임원은 이사회에 참여하지 않고, 임기 제한도 없다. 법적인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기업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총수로서는 책임 없이 혜택만 챙기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총수 일가가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 중인 회사를 집계해 발표한다. 지난해 기준, 이런 회사는 136곳에 달했는데 하이트진로(46.7%), DB(23.8%), 유진(19.5%), 중흥건설(19.2%), 금호석유화학(15.4%) 순으로 총수 일가가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 중인 비율이 높았다.
미등기 임원 보수가 과하게 지급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DB하이텍은 등기 임원 6명에게 13억원가량을 지급했다. 같은 해 김준기 창업 회장과 김남호 회장은 각각 34억원과 31억원을 받았다. 미등기 임원인 총수 일가 2명이 전체 등기이사 보수의 5배를 넘게 받은 셈이다. 의결권 자문사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회사는 임직원의 보수체계를 설계·운영하고 적정성을 평가하는 별도의 보수위원회를 설치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국내 상장기업 등기 이사의 보수 한도는 주주총회에서 결정한다. 그러나 총액을 결정할 뿐, 구체적인 보수 산정은 사실상 이사회가 판단한다. 문제는 이사회가 지배주주나 경영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보수 산정 기준은 ‘깜깜’
대다수 기업들은 미등기 임원의 구체적인 보수 산정 기준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들 기업은 성과급 성격의 상여보다 기본급 성격의 급여가 보수 대부분을 차지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해 ㈜한화와 한화솔루션, 한화시스템에서 모두 가장 많은 보수를 받았음에도 구체적인 기준은 제시하지 않았다. ㈜한화는 김 회장에 기본급 성격인 급여로 36억원을 지급하면서 “임원의 직급과 역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책정했다”고만 밝혔다.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지난해 ㈜CJ로부터 42억원가량을 받으며 김홍기 대표이사(약 32억원)보다 10억원가량 더 받았다. 이 회장은 상여 없이 오로지 급여로만 42억원을 받았지만 구체적인 보수 산정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이 회장은 CJ제일제당에서는 약 2.5배, CJ ENM에서는 약 1.5배를 전문경영인인 대표이사보다 더 받았다.
일부 기업 총수는 배임·횡령 혐의로 재판 중이거나 취업제한 처분을 받았음에도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하며 막대한 규모의 보수를 받았다.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이용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해욱 DL그룹 회장은 지난해 대법원에서 벌금형이 확정됐다. 이 회장은 회사로부터 지난해 36억원을 받았는데, 5억원 이상을 받은 임원은 이 회장이 유일했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뒤 취업제한이 됐다. 박 회장은 지난해 금호석유화학으로부터 21억원을 받았다. 이는 전문경영인인 백종훈 대표이사가 받은 6억원보다 3배가 넘는 액수다. 심지어 이는 박 회장이 지난해 회장직을 사임하고 무보수 명예회장으로 재직한 기간을 제외한 9개월 동안 지급된 보수였다. 박 회장은 지난해 광복절을 맞아 특별 사면됐다.
이사회 보수 50% 넘게 가져가는 총수
등기 임원이지만, 과도하게 보수를 받는 사례도 있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두 곳에서 122억원을 받았다. 두 회사의 등기 임원 22명이 지난해 받은 보수 총액(243억원)의 50.2%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해 ㈜LG 이사회는 7명의 등기 임원에게 134억원을 지급했다. 이 중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62.2%인 83억원을 받았다. 특히 구 회장은 권봉석 LG 부회장보다 약 2.5배 더 많이 받았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다른 임원들과 비교해 지배주주 일가 임원에게만 과도하게 높은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합리성과 공정성이 결여됐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총수 일가인데도 전문경영인보다 더 적게 받는 경우도 있었다. 정기선 HD조선해양 부회장은 지난해 보수로 8억원가량을 받았는데, 가삼현 부회장 급여와 상여를 합친 금액(11억원) 보다 적었다. 정 부회장은 2022년에도 가 부회장 보수의 절반 가량을 받았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총수 일가여도 회사에 오래 재직한 전문경영인보다 임금을 덜 받는 것 자체가 당연하다”며 “그런데도 이 같은 일이 이례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보수 산정이 왜곡된 경우가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