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장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단어 뉘앙스 따져묻는 그들

이혜리 기자

재판 1년…법관 증인들

양승태 재판에 선 조한창 판사“
‘각하’ 아닌 ‘각하 등’이라 했다
‘신속한 종결’ 아닌 ‘추정 사유’다”
민감하게 의존명사까지도 걸러내

강제징용 판결 증인 홍승면 판사
관련 보고서만 보게 된 것 “우연”
관련 e메일만 지워진 것도 “우연”

증인 260명 대부분 전·현직 법관
쟁점거리 찾아내 자기항변 활용
공방만 치열…진실 발견은 더뎌

사법농단 재판정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14일로 검찰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기소한 지 1년이다. 임 전 차장 재판은 기피신청으로 5개월 넘게 정지돼 있다. 진행 중인 공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은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다. 법정에 불러 신문해야 할 증인 260여명 중 13일까지 완료된 증인은 28명이다.

‘법원행정처 문건’으로 시작된 재판 거래·개입 의혹에 대한 유무죄는 문건만으로 판정되지 않는다. 사법농단 재판은 문건 뒤로 숨은 배경과 의도를 찾아내는 작업의 연속이다. 지루해 보이는 이 재판의 신문 과정은 치열하고 숨 가쁘게 진행된다. 공방도 벌어진다. 증인 대부분이 전·현직 법관이기 때문이다. 재판 절차·법리에 해박한 이 ‘법관 증인’들은 스스로 사건 쟁점이 무엇인지 판단한다.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법률 언어로 풀어낸다. 이들에게서 긴장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법대에서 증인석으로 내려왔을 뿐 이들에게 법정은 익숙하고 친밀한 공간이다.

법관 증인들은 때로는 검사에게 직접 따진다. 진술조서와 공소장이 잘못됐다고 열을 올리고, 조사 과정에서 받은 위축된 느낌을 토로한다. 단어 뉘앙스까지 꼼꼼히 걸러내 증언한다. 시민단체에서 탄핵 대상으로 지목당하고, 징계 절차에 회부된 법관들에게 증언은 자기 항변의 기회이기도 하다.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속에서 진실 발견과 책임 추궁은 더디다.

■ 법관 증인들의 ‘깨알 항변’

“제가 아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적혀 있어서, 내가 말하지 않은 게 공소장이 된 것이 솔직히 기분 나빴습니다. 저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내용 아닙니까.” 지난 6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조한창 판사(54)가 격앙된 톤으로 말했다.

조 판사는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이던 2015년 통합진보당 사건을 심리하던 행정13부 재판장 반정우 판사에게 법원행정처 입장을 전달했다고 공소장에 나온다.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조 판사에게 판결 방향을 검토한 법원행정처 문건을 줬다. ‘각하는 부적절’이라고 적힌 문건이다. 문제는 문건을 받은 뒤 조 판사가 반 판사에게 전한 내용이었다. “○○에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신중하게 검토해달라”고 말한 사실엔 다툼이 없다. 그런데 조 판사는 ○○에 들어갈 단어가 ‘각하’가 아니라 ‘각하 등’이라고 했다.

“(검찰 조사에서 말한 것은) 전체적으로 ‘각하 등’이라는 취지였습니다. 검사님이 같은 것 아니냐고 하셨고 저도 오래 이야기할 사안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인용과 기각을 포괄해 신중히 검토하라는 취지의 말이었다는 것이다. 조 판사는 재판 개입을 가담·방조했다는 비판을 받아 시민단체의 법관 탄핵 명단에 포함됐다. 시효가 지나 징계 대상엔 오르지 않았지만 조 판사로서는 법정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그는 민감하게 의존명사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따졌다.

조 판사는 임 전 차장으로부터 서기호 전 의원 사건 관련 연락을 받고 행정2부 재판장 박연욱 판사에게 전달했다는 공소장 부분에서는 ‘신속한 종결’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았다. 조 판사는 검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이 검사님이 저를 조사하셨는데, 제가 그때 ‘종결’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공소장에는 제가 (사건을) 종료시켰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죠? 제대로 된 것인지 의문입니다.”

임 전 차장이 서 전 의원 사건은 왜 추정(기일을 추후에 지정하기로 함)돼 있는지 사유를 물어 박 판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법원행정처에서 사건이 왜 추정돼 있는지 궁금해한다. 특별한 게 있느냐’고 했다는 게 조 판사 설명이다. 임 전 차장은 추정 사유였던 대법원의 재항고 사건이 기각으로 끝나자 다시 조 판사에게 연락했다. 조 판사는 “추정 사유가 없어졌으니까 사건을 묻어두지 말고 진행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이라면서도 “‘빨리’ 진행하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국회의원이 당사자이고, 장기 미제 사건이라 임 전 차장이 관심을 갖는다고만 생각했다고 했다.

‘각하’가 아닌 ‘각하 등’이라고 말했다면, ‘신속한 종결’이 아닌 ‘추정 사유’를 물었다면 부당한 재판 개입이 아닌가. 조 판사는 이규진 전 위원이 준 문건 내용이 부적절해 흔쾌히 재판부에 줄 수 없었다고 했다. “문건을 받은 것 자체가 찜찜했다. 재판을 30년 가까이 했지만 (그런 문건을) 남에게 줘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생소한 경험이다”라는 게 조 판사 말이다.

문건 취지를 재판부에 전달할 의지가 있었다는 점은 조 판사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전달한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회식 자리가 있길래 ‘아, 마침 그럼 잘됐다, 그때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조 판사는 인용·기각이 아니라 ‘각하’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다고 했다.

박 판사에게 단순히 추정 사유를 물었다면서도, 본인은 임 전 차장에게 질책받는 느낌이었다고도 했다. 조 판사는 ‘신속한 종결’을 말하지 않았다지만, 박 판사는 ‘사건을 종결하라는 법원행정처 뜻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고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박 판사가 조 판사 연락을 받은 직후 기일을 잡았고, 재판에 들어가면서 배석판사에게 ‘원고 측에서 뭘 더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했다는 점을 검찰은 재판 개입 증거로 댄다.

■ 우연과 우연의 일치

지난 9월25일과 이달 1일 이틀에 걸쳐 증인으로 나온 홍승면 판사(55) 신문에서는 유독 ‘우연’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홍 판사는 2015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일 때 2012년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판결을 보고서에 인용한 이종엽 판사에게 ‘그 판결은 파기환송될 가능성이 있으니 인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게 우연이라고 했다. 이 판사가 속한 헌법행정조의 보고서는 수석재판연구관이 거의 안 본다면서도, 이 판사가 올린 보고서가 우연히 눈에 띄어 봤다는 것이다.검찰은 홍 판사가 재판 개입 상황을 알았다고 의심한다.

“강제징용 판결을 인용한 보고서만 이 판사가 보낸 그날 확인하고, 이것을 인용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이인복 대법관에게 그다음 날 재보고를 하게 했다는 것인데, 우연인가요?”(호승진 검사)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평소에는 그냥 보고서를 넘기지만 그날 그 보고서가 눈에 띄어가지고 (이 판사에게) 연락했을 것입니다. (…) 다 파기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용을 피하라는 것은 당연한 지시입니다.”(홍 판사)

검찰은 홍 판사의 e메일 압수수색 과정에서 중요한 1개의 e메일을 찾지 못했다. 검찰은 홍 판사의 e메일 1487개 중 강제징용 사건과 관련된 14개만 추출했는데 여기에 ‘김용덕 대법관 말씀 자료 정리’라는 제목의 e메일이 포함되지 않았다. 강제징용 사건의 주심인 김 대법관이 재판연구관이던 황진구 판사에게 검토를 지시하는 내용이다. 홍 판사는 이것도 우연이라고 했다. “제가 그 e메일을 삭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메일을 스크롤하면서 하나를 빠트린 것 같습니다.”

증언은 진화한다. 홍 판사는 지난 9월25일 증언에선 임종헌 전 차장에게 강제징용 사건 이야기를 듣고 황 판사에게 ‘박찬익 판사(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심의관)가 이미 검토해놓은 문건이 있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이달 1일 증언 때는 ‘박 판사 문건’을 황 판사에게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형사35부 좌배석 이원식 판사가 무엇이 맞느냐고 물었다.

홍 판사의 답변이다. “제가 (황 판사에게) 검토 지시한 사항은 (강제징용 판결 때문에) ICJ(국제사법재판소)에 우리가 끌려가는지 여부였습니다. 그 자료를 받으라고 한 것이고요. 박 판사가 쓴 보고서는 다른 내용입니다. 제가 그것을 받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문건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법원행정처 문건 내용과 박 판사가 실제 작성한 문건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그 문건을 받으라고 지시한 건 아니라는 뜻의 말이다. 홍 판사는 징계 절차에 회부됐지만 무혐의 판단을 받았다.

법관 증인들 중 최희준·문성호·김민수 판사는 법원행정처 문건들의 부적절함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심정을 드러냈다. 최 판사는 지난달 18일 증인으로 나와 말했다. “부조리극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 30년 동안 곪아오던 것이 법원 내부에서 터져서 저에게까지 왔는데, 부끄럽고 죄송하고, 여러 가지로 슬프고 그렇습니다.” 박성준·최누림 판사는 꼿꼿한 자세로 검찰에 맞대응했다. 지난 9월10일 증인으로 나온 박 판사는 검사 질문을 잘라냈다. “(재판 개입이라는 검사 의견에)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 저한테 생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법원은 각기 다른 법관들의 증언에서 사법농단의 실체와 진실을 건져내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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