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기업본색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한수빈 기자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한수빈 기자

삼성물산의 주가가 지난달 19일 한때 17만1700원까지 치솟았다. 회사의 주가가 17만원대를 기록한 것은 2015년 9월10일 이후로 약 8년5개월 만이다.

삼성물산의 주가 급등은 배당 문제를 놓고 행동주의 펀드 연합과 회사 측이 갈등을 빚은 게 영향을 미쳤다. 최근 영국계 자산운용사인 시티오브런던 등 5곳의 행동주의 펀드 연합은 삼성물산에 5000억원어치 자사주를 매입하고, 보통주와 우선주에 대해 주당 각각 4500원, 4550원씩 배당할 것을 요구했다.

삼성물산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이 제안한 주주환원 규모는 1조2364억원으로, 2023년뿐 아니라 2024년 회사의 잉여 현금흐름 100%를 초과하는 금액”이라며 난색을 보였다. 잉여 현금흐름은 기업이 벌어들인 돈 중 세금과 설비투자액 등을 제외하고 남은 금액을 말한다. 잉여 현금흐름이 100%가 넘는다는 의미는 기업이 벌어들인 돈보다 더 많은 금액을 주주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미래 투자를 위해 저축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기업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요구였다.

삼성물산을 향한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에는 영국계 행동주의 펀드 팰리서 캐피탈이, 같은 달 미국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화이트박스 어드바이저스가 각각 주주 제안을 요구했다. 이들의 요구도 주주 배당을 넘어 비핵심 사업부 매각과 지주사 전환 등 전방위적이다.

그룹 지배구조 핵심 ‘삼성물산’

삼성물산은 왜 행동주의 펀드의 단골 공격 대상이 됐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성물산이 어떤 기업인지부터 먼저 살펴봐야 한다.

삼성물산은 건설과 상사, 패션, 리조트, 바이오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영업이익이 3조원에 가까울 정도로 탄탄한 회사다. 그러나 삼성물산의 진짜 힘은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지분에서 나온다. 삼성물산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은 지난해 9월 기준 삼성전자 4.40%, 삼성생명 19.34%, 삼성바이오로직스 43.06%, 삼성SDS 17.08% 등에 달한다. 시총 규모가 58조원으로 성장한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물산이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달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달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실질적인 지주회사라는 평가는 총수 일가 지분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1월26일 기준, 삼성물산 최대 주주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18.26%)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5.63%),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6.28%) 등의 보유분까지 합하면 총수 일가 측 지분율은 33.28%에 달한다. 여기에 삼성 측 우호 지분으로 분류되는 KCC(9.17%)까지 고려하면 지분이 1.46%에 불과한 시티오브런던 등 5곳의 행동주의 펀드의 제안이 3월 주주총회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총수 일가가 삼성물산 경영권을 확보한 만큼 삼성의 지배구조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진다. 그룹 내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 지분이 1.63%에 불과한 이재용 회장에게 삼성물산은 경영권 유지를 위해 필요한 회사다.

그러나 이러한 우량 계열사의 지분을 소유했음에도 삼성물산에는 ‘저평가’라는 꼬리표가 항상 달렸다. 최근 주가가 올라 시가총액이 약 30조원으로 뛰었지만, 삼성전자 등 삼성물산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 가치만 약 25조원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저평가됐다는 이유에서다. 화이트박스는 “삼성물산 주식이 순자산 가치 대비 68%가량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저평가 논란 불거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삼성물산 가치가 저평가됐다는 지적은 2015년 제일모직과의 합병 과정에서부터 불거졌다. 당시 두 회사는 제일모직 주식 1주와 삼성물산 약 3주를 바꾸는 조건으로 합병을 결의했다. 주주들은 제일모직 주식을 23.2% 보유한 이재용 회장 등 총수 일가(42.2%) 측에 유리하도록 합병비율을 산정했다는 이유로 반발했다. 주주들의 불만은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합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개입해 주주로서 손해를 입었다며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지난달 서울중앙지법이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 주주의 이익이나 의사가 도외시된 바 없다”고 판단하면서 삼성물산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는 일정 부분 해소됐지만, 시장에서 가치가 낮게 평가됐다는 주장은 여전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성물산 주주연대 측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성물산은 9년 이상 이어진 지배주주의 법적 문제와 주주 환원 부재로 주가가 크게 저평가된 상태”라고 꼬집었다. 실제 2015년 제일모직과의 합병 이후, 재상장 당시 16만원 넘게 올랐던 주가는 10년 가까이 이를 크게 밑돌았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 등이 지난달 7일 서울 서초구 민변 회의실에서 개최한 삼성물산 불법합병 1심 판결 분석 좌담회에서 김종보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 등이 지난달 7일 서울 서초구 민변 회의실에서 개최한 삼성물산 불법합병 1심 판결 분석 좌담회에서 김종보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최근 삼성물산도 주주환원 정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1심 선고를 앞두고 삼성물산 측은 전체 자사주(2358만2524주)의 3분의 1 규모의 주식을 3년에 걸쳐 소각하기로 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그만큼 유통하는 주식 수는 줄어들어 주가에는 긍정적이다.

총수 일가에도 불리하지 않다. 보유한 주식 수는 그대로지만 전체 발행 주식 수를 줄이면 지분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우호 지분인 자사주를 소각하더라도 경영권에 미치는 영향도 작다. 이부진 사장이 지난달 11일 삼성물산 지분 0.65%를 블록딜(시간외 대량 매매) 형태로 처분하면서 이재용 회장(18.10%) 등 총수 일가 측 지분율은 기존 33.63%에서 33.28%로 소폭 낮아졌지만, 여전히 33%를 웃돌고 있다. 지분율 33%는 주총에서 정관변경, 이사 또는 감사 해임 등 특별결의를 할 수 있는 기준이다.

삼성물산은 보통주 주당 2550원, 우선주 주당 2600원을 배당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총수 일가가 2026년까지 상속세로 8조원가량을 내는 만큼 배당 정책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 처방, 후진적 지배구조 개선해야”

근본적인 가치 상승을 위해 지배구조 개선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러한 요구는 건설·상사 등 주력산업의 성장 동력이 떨어지고, 지주회사로의 전환도 불확실한 데 따른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 스미스 팰리서캐피탈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성물산이 극도로 저평가된 이유는 회사의 지배구조가 불투명하고 시장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친환경 에너지나 바이오 등 신사업 투자 확대, 지주사 전환을 제안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한국 증시 도약을 위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1차 세미나’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한국 증시 도약을 위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1차 세미나’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증시의 저평가 해소를 위해 기업 스스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세우도록 맡기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도 회의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은 재벌 지배구조에 있다”는 내용의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인베스트 조나단 파인즈 아시아 수석 포트폴리오 매니저의 글을 소개했다.

“주주가치 증대를 위해 기업이 투자자 이익을 고려하도록 유도하는 일본식 접근 방법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처럼) 총수 일가 같은 지배주주가 거의 없고, 소액주주 보호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며 특정 지배주주를 대변하는 이익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배주주가 합법적으로 소액주주를 희생시키며 이익을 얻는 것이 가능한데 어떻게 이들을 설득할 수 있나. 최근 몇 년 동안 시행된 정부 정책 개정은 마치 지배주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기사 어떠세요?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