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로 가는 길, 기울어진 법정

(2)대법, 기업 담합 봐주기…시장경제를 죽이고 있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이해 못할 대법 ‘담합 결론’

대법, ‘야쿠르트 주력은 왕라면 아닌 왕뚜껑’ 담합 면죄부

서울 지역 대형마트의 컵라면 진열장(왼쪽)과 주류 코너. 지난 5년간 대법원은 라면·음료·소주 업체 가격 담합에 잇따라 면죄부를 줬다. 라면은 일부 회사의 주력 상품이 컵라면(용기면)이라는 이유였고, 소주는 국세청이 주세를 걷기 위해 소주시장에 개입하고 있다는 논리를 댔다. 하급심에서는 모두 담합으로 인정한 사건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지역 대형마트의 컵라면 진열장(왼쪽)과 주류 코너. 지난 5년간 대법원은 라면·음료·소주 업체 가격 담합에 잇따라 면죄부를 줬다. 라면은 일부 회사의 주력 상품이 컵라면(용기면)이라는 이유였고, 소주는 국세청이 주세를 걷기 위해 소주시장에 개입하고 있다는 논리를 댔다. 하급심에서는 모두 담합으로 인정한 사건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한민국에는 담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려는 것일까. 최근 5년 사이 대법원이 라면, 음료, 소주 업체 담합을 잇따라 취소하고 있다. 서울고법이 모두 담합으로 인정한 사건이다. 취소 판결을 받아낸 기업의 대리인 명단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대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들이 있다. 법조계는 “이렇게 확실한 사안을 담합이 아니라고 하면 앞으로 아무것도 규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이 대표적인 경성담합(하드코어 카르텔)인 가격담합에까지 면죄부를 주는 사이,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인공지능(AI)의 가격 조정도 규제 대상에 포함시켰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기술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도 이를 기획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봐주기가 기업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기업들은 똑같은 행태를 벌이다가 외국에서 벌금을 내고 있다. 미국 법무부(DOJ)가 2012년 부과한 카르텔 벌금 부과 통계를 보면 상위 10대 기업 가운데 한국 기업이 3곳(LG디스플레이 4위, 대한항공 6위, 삼성전자 8위)이다. 1000만달러 이상 벌금 사건 가운데 한국 기업의 비중이 23%에 이른다.

담합에 관해서는 검찰의 독자적인 수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금은 공정거래위원회 고발이 없으면 검찰이 수사하지 못한다. 공정위에 이런 권한을 준 이유는 기업을 과잉 처벌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갑질이라 불리는 불공정거래 같은 정도는 모르겠지만 담합은 검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하게 해주는 게 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40년 판결에서 담합이 “경제의 중추신경에 대한 실제적, 잠재적 위협”이라고 했다. EU 경쟁담당 집행위원 출신인 마리오 몬티 전 이탈리아 총리도 “시장경제의 암(cancers on the open market economy)”이라고 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무시하고 대기업 담합을 용인하는 대법원 판결이 한국의 시장경제를 죽이고 있다.

2001년 322원, 2002년 349원, 2003년 367원, 2004년 401원…. 라면 업체들은 2001년부터 1년마다 원단위까지 맞춰 라면 가격을 올렸다. 이런 일은 2007년까지 계속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눈여겨본다는 소문이 돌자 삼양이 담합 사실을 자진 신고했다. 담합 사실을 처음으로 자진 신고하면 과징금 100%가 면제되고, 두 번째로 신고하면 50%가 면제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리니언시(Leniency)’이다. 공정위가 조사해보니 라면 4사인 농심, 삼양, 오뚜기, 야쿠르트는 오랫동안 가격정보를 주고받으며 소비자를 속이고 시장을 통제해왔다.

공정위 조사 결과는 상세했다. “2000년 12월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열린 대표자 회의에서 가격 인상 필요성에 의견을 교환하고, 농심이 가격을 올리면 다른 회사들이 따르기로 했다. 2001년 3월 서울 이태원 캐피탈호텔에서 열린 라면거래질서 정상화협의회 정기총회에서 만나 가격 인상률을 협의했다.” 물증도 여럿 나왔다. “가령 2001년 5월14일 오뚜기 제품기획실이 작성한 ‘라면류 가격 인상 검토’에는 농심이 신라면 출고가격을 322원 올릴 것이라 적혀 있고, 이 무렵 5월24일 삼양은 야쿠르트에 가격 인상 예정과 내용을 팩스로 보냈다.”

■ ‘왕뚜껑’ 아닌 ‘왕라면’이라서

공정위는 2012년 농심에 1080억원 등 4개사에 과징금 1362억원을 부과했다. 삼양은 과징금 120억원을 면제받았다. 이듬해 서울고법 행정2부(재판장 이강원 부장판사)는 라면 4사의 담합을 확인했다. 재판부는 “삼양 직원들이 이른바 (1989년) 우지파동 이후 관계가 악화된 농심을 모해하려 허위로 진술했을 가능성은 낮다”며 “자체적인 시장조사를 통해 입수한 정보만으로 경쟁사의 가격정보에 관해 정확하고 정밀한 자료를 작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가격정보 교환에 기하여 가격이 일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2015년 대법원이 담합이 아니라고 결론을 뒤집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정보 교환행위 자체가 곧바로 가격을 결정·유지하는 행위에 관한 합의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히 야쿠르트의 주력상품은 왕라면이 아니라 왕뚜껑이므로 주력상품 출고가를 맞춘다는 합의는 없던 것”이라고 했다. 4개사는 주력 봉지면 값을 올렸는데 농심 신라면, 삼양 삼양라면, 오뚜기 진라면, 야쿠르트 왕라면이다. 왕뚜껑은 용기면이다. 이 판결 후 조성국 중앙대 로스쿨 교수는 학회에 나가 “기업들이 이제는 자유롭게 (담합)해도 좋다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려되고, 반면 공정위는 이런 증거로도 (담합을 인정받기) 힘들다면서 조사를 포기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 두유는 식사대용이므로

2009년 공정위 팩스로 담합 제보가 들어왔다. 음료회사들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비율로 가격을 올린 사실을 정리한 표였다. 공정위는 조사를 벌여 담합 혐의를 확인했다. 음료회사들은 임원들이 먼저 만나 가격 인상을 협의하고, 실무진이 인상안을 주고받는 방식을 썼다. ‘롯데, 해태 가격비교(08.9月).xls’와 같은 엑셀파일에 서로의 정보를 정리해 돌렸다. 공정위는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을 부과했다. 롯데칠성 226억여원, 해태 22억여원, 웅진 14억여원이다. 코카콜라와 동아오츠카는 자진 신고해 과징금이 면제됐다.

음료회사들이 소송을 제기하자 공정위는 증거들을 공개했다. “2008년 12월18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 음식점 기요미즈에서 음료회사 사장들이 가격 인상 필요와 시기를 논의했다. 김○○ 해태 사장과 유○○ 웅진 사장은, 정○ 롯데 사장에게 ‘하위사도 가격을 인상하도록 1위사인 롯데가 먼저 인상해야 한다’고 했다. 해태 김 사장은 모임이 끝나고 승용차를 기다리던 롯데 정 사장에게 ‘꼭 가격 인상을 해야 한다’고 다시 말했다.” 이에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곽종훈 부장판사)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담합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2013년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결론을 뒤집었다. 이유는 담합시장이려면 콜라시장처럼 구체적이어야지 음료시장처럼 넓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원심이 동일한 관련 상품 시장에 속한다고 본 음료 상품들을 보면, 먹는 샘물부터 두유류, 기능성음료, 스포츠음료, 차류를 비롯해 탄산음료, 과실음료, 커피까지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앞서 서울고법은 “음료 제품들은 과실음료, 탄산음료, 기타음료를 불문하고 서로 어느 정도 대체성을 가진다”고 했다. 아무튼 사건은 서울고법으로 다시 돌아갔다.

새로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행정6부(재판장 이동원 부장판사)는 과실음료 시장이나 탄산음료 시장은 가능하지만 기타음료 시장은 안된다고 했다. 즉 사과주스와 감귤주스는 같지만 이온음료와 녹차, 두유는 다르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모든 과실음료에 대해 “과일·채소를 주원료로 해 주로 인체에 수분 또는 비타민 등을 공급한다”고 동일성을 줬고, 기타음료에 대해선 “커피는 특유의 향과 맛, 각성효과 및 기분전환을 위해, 스포츠음료는 갈증 해소 및 수분 공급을 위해, 차류는 건강에 좋고 갈증 해소와 물 대신 음용이 편해, 두유는 건강 또는 식사대용을 위해 마신다”고 이질성을 밝혔다. 음료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공정위가 재상고했지만 2017년 대법원은 기각했다. 이 판결은 과연 사과주스를 식사대용으로 마실 수는 없는지 의문을 남겼다.

■ 소주시장은 국세청이 통제하므로

11개 소주회사들이 2007년 5월과 2008년 12월 담합을 바탕으로 소주값을 올렸다고 2009년 공정위가 발표했다. 소주회사 대표들 모임인 천우회 논의사항, 무학의 마케팅 보고서, 한라산과 금복주 임원의 업무수첩 등이 근거였다. 소주 출고가격이 모두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지역별로 경쟁관계인 소주회사들끼리는 인상률이나 출고가가 거의 같았다. 공정위가 확보한 소주회사 임원들 업무수첩에는 경쟁관계가 아닌 소주회사의 인상안까지 적혀 있어 이들의 담합을 사실상 증명했다. 시정명령과 함께 부과된 과징금은 진로 156억여원을 비롯해 11개 회사에 253억여원이었다.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곽종훈 부장판사)는 2011년 소주회사들의 담합 사실을 인정했다. 이 재판에서 소주회사들은 “사실상 국세청이 출고가 인상 여부와 가격을 통제하고 있어 담합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국세청이 가격 인상이나 인하를 먼저 요청한 것이 아니라 (1위 업체) 진로만이 인상 시기와 정도를 정해 요구하면 국세청이 여러 측면을 고려해 수용 범위 등을 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와 관련, 법조계 관계자는 “더구나 법령에 근거가 없는 행정지도는 면책 사유가 아니라는 것이 확립된 판례”라며 “화물연대가 정부의 행정지도에 따라 운임을 올렸다가 담합으로 처벌된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14년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담합이 아니라고 했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서울고법의 오류를 밝히지도 못하면서 담합한 사실이 없다고만 했다. 상고심은 법률관계만 따지고 사실관계는 하급심이 정한다는 소송법 원칙을 무색하게 했다. 대법원은 국세청을 애매하게 넣어 언급하다가 결국은 담합 증거가 없다고 했다. “사장단 모임에서 가격 인상에 관해 논의한 사실이 있고 인상률이나 시기가 유사해 합의가 있던 것처럼 보이는 외형이 존재한다. 하지만 국세청이 진로를 통해 출고가격을 실질적으로 통제·관리하는 소주시장 특성과 시장 상황에 따라 원고들이 대처한 정도에 불과하므로 담합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새로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행정2부(재판장 이강원 부장판사)는 대법원 판결문을 복사해 붙였다. 그 외 별다른 내용이 없어 당초 A4용지 29장에 이르던 판결문은 사실관계를 정리한 정도인 11장으로 줄었다. “공정위가 1·2차 가격 인상에 관한 합의 증거라고 제출한 자료들을 살펴보아도 소주회사들 사이에 출고가격의 인상 여부, 인상률, 인상 시기 등에 관해 합의하였음을 추단할 만한 내용을 발견하기 어렵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런 걸 담합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더 이상 담합으로 인정할 사건이 없다. 사건을 깨서 돌려보내면서도 이유를 적지 않은 것이 가장 문제”라고 했다. 이 사건이 파기되자 대리인들까지 놀랐다는 얘기가 판사들에게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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