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바쿠라 여종업원도 노조 결성 “문제 직접 해결”

도쿄 | 특별취재팀

일본서 번지는 ‘당사자 운동’

지난해 12월22일 일본 노동계에서는 ‘상식파괴’의 일이 벌어졌다. 카바쿠라(카바레와 클럽의 합성어로 일본식 단란주점) 노조가 탄생한 것이다. 사쿠라이 린 노조 회장은 기자들에게 “ ‘밤의 세계’의 상식처럼 돼버린 임금체불, 고액벌금 등의 시정과 차별해소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호스티스 등 노조원들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도쿄 중심부를 행진하며 체불임금 해소, 노동기준법 준수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고용난민 시대, 일자리 없나요?]카바쿠라 여종업원도 노조 결성 “문제 직접 해결”

일본의 노동계에서는 요즘 당사자 운동이 한창이다. 정치권은 물론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 등 기성 노동조직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해온 가운데 스스로 노조를 만들거나 문제해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카바쿠라 여종업원은 물론 미용사, 주유소 아르바이트 직원까지 불안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이 운동의 주력군이다. ‘남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게 불문율처럼 여겨지면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체념하거나 참고 견디던 일본 사회의 습성에 비춰보면 놀랄 만한 변화다.

2007년 10월 도쿄 시부야에 본점을 둔 대형 미용실 체인에서 노조가 결성됐다. 입사한 지 2년 만에 산재를 당한 야나기 가쓰야가 수도권 청년유니온에 가입한 뒤 ‘수도권 미용사노조’를 만든 것이다. 회사는 야나기의 치료비와 밀린 잔업수당을 돌려주며 회유했지만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과다근무를 하는 동료들을 생각해 노조를 만드는 쪽을 택했다. 이후 회사를 상대로 잔업수당 지급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교섭을 벌였고, 회사는 2008년 1월 338명의 체불 잔업수당 4800만엔을 돌려줬다. 2008년 2월에는 주유소의 셀프화에 맞서 도쿄 내 주유소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주유소 노조’를 결성했다. 일본 프리터 전반노조는 2008년 10월 “개별기업과 단체교섭하는 방식으로는 불안정 노동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아소 다로 당시 총리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청하기도 했다. 총리 측이 교섭을 거부하자 노조는 소송을 제기해둔 상태다.

당사자 운동에 대한 일반 여론은 비교적 긍정적인 편이다. 카바쿠라 노조에 대해 ‘돈 많이 버는 술집여성들이 무슨 노조냐’라는 냉랭한 시선도 있지만 카바쿠라가 이미 제도권 내에 편입돼 있고 상당수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취업하는 직장임을 감안할 때 근로조건 개선이 필요하다는 옹호론이 우세한 편이다. 사쿠라이 회장은 “근무도중 남자 직원들에 의한 성희롱이 비일비재하며 그만둘 경우 마지막달 월급을 주지 않는 일도 흔하다”고 말했다. 카바쿠라 유니온 블로그에는 “근무조건이 맞지 않아 그만두겠다고 하니 집에다 이르겠다고 위협했다” “소모품 비용 명목으로 후생비와 공익비를 떼간다”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호소하는 상담사례들이 적지 않게 올라와 있다.

지역노조가 결성돼 단체교섭을 요구할 경우 기업들은 대체로 응하는 편이다. 지역노조의 교섭권에 대한 사법당국의 보호가 한국에 비해 강한 까닭이다. 개인차원에서 회사와의 부당노동행위에 맞서기보다는 개인가맹 노조 산하에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는 방식이 많이 활용된다. 렌고 등도 지역노조 운동이 확산되자 산하에 비정규직 상담창구를 개설하는 등 뒤늦게 비정규직 보호에 나서고 있다.

시즈오카 노동조합평의회의 지난해 노동상담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임금체불, 퇴직강요 등 983건의 상담건수 중 해결사례는 531건인 54%에 달하고 신규가입한 근로자수는 374명에 이른다. 2008년 닛산 자동차부품 제조공장에서 위장도급 방식으로 일하던 노동자 40명이 해고되자 시즈오카노조평의회 지부로 결성토록 한 뒤 해고무효 교섭에 나섰다. 복직에는 실패했으나 1인당 30만엔의 위로금과 6개월분 기숙사비를 회사 측이 제공했고, 취직자리 알선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야시 쓰쿠시 시즈오카 노조평의회 의장은 “지역노조의 부당노동행위 해결률이 높아지면서 법원이나 병원 등을 찾은 근로자들에게 지역노조에 상담할 것을 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니트족, 실직자 등 불안한 고용에 시달리는 ‘프레카리아트’들이 벌이는 ‘자유와 생존의 메이데이’는 올해도 도쿄 엔카쿠지 등 전국 9개 지역에서 벌어졌다. 프리타 메이데이 행사는 차량 위에서 펼쳐지는 사운드 데모와 코스프레 등 다양한 축제형식으로 일본은 물론 세계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올해 행사 홈페이지에는 이런 인사말이 올라와 있다. “우리가 기민(棄民)이다. 정원사, 청소부, 경비, 테마파크의 잔디 관리, 거푸집 목수, 웨이터,(중략) 그것이 우리입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생존과 존엄의 뚜껑이.”

■ 일본 고용불안 시대의 키워드

고용불안 시대의 일본사회를 나타내는 키워드들이 있다. 이 중 일부는 한국에서도 이미 통용되고 있다.

◇ 자기책임론 = 일본 사회의 불안정 노동과 빈곤현상을 당사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견해. ‘자기시간을 갖기 위해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직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요지로 버블붕괴 이후 변화된 노동현실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4년 5명의 일본인이 현지에서 납치된 사건을 두고 고이즈미 총리가 인질이 된 것은 ‘자기책임’이라는 논리를 제기하며 논란을 빚기도 했다.

◇ 프레카리아트 = 불안정한(precarioust)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로 일자리가 불안정한 노동자를 뜻한다. 유럽 좌파들이 쓰기 시작했으나 일본어로 넘어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 지역유니온 = 개인이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으로 기존의 노동조합과 구별하기 위해 ‘유니온’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프리터,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개인자격으로 가입하거나 업종별 노조를 만들면서 노동계에 새 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

◇ 해맞이 파견촌 사건 = 반빈곤운동 단체와 지역노조 등이 2008년 12월31일부터 2009년 1월5일까지 도쿄 도심인 히비야공원에 해고된 파견노동자의 피난처를 만들어 숙식을 제공하고 취업상담과 생활보호 신청 등을 진행한 사건. 보통 뉴스가 없는 연말연시에 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불안정 노동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특별취재팀 = 서의동·권재현·김지환(경제부), 전병역(정치부) 기자

공식 블로그(employ-refugee.khan.kr)에 여러분의 의견과 제보를 기다립니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