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손배 판결이 입법 폭거? 대통령실과 여당의 도넘은 ‘사법부 흔들기’

이혜리 기자    김희진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왼쪽)과 윤석열 대통령(오른쪽). 연합뉴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명수 대법원장(왼쪽)과 윤석열 대통령(오른쪽). 연합뉴스,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법원이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노동자마다 개별적으로 따지라는 판결을 내놓자 국민의힘 지도부가 자극적인 단어를 써가며 대법원을 일제히 비난했다. 법조계에서는 국민의힘 주장이 사실과도 맞지 않고 삼권분립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온다. 새 대법관·대법원장 인선을 앞두고 대통령실과 여당의 사법부 흔들기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민의힘 지도부 인사들은 대법원 판결 직후인 지난 16일 “공동불법행위의 기본법리조차 모르는 판결”(김기현 대표), “노란봉투법 알박기 판결”(윤재옥 원내대표), “법을 죽인 정치판결”(박대출 정책위의장), “입법 폭거”(이철규 사무총장) 등 비난을 쏟아냈다. 이들 주장의 요지는 이번 판결이 “수인이 공동의 불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는 연대하여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민법 제760조1항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대법원과 여러 법조인들의 설명이다. 손배 소송에서 불법행위 책임이 인정된 사람들 중 구체적으로 누가, 얼마를 부담할 것인지는 이들 내부에서 결정하는 게 통상적이기는 하다. 다만 대법원은 2008년, 2014년 등에 이미 법원이 공동불법행위자 사이의 책임 비율을 다르게 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적이 있다. 주식회사 이사가 법령을 위반해 회사에 손배 책임을 지는 경우 법령 위반 경위, 이득 유무, 회사의 조직체계 흠결 유무 등 제반사정을 참작해 책임 비율을 법원이 정한 판례가 대표적인 예다.

헌법상 노동3권을 보장하고 손해의 공평·타당한 분담 원칙에 맞도록 노조 파업에도 이 선례를 적용하자는 게 이번 판결의 취지이다. 가급적 노조에 책임을 묻되, 일반 조합원에게 책임을 물을 경우 피해를 주장하는 회사가 엄격히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18일 “이번 판결은 민법 제760조에 반하거나 기존 판례를 바꾼 게 전혀 아니다”라고 했다.

오히려 일각에선 이번 판결의 한계를 지적한다. 여전히 파업을 노조와 조합원들의 공동불법행위로 전제했고 손배 책임의 면책 요건을 두고도 종전과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법에 따른 정당한 쟁의행위여야만 손배 책임을 면할 수 있다거나, 전면적·배타적 점거는 위법하다는 판례는 그대로 유지됐다.

고영남 인제대 법학과 교수는 “대법원은 여전히 노조와 별개의 조합원들을 묶어 파업을 공동불법행위로 보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일반 불법행위보다 입증 책임이 완화된다”며 “비정규직 노조가 공장을 멈추는 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볼 수 있는지가 더 주요한 쟁점인데 대법원은 이 부분은 건너뛰어버린 한계가 있다”고 했다. 서범진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파업이 정당하다는 게 아니라 배상 액수를 다시 보라는 취지로, 여전히 현장의 조합원들을 위축시키는 것”이라며 “합법 파업의 범위를 넓히자는 게 노동계의 오랜 요구였는데 이번 판결은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고 했다.

금속노조 관계자들이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쌍용자동차(현 KG모빌리티)가 금속노조 상대로 제기한 2009년 파업 손배 소송의 대법원 선고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금속노조 관계자들이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쌍용자동차(현 KG모빌리티)가 금속노조 상대로 제기한 2009년 파업 손배 소송의 대법원 선고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여당이 원색적인 용어를 써가며 대법원을 비난한 것을 두고도 비판이 나온다. 정부와 국회는 삼권분립 원칙을 존중해 법원 판결에 대한 강도높은 비난을 자제해왔는데, 최근 들어 이런 관행이 허물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 등 소속 법관을 ‘정치편향’으로 낙인찍고 ‘사법부 정상화’를 주창한다. 대법관·대법원장 인선을 앞두고 사법부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 대통령실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자를 제청하기 전부터 ‘이념 성향’을 이유로 특정 후보 2명이 제청될 경우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고해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을 무력화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를 두고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지난 15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실의 대법관) 임명 거부 예고는 법에 없는 정치행위”라고 했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다음 대법관이 대법원 분위기를 바꿀 수 있고, 노동문제가 민감하기 때문에 (정부·여당이) 강하게 공세하는 것 같다”며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상황이 우려스럽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이번 판결의 배경에 김 대법원장이 있다는 듯 주장하지만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이번 판결을 심리하고 선고한 재판부는 김 대법원장이 포함되지 않은 대법원 3부이다. 3부에는 윤 대통령이 임명한 오석준 대법관이 속해 있고, 소부의 대법관은 판결에 반대할 경우 전원합의체에 회부하자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번 판결은 소부에서 그대로 선고됐다. 조경배 순천향대 법학과 교수는 “법률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사법부 권한”이라며 “(국민의힘의 대법원 비난은) 삼권분립에 대한 도전이고 사법권 독립을 해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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