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기업본색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금호석유화학 본사. 금호석유화학 제공

금호석유화학 본사. 금호석유화학 제공

“감사위원을 분리 선출하면 투기펀드의 머니게임에 악용될 수 있다. 투기펀드 등이 3%씩 지분을 쪼갠 후 연합해 회사를 공격할 수 있고 이사회에 진출한 후에는 사업 구조조정 등 이사회의 각종 안건에 제동을 거는 방법으로 경영을 방해할 수 있다.”

정부가 2020년 당시,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 최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고 다른 이사들과 분리해 선출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추진할 때 재계 단체에서는 우려를 표명했다. 일각에서는 대주주가 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해 산업 스파이가 이사회에 진출해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재계의 우려는 현실화됐을까.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기 위해 감사위원을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출하는 법안이 통과된 지 3년여가 지났지만, 소수 주주가 추천한 이사가 감사위원에 뽑힌 사례는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결과만 놓고 보면 재계의 걱정은 ‘지나친 기우’였다.

경향신문이 15일까지 공시된 시가총액 50대 기업의 의결권 대리 행사 권유 참고서류를 보면, 소수 주주가 감사위원을 추천한 사례는 전무했다. 상장사로 넓히더라도 행동주의 사모펀드(PEF) 운용사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이 금호석유화학 감사위원으로 김경호 KB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을 추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련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

미풍에 그친 감사위원 분리 선출

감사는 회사의 업무나 회계를 감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상법에 따라 자산총액이 2조원 이상인 상장사는 회사의 업무와 회계를 감시하는 감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이때 감사위원회는 3명 이상의 이사로 구성해야 하고, 사외이사가 위원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감사위원회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다.

총수 일가를 견제할 수 있는 만큼 소수 주주가 추천한 감사위원을 선임할 수 있도록 제도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상법 개정 이후, 총수 일가가 유죄 판결을 받은 회사 중 사외이사 감사위원의 임기가 만료되는 곳이 당장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왔다.

실제로 한국ESG기준원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주주제안이 대폭 늘었는데 이 가운데 이사·감사·감사위원 선임 관련 건은 평균 5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2013년 5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남양유업대리점 업주들이  물량 떠넘기기로 받은  제품을 반납하며 각종 유제품들이 쓰레기가 되어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3년 5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남양유업대리점 업주들이 물량 떠넘기기로 받은 제품을 반납하며 각종 유제품들이 쓰레기가 되어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부 성과도 있었다. 남양유업 지분 3.07%를 보유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은 2023년 주총에서 감사 선임 등 주주제안을 했다. 2022년 말 기준, 홍원식 회장 등 특수관계인의 지분이 53.08%에 달했지만 ‘3%룰’로 차파트너스가 제안한 감사 선임 안건은 통과됐다. 그동안 홍 회장의 측근으로 분류됐던 이사가 9년 동안 감사를 맡아왔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 감사 변경으로 홍 회장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이 이사회에 진출한 것이다.

그러나 감사위원으로 한정할 경우 상법 개정 효과는 미미했다. 지난해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관련해 5건의 주주제안이 있었지만 모두 부결됐다. 이는 감사 선임과 관련한 주주제안 15건 중 6건이 가결된 것과 대조적이다. 자산규모 2조원 이상 회사는 감사위원회 설치가 의무인 점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회사는 지배주주를 견제하는 세력이 부족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결과는 예견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이 2016년부터 도입된 금융사의 경우, 외국인 투자자 보유 비중이 평균 65%를 넘는 국내 금융지주사에 대한 감사위원 선임 시도는 없었다. 헤지펀드 비중 자체가 크지 않고, 대다수 주주는 회계 분식이나 횡령 배임 등 기업 지배구조에서 크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대부분 경영진 측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주제안 대상 기업들을 보면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남양유업은 대리점에 물품을 강매하고 대리점주에게 폭언한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고, 사모펀드 한앤코와의 분쟁에 휘말려 결국 경영권이 넘어갔다. SM엔터테인먼트도 불투명한 지배구조로 논란이 계기가 돼 2022년 행동주의 펀드인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추천한 감사위원이 선임됐다.

지분 빌려주고 기습 교체···기업들의 꼼수

감사위원 분리 선출 효과가 반감된 데는 기업의 ‘꼼수’도 영향을 미쳤다. 총수 일가 일감 몰아주기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아 소수 주주들과 갈등을 겪었던 사조그룹은 지난해 계열사끼리 상대방 회사 지분을 매입했다. 이들 회사가 매입하는 지분이 3% 미만인 점을 보면 감사위원 선임에 적용되는 ‘3%룰’에 대비해 의결권 확보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사조그룹의 이런 행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은 2022년 사조산업 임시 주총을 앞두고 지인 2명에게 각각 3%씩 지분을 빌려줘 의결권 행사 가능 지분을 추가로 6% 늘렸다. 결국, 총수 일가 측 지분을 20%까지 늘린 사조산업은 소수 주주가 추천한 감사위원의 선임을 막았다.

‘007작전’처럼 감사위원 교체를 신속히 단행하는 사례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현대엘리베이터는 임시 주총 개최를 임박해서야 알린 데 이어 주총이 열리기 약 2주 전에 감사위원 사외이사 선임 안건을 갑자기 알렸다.

일정이 촉박했던 만큼 사측이 선임한 이사 후보만 단독으로 상정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애초 올해 3월 임기 만료인 감사위원 한 명이 중도 사임하면서, 정기 주총 때 소액주주 측 감사위원 선임을 노렸던 행동주의 펀드의 계획도 불발됐다. 주총 이사회 수에 상한을 두는 방식으로 소수 주주 추천의 감사위원 선임을 막는 사례도 등장했다.

지난해 3월에 열린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 삼성전자 제공

지난해 3월에 열린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 삼성전자 제공

이 같은 꼼수를 막기 위해선 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감사위원 분리 선출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상장사 감사위원회가 3명 이상의 이사로 구성되는 점을 고려하면, 분리 선출된 감사위원이 과반수는 돼야 효과적으로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경제개혁연대는 그동안 꾸준히 대기업에 정관을 변경해 감사위원의 과반수를 분리 선출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대다수 기업은 난색을 표했다. 삼성전자, SK, 현대차, 롯데지주, 한화, HD한국조선해양은 “외국 투기자본에 의해 경영권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부정적이었다. LG, 한화 등은 “주주 의결권 제한(3%룰)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수용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현재와 같은 선임 방식으로는 감사위원회의 독립성 확보가 쉽지 않다고 강조한다.

“정관으로 분리 선임 감사위원을 2명 이상으로 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정관으로 분리 선임되는 감사위원회 위원을 2명 이상 또는 과반수로 정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감사위원회는 회계감사와 업무감사를 통해 경영진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배주주나 CEO로부터 독립해 선임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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