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슈퍼의 반전…여기는 ‘그로서리 스토어’ 입니다

김지윤 기자
해산물 전문 그로서리 ‘생선씨’ (@fishmonger_ichon)

해산물 전문 그로서리 ‘생선씨’ (@fishmonger_ichon)

정체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라고는 생선 꾸러미를 표현한 로고가 전부다. 매장에 들어서니 고등어, 삼치 등 구이용 생선을 비롯해 도미, 광어 등의 숙성회와 일본식 초밥 김밥 후토마키, 초밥, 밀키트, 해산물에 어울리는 와인과 치즈 등이 보인다. 원한다면 생선을 구워준다는 문구도 인상적이다.

언뜻 보기엔 동네 생선가게 같지만, 외관은 백화점 식품관을 연상케 한다. 특유의 비릿함도 없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해산물은 남해 바다에서 어획한 즉시 선상에서 진공포장돼 매일 새벽 고속버스 편으로 올라온 것들이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해산물 전문 그로서리 ‘생선씨’의 풍경이다.

‘그로서리 스토어(grocery store)’는 최근 쇼핑 트렌드를 언급할 때 부쩍 인용되는 단어다. 서양에서는 농수산물 등 식료품과 공산품, 생활잡화 등을 파는 소매점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슈퍼마켓 정도 되겠다. 동네 고유의 정서를 품고 있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재료를 구입해 요리하고 불필요한 물건을 쟁여두지 않는 서양인들에게 그로서리 스토어는 지척에서 소량의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일상의 공간에 가깝다.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에서 판매하는 물건들 (@simmonskorea)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에서 판매하는 물건들 (@simmonskorea)

그러나 국내에 자리 잡은 그로서리 스토어는 외국 여행 중 봤던 ‘원조’ 그로서리 스토어나 대형마트, 편의점 등에 밀려 사라진 우리의 동네 슈퍼와는 다른 모양새다. 테트리스처럼 쌓아두고 물건을 판매하는 만물상보다는 편집숍과 카페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강하다. 장르와 콘셉트도 분명하다. 정겨움보다는 세련됨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필수품보다는 희소성이 있는 제품들을 주력 상품을 내세운다. 일부 매장은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굿즈로 정체성을 증명하고 오픈 배경, 제품에 얽힌 사연 등 스토리텔링을 더해 공간 기반의 콘텐츠를 완성하기도 한다.

■ 재미·취향 반영한 놀이터

먼데이 모닝 마켓 내부 전경 (@monday.morning.market)

먼데이 모닝 마켓 내부 전경 (@monday.morning.market)

서울 효창공원 근처에 자리한 그로서리 스토어 ‘먼데이 모닝 마켓’은 별도의 간판이 없다. 셰프, 공간 디자이너, 빈티지 컬렉터로 일하는 네 명의 친구들이 합심해 완성한 이곳은 스스로를 ‘재미있는 재료들로 가득 찬 공간’이라 소개한다.

레스토랑을 겸하는 매장에는 귤 피클과 에그(계란) 피클, 네덜란드의 전통 마요네즈와 통조림 등이 아기자기하게 전시돼 있다. 요리에 사용하지 않아도 주방 한쪽에 두고 싶은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식료품, 독특한 선물 리스트에 올리면 좋을 법한 제품들도 가득하다.

시즌별로 주제를 선정해 여는 팝업스토어는 이들의 자랑이다. 가상의 호텔을 모티브로 한 이국적인 브런치 카페, 모든 식사를 케이크 형태로 제공하는 파티 콘셉트의 와인바가 이들의 작품이다.

런던 여행 중 골목길에서 마주했음직한 ‘먼치스 앤 구디스’는 서울 성수동의 ‘핫플’이다. 주전부리를 의미하는 ‘먼치스’라는 이름처럼 산책길에 들러 가볍게 빵과 시리얼 등을 사야 할 것만 같은 첫인상이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하루 두 번 빵을 구워낸다고 한다. 요리에 필요한 재료와 그 요리에 페어링하기 좋은 와인, 치즈 등을 판매한다. 신기하고 매력적인 아이템들이 많다. 형형색색의 학용품부터 독특한 청소용품, 목욕용품, 식기류 등도 준비돼 있다.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 내부 전경 (@simmonskorea)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 내부 전경 (@simmonskorea)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는 소셜미디어 인증을 즐기는 이들 사이 필수 관문이다. 지난 2월 청담동에 문을 연 이곳은 침대 기업 시몬스가 브랜드의 인지도와 호감도를 높이고자 마케팅 차원에서 운영하는 매장이다.

3층 단독주택을 리모델링한 팝업스토어의 1층은 샤퀴테리숍(유럽의 육가공품 전문점) 테마로 꾸며져 삼겹살처럼 생긴 수세미, 우유 상자에 포장된 쌀, 정육점 스타일의 앞치마 등을 판매한다. 2층에는 부산 수제버거 브랜드 ‘버거샵’이 입점해 있고, 3층에는 시몬스의 디지털 아트를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 마련돼 있다.

‘침대 없는 침대 브랜드의 팝업스토어’라는 엉뚱함과 유쾌한 아이디어가 반영된 굿즈 덕에 이른 시간부터 줄이 이어지는 ‘오픈런’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 럭셔리 식품관→로컬 매장

‘딘앤델루카’ 내부.  신세계백화점 제공

‘딘앤델루카’ 내부. 신세계백화점 제공

국내 그로서리 스토어 붐은 백화점에서 시작됐다. 신세계백화점은 2011년 프리미엄 식품점인 ‘딘앤델루카’를 오픈했다. 뉴욕의 작은 그로서리 스토어에서 시작한 식료품 가게인 딘앤델루카는 이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등의 배경으로 등장하며 뉴요커의 삶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백화점 측은 ‘프리미엄 푸드 부티크’를 콘셉트로 매장을 꾸몄다. 리테일 숍, 프리페어드 푸드, 베이커리, 에스프레소 바 등 총 4개의 코너에서 고급 식재료, 차별화된 조리 식품, 특화된 패키지 푸드 등이 판매됐다.

현대백화점은 2015년 판교점을 오픈하며 이탈리아 프리미엄 그로서리 스토어 브랜드 ‘이탈리’를 입점시켰다. 국내에서는 찾기 힘든 파스타 생면, 고급 올리브오일 등을 주력 상품으로 내세웠다. 각별히 식품관에 힘을 주며 갑각류 전문 매장과 연어 델리 매장 등 ‘뉴 그로서리 편집숍’을 선보이기도 했다.

보마켓 내부 전경. 보마켓 제공

보마켓 내부 전경. 보마켓 제공

보마켓 내부 전경. 보마켓 제공

보마켓 내부 전경. 보마켓 제공

고급 매장의 대명사였던 그로서리 스토어가 동네로 터를 옮기고, 지금의 콘셉트형 매장으로 변모한 데에는 2014년 오픈한 ‘보마켓’의 영향이 크다. 남산맨션 1층에서 출발한 보마켓은 배송 서비스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 상권이 멀어 불편함을 겪던 지역 주민들이 수월하게 생활용품을 쇼핑할 수 있도록 기획된 ‘생활 밀착형 동네 플랫폼’이었다. 동시에 지역 주민이던 유보라 대표의 ‘생존’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의 필요와 안목에 따라 생수, 참치 등 기본적인 생필품부터 남대문 수입상가 못지않은 해외 브랜드의 제품들이 이곳을 채웠다. 샌드위치, 라면 등으로 가볍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시중 가격보다 비쌌지만 물건 하나도 허투루 놓지 않은 감각적인 진열에 금세 입소문이 났고 경리단점, 서울역점, 서울숲점, 신촌점 등을 연달아 오픈하며 복합문화공간으로 성장했다.

동네 특성에 따라 보마켓은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나들이와 문화생활의 연장선이 되기도 한다. 유 대표는 “미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본질적 기능에 충실한 제품들을 선호한다. 동네를 기반으로 한 만큼 지역과 함께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이국적 공간 vs 지역 농산물

알리멘따리 꼰데 (@alimentari_conte_)

알리멘따리 꼰데 (@alimentari_conte_)

때때로 그로서리 스토어는 팬데믹으로 발이 묶인 여행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레몬과 허브가 자라는 토분,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부암동의 ‘알리멘따리 꼰떼’는 이탈리아의 작은 식료품 상점을 연상케 한다. 이탈리아어로 ‘알리멘따리’는 식료품점, ‘꼰떼’는 당신과 함께라는 뜻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박만영 대표는 10년간 이탈리아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때 그 맛”을 위해 그로서리 스토어를 차렸다.

알리멘따리 꼰데(@alimentari_conte_)

알리멘따리 꼰데(@alimentari_conte_)

각종 치즈와 오일, 파스타 면 등 직접 맛보고 즐겨 썼던 현지의 제품들도 소개하는데, 이탈리아 전통 보테가(공방)에서 판매하는 재료들을 공수해 그곳의 감성을 전한다. 유학 시절 거주했던 토스카나 시에나에서 경험한 맛을 바탕으로 직접 만든 반찬, 안주류도 판매한다. 특히 이탈리아식 ‘집밥’을 위한 재료들이 인기다.

퍼블릭 마켓 (@public_market__)

퍼블릭 마켓 (@public_market__)

퍼블릭 마켓(@public_market__)

퍼블릭 마켓(@public_market__)

반대로 한때 유행어처럼 번진 ‘신토불이’를 떠올리게 하는 그로서리 스토어도 있다. 대전을 기반으로 한 ‘퍼블릭 마켓’이다. 최민아·최민영 대표는 유럽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매장을 열었다. 충청 지역 농장에 대한 사전 조사와 발품으로 얻은 유기농·무농약 농·특산품 등이 무기다. 잠봉 샌드위치, 대파 감자 수프, 그릭 요거트, 그래놀라 등을 대표 상품으로 하며, 함께 운영 중인 로컬 레스토랑 ‘비스트로 퍼블릭’을 통해 지역 재료를 활용한 개성 있는 메뉴 또한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대전 본점 외에도 탄방점, 광주점, 시몬스 테라스점까지 총 4개 지점이 영업 중이다. 특히 경기 이천에도 둥지를 튼 시몬스 테라스점에서는 서산 마늘, 가평 잣 등 지역 특산품을 활용한 바질 페스토가 인기다. 연일 매진을 기록한 예산 멜론, 공주산 밤의 껍질을 먹이고 자연 방사해 키운 닭의 무항생제 유정란 등도 만나볼 수 있다.

■ 인증 위주 콘셉트에 아쉬움도

다만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그로서리 스토어에 대해 일각에서는 “콘셉트만 남았다”는 비판이 일기도 한다. 평소 ‘핫플’ 방문을 즐기는 직장인 김성영씨는 “온라인에 소개된 곳들을 다녀왔는데 이른바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들이 많았다”며 “사진을 찍기에는 좋았지만 판매하는 굿즈들의 퀄리티는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학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며 유명 그로서리 스토어를 방문한 조효주씨 역시 “기대와 호기심으로 시간을 내서 방문했는데 20여개의 상품들이 전부라 실망스러웠다. 마케팅에 농락당한 기분”이라고 전했다.

비싼 가격과 위생 문제를 꼬집는 이들도 있다. 강남의 한 그로서리 스토어에서 만난 이명주씨는 “온라인이나 대형마트에서 파는 제품을 15% 정도 비싸게 판매하는 것을 보고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쇼핑보다는 분위기를 사러 오는 곳 같다”고 말했다. 또한 그로서리와 레스토랑의 합성어인 ‘그로서란트’ 형식으로 운영되는 한 매장을 찾은 권수진씨는 “밀집된 공간에 덮개도 없이 빵을 판매하며 ‘수제’를 강조하는 상황과 불편한 테이블과 의자를 갖춰두고 식사를 권유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했다”고 전했다.

■ 칼 배송보다 가치 소비

웬만한 제품은 이른 새벽 집 앞까지 배송되는 시대, 그 틈을 비집고 그로서리 스토어가 꾸준히 성장하는 힘은 무엇일까.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이국적인 분위기에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읽을 수 있고 장바구니를 호사스럽게 만들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MZ세대의 힘이 컸다.

흠마켓(@hmm.market)

흠마켓(@hmm.market)

서울 해방촌 골목 한편에 자리한 ‘흠마켓’에서 만난 박유정씨는 1인 가구다. 박씨는 “필요 이상으로 구매해야 하는 대형마트와 달리 모든 과일과 채소들을 1개씩 구매할 수 있어서 유용하다”며 “특히 카레, 라타투이 등 매장에서 공유되는 레시피에 따라 요리만 하면 되는 재료 세트를 애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판매가 어렵거나 상품 가치가 떨어져 외면받는 일명 ‘못난이’ 농산물을 다루는 푸드 리퍼브 마켓이라는 점도 박씨가 이곳을 찾는 까닭이다. 간혹 운이 좋으면 ‘프리(free)’ 바구니에서도 무료 상품을 챙길 수 있다.

보틀 앤 스쿱(@bottleandscoop)

보틀 앤 스쿱(@bottleandscoop)

지난 1월에는 제로 웨이스트를 표방하는 그로서리 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서울 지하철 이대역 인근에 위치한 ‘보틀 앤 스쿱’은 냉장·냉동 제품을 제외하고는 모든 제품을 소분 형태로 판매한다.

소비자들은 투명한 보관 박스에 담긴 벌크형 식료품들을 준비해간 용기에 필요한 만큼 담아 무게를 재고 계산하면 된다. 잡곡, 건나물, 두부 과자 등 다양한 유기농 먹거리들이 준비됐고, 커피와 콤부차 역시 원하는 만큼 덜어서 맛볼 수 있다. 자주 쓰지 않아 유통기한이 지나면 버리기 일쑤인 허브 바질, 월계수 잎 등도 소량 구입할 수 있다.

보틀 앤 스쿱(@bottleandscoop)

보틀 앤 스쿱(@bottleandscoop)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김미현씨는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는 매장들이 늘었지만 주로 생활용품에 국한되고, 정작 사용 빈도가 높은 식재료를 판매하는 곳은 없어 아쉬웠다”며 “이곳에서 쇼핑 후 집에 도착해 장바구니를 열었을 때 버려야 하는 쓰레기가 거의 없어 뿌듯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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