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 꺾은 다윗, 최봉태 변호사는 어떻게 김앤장을 이겼나

유정인 기자

12년의 결실 ‘강제징용 배상 판결’

12년에 걸친 법정 다툼이었다. 38세의 한창 나이에 소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던 변호사는 지천명(知天命)이 돼서야 승소 판결문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에게 소송을 맡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그사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일제 강제징용자에 대한 미쓰비시중공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지난 24일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 판결 뒤에는 법무법인 삼일의 최봉태 대표변호사(50)가 있었다. 그는 2000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6명이 부산지법에 제기한 소송을 이끌었다.

최 변호사는 국내 유명 로펌 소속이 아니다. ‘전관 출신’도 아니다. 그에 맞서 일본 재벌인 미쓰비시중공업은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을 앞세웠다. 김앤장은 ‘일본통’인 김용갑 변호사 외에도 1명의 변호사를 더 투입했다. 중량감으로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최봉태 변호사가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던 2005년 2월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최봉태 변호사가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던 2005년 2월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앤장은 국내기업이 해외 다국적기업과 소송을 벌일 때 주로 외국기업의 변론을 맡았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당시 법률자문을 해준 곳도 김앤장이다. 김앤장은 소버린이 SK와 경영권 분쟁을 통해 1조원을 벌어갈 당시에도 법률자문을 해줬다.

한국의 사법주권과 외교분쟁이 걸린 이번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김앤장은 일본 편에 섰다.

김앤장은 특유의 법률 논리를 앞세워 소송을 이끌었다. 일본에서 패소 판결이 확정된 데다 손해배상을 위한 시효도 끝났다며 일본기업이 배상해줄 책임이 없다는 논리다. 초반 소송은 예상대로 흘렀다. 최 변호사는 2006년 1심에 이어 2009년 2심에도 내리 패소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최 변호사는 “일본 법원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한다 해도 한국 법원이 받아들여야 하느냐”며 한국의 사법주권을 문제삼았다. 또 한일청구권협정은 정부 간의 협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된 게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대법원은 “한국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일본 판결의 효력은 인정할 수 없다”며 최 변호사의 손을 들어줬다. 12년간의 지루한 소송에서 최 변호사가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것이다.

최 변호사는 1994~1997년 일본 도쿄대로 유학을 가면서 일제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그곳 변호사들이 오히려 군위안부 배상청구 소송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귀국 후 이 문제를 파고들던 도중 일본 법원 1심에서 패소한 일본 변호사가 ‘일본 법원을 못 믿겠다’며 사건을 의뢰해 소송을 맡게 됐다.

최 변호사는 소송에 이겨 보람도 느끼지만 안타까움이 크다고 했다. 그에게 소송을 의뢰한 강제징용 피해자 중 마지막 생존자인 정창희씨가 지난 3월3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12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국 사회의 무관심이었다. 오죽했으면 피해자들이 국적포기 운동까지 했겠는가”라며 “이제부터라도 사회적 관심이 모아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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