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해야만 한다’는 건 편견…제대로 이해하려면 눈앞의 어린이를 보아야

김소영

“못된 어린이는 정말 못됐다” 정말 내가 썼단 말인가

어른의 몫

연말을 맞이해서 독서교실의 묵은 자료들을 정리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모아 놓은 자료들이 많았다. 온갖 출판사의 팸플릿, 도서관 프로그램 홍보물, 근처 초등학교의 추천 도서 목록, 언제 다녀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세미나 자료집들은 이제는 낡은 자료라 처분하기로 했지만, 헌책방에서 겨우 구한 절판된 이론서들은 그러기가 어려웠다. 책을 펼치면 그때 공부하던 내 마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이 책들이 새롭게 출간되더라도 밑줄을 긋고 메모해가며 읽은 책을 버릴 수는 없을 거로 생각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어린이들이 두고 간 글과 그림 역시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버릴 수가 없었다. 자기 이름도 고른 크기로 쓰지 못하던 어린이들이 언제 커서 중·고등학생이 되었나 생각하니 세월이 새삼스럽고, 그들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는 것에 뿌듯해졌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전 이것저것 메모한 공책을 넘기다가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밑도 끝도 없이 한 문장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못된 어린이는 정말 못됐다.”

나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 이렇게 날이 선 말을 적었단 말인가. 책에, 신문에 싣는 글마다 어린이에게 친절한 어른이 되자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나인데. 정말 내가 썼단 말인가. 그러다가 그 문장 위에 쓰인 날짜를 보고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독서교실을 연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무엇 때문에, 더 정확하게는 누구로 인해 저 말을 썼는지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 독서교실을 열 때, 수업할 준비는 얼추 되었는데 정작 함께 수업할 ‘어린이’를 구할 방법을 몰라 난감했다. 동네에 별다른 연고도 없고 또 자녀도 없으니 어린이며 부모님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한 동네에 살던 지인이 한두 명 소개해준다고는 했지만, 거기에만 기댈 수는 없어서 전단을 붙이기로 했다. 한글 프로그램으로 어설픈 광고를 만들어 출력해서는 근처 아파트의 관리사무소들을 돌았다. 다행히 광고를 보고 연락을 주신 분들이 계셨다. 소개받은 어린이 몇 명, 광고를 보고 찾아온 어린이 몇 명과 겨우 수업을 시작했다.

독서교실의 묵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한 문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어머니의 “조금 더 해봐야겠죠”를 ‘두고 보겠다’는 뜻으로 들었는데
나중에 어린이가 똑같이 따라 말하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순수한 존재로만 기대했다가 실망감 키운 나를 정당화하며 쓴 것이다

내가 진행하는 수업이 학습지 공부하듯 하는 수업도, ‘논술’ 수업도 아니다 보니 초기에는 부모님들과 조율할 부분이 많았다. 나는 상담도 수업도 서툴렀으니, 일단 좋은 책들을 밑천 삼아 버텨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들 입장은 달랐을 것이다. 수업료를 내가며 초보 선생을 참아줄 필요를 못 느끼실 만도 했다. 지인을 통해 나를 소개받은 분들은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 주시는 편이었지만, 광고를 보고 오신 분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두 달 만에 아이를 그만 보내겠다는 분들도 계셨다.

그때 한 어머니는 내놓고 ‘그만두겠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거의 매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켜봐야 아는 거겠죠. 그래도 땡땡이가 이거 좋아해요. 그러니까 조금 더 해봐야겠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말씀인데, 그때는 “조금 더 해봐야겠죠”가 꼭 ‘두고 볼 테니 잘해라’ 하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초조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옆에 어린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도 너무 신경이 쓰였다.

이런 순간이 몇 번 반복되는 사이, 언제부터인가 어린이의 수업 태도가 달라졌다. 수업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가 많았고, 수업 시간에도 자주 딴청을 부렸다. 활동지에 자꾸 낙서를 하고, 글쓰기를 하다 말고 한참 엎드려 있는가 하면, 내 질문에는 성의 없이 답하곤 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드러내놓고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거리기도 했다.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너무 힘이 들었다. 혹시 어린이가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는 침착하게 물어보았다.

“땡땡아, 수업이 조금 힘들거나 지루하니? 그러면 우리 몇 달 쉬었다가 만나도 돼.”

그때 어린이의 대답은 이랬다.

“저 이거 좋아해요. 그러니까 조금 더 해봐야겠죠.”

그 순간의 기분이 또렷이 생각난다. 역시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어린이로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그 말씀을 ‘두고 보겠다’는 뜻으로 들은 나로서는 어린이의 말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일을 시작하던 무렵의 걱정과 긴장이 어린이의 한마디 말에 투영되기도 한 것 같다. 아마도 그날일 것이다. 공책에 뾰족한 말을 적은 날이.

어머니께 땡땡이는 내 수업보다 이러저러한 수업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그럴듯한 의견을 드리고 어린이와 헤어졌다. 여태 이 일을 ‘수업에 기대하는 바가 서로 달라서 내가 먼저 그만두기를 권한 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공책의 메모를 보니 모든 일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지금 이렇게 구구절절 사연을 썼지만 사실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때 나는 그 어린이를 미워했다. 어린이의 태도와 말이 불쾌하게 여겨질 수는 있었겠지만, 내가 지나쳤다.

왜 그때 ‘못된 어린이 때문에 힘들다’도 아니고, ‘못된 어린이는 정말 못됐다’라고 적었을까? 아마도 ‘어린이는 원래 착하다’라는 전제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못되게 구는 어린이니까 그건 정말로 못된 것이라고, 이해해줄 여지가 없다고, 미워하는 나를 정당화하며 그렇게 쓴 것이다. 같은 말을 어머니한테 들었을 때보다 어린이한테 들었을 때 더 큰 타격을 입은 것도 어린이에 대한 그런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순진무구해야 할 어린이한테 그런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에 배신감도 들고 자존심도 상했던 것이다.

그 어린이와 헤어진 뒤로 여러 해 다양한 어린이를 만난 경험을 되짚어서 생각해본다. 어린이는 정말 티 없이 순진한가? 어린이의 마음은 착하기만 한가? 그렇지 않다. 어린이도 계산적인 행동을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때로는 너무 이기적이고, 욕심이 지나쳐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에 별로 반성하지 않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어른과 마찬가지다. 어린이를 ‘순수한 존재’로 상상하고 천사 같은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에 실망도 커진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이에게서 좋은 모습만 보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도 되도록 고운 모습만 보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나 자신만 해도 그렇다. 오랫동안 ‘명랑한 어린이’를 이상적으로 여겨왔다. 활달하고 잘 웃는 긍정적인 어린이. 고백하자면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어린이가 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어른들이 그런 어린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게 밝고 환하며 유쾌한 모습만 있었을 리 없다. 어둡고 우울하고 차가운 면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쓸 때도 있었다. 나의 명랑함은 과대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것조차 나 자신이 편집한 기억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나는 너무 까부는 어린이였을 수도 있고,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는 골치 아픈 어린이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솔직하지 못한 어린이로 보였을 수도 있다. 돌이켜 보니 같은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잘난 척한다’는 비난을 들은 적도 있다. 그런 내가 마냥 ‘명랑한 어린이’였을까?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나는 어렸을 때 이랬다’는 기억을 근거로 ‘어린이는 이렇다’ 또는 ‘어린이는 이래야 한다’는 정의가 내려지는 식이다. 그렇게 각자 착한, 활달한, 얌전한, 공부 잘하는, 어른 말씀을 잘 듣는 어린이를 떠올리고 주변의 어린이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한다. 어린이가 기대와 다르면 실망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식당에서 안 울었는데 저 아이는 왜 울지?’ 하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어린이는 자기 자신, 딱 한 명이다. 그것도 자의적으로 정리된 기억이다. 그것만으로 어린이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린이를 이해하려면 눈앞의 어린이를 보아야 한다.

어린이에 대한 미움으로 이를 꼭 물고 쓴 문장을 마주하고 나니, 몇 년 전의 것이라고는 해도 부끄러웠다. 그런 마음이 어린이에게 전해졌으리라는 생각에 며칠을 괴로워했다. 오래전 일이라 사과할 길도 없었다. 이럴 때 해결책은 단 하나. 앞으로 잘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걸까? 어린이를 절대 미워하지 말아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어린이가 미워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어른스럽게 대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운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고 그런 걸 마주하면 불편한 게 당연하다. 나는 어른이니까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생겨난 미움을 잘 처리하고 새 얼굴로 어린이를 보고 한 번 더 어린이를 다독이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그런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 이론서에서 읽은 적은 없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안다.

오래전, 전단 광고 덕분에 만난 또 다른 어린이가 있다. 상담을 오신 어머니 곁에서 그 어린이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겨울방학에 할 일이 늘어난 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의외로 나와 호흡이 잘 맞아서 사춘기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고 공부도 하고 친구 문제도 이야기했다. 나와 다투다시피 한 적도 있지만 내게 안겨 울기도 했다. 내가 미울 때도 많았을 텐데, 서툴렀던 나를 참아준 고마운 어린이였다.

그 아이가 이번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본격적인 입시 준비가 시작된 뒤로 통 만나지를 못했는데 코로나19로 뒤숭숭한 가운데 시험을 맞이하는 것이 늘 마음 쓰였다. 시험 전날 안부를 전하면서 일부러 무심한 투로 “시험 잘 보고, 끝나고 어디 가서 놀지 말고 집에 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선생님, 항상 보고 싶어요. 끝나고 좋은 마음으로 연락 드릴게요”라는 답이 왔다. 걱정하는 나를 안심시키는 다정한 말이었다. 나는 이제야 겨우 어른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데, 그때 그 어린이는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되었구나.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는 연말이다.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착해야만 한다’는 건 편견…제대로 이해하려면 눈앞의 어린이를 보아야

▶김소영

독서교실에서 어린이와 함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친다. 비양육자로서, 돌봄과 교육의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상이 어른에게도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 <어린이라는 세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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