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복직 투쟁 15년’ 사내하청 해직 노동자 이동우씨 “부당했기에 복직이 답이었다”

고희진 기자

기아(옛 기아차) 화성공장 1차 사내하청업체에 2002년 입사했다. 이듬해 2차 사내하청업체로 옮겼다. 2005년 기아차비정규직지회가 설립됐다. 노조에 가입하고 2006년에는 노조 집행부 조직부장을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노조활동을 했다. 몸이 안 좋아져 회사 절차에 따라 휴직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씨의 휴직을 회사는 ‘무단결근’이라며 해고했다. 이후 15년간 복직 투쟁과 비정규직 투쟁이 그의 인생을 채웠다. 노조 활동을 하다 구속된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함께 투쟁하던 동지 중 일부는 먼저 복직했다. 오랜 활동에 지친 동지는 스스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기아에서 2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초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1심 승소한 이동우씨(45) 얘기다.

2000년대 초반 완성차 불법파견 논란 때 해직된 기아차 2차 사내협력 노동자 이동우씨가 지난 18일 민주노총 경기본부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2000년대 초반 완성차 불법파견 논란 때 해직된 기아차 2차 사내협력 노동자 이동우씨가 지난 18일 민주노총 경기본부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지난 18일 경기도 수원 민주노총 경기본부 사무실에서 이씨를 만났다. 그는 “승소 기대는 없었다”고 했다. 기아에서 2·3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지위확인 소송을 내 승소한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소송을 통한 노동운동에 회의적이기도 했다.

이씨는 “화성공장의 전통이면 전통인데,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부당해고 소송보다 현장투쟁으로 복직해왔던 게 선례였다”며 “언제 나올지 모르는 법원 판결을 기다리기보다 현장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믿었다. 노조 활동으로 복직하길 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5년이 지날 줄은 몰랐다. 이제라도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보자고 생각해 2018년 뒤늦게 소송에 참여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크게 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난 만큼 처우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졌다. 이씨는 “본청 노동자가 임금 100%를 받으면 1차 하청은 60~70%, 2차·3차는 그것보다도 더 못받았다”고 했다.

2000년대 초중반 완성차 업계에도 비정규직 노조 바람이 불었다. 이씨는 2005년 노조가 세워질 때 가입해 해고 뒤에도 활동했다. 2007년 비정규직 파업 선동에 참여했다. 2008년 기아 노조는 ‘1사 1노조’ 운동을 벌여 정규직 노조와 1차 사내하청 노조가 하나로 합쳐졌다. 2·3차 사내하청은 포함되지 못했다. 이에 반대했던 정규직 노동자 이상욱, 1차 사내하청 노동자 김수억, 윤주형과 그가 기아차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기아해복투)를 조직했다.

이상욱씨와 김수억씨는 기아 노조가 회사에 복직안을 올려 각각 2013년, 2014년 복직됐다. 윤주형씨는 투쟁의 고립감을 견디다 못해 2013년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노조가 복직안에 두 명만 이름을 올리려고 해서 우리는 ‘네 명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노조가 우리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두 명만 복직안에 올렸다”며 “윤주형에게 그런 부분도 압박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떠나던 날도 아침까지 네 명이 모여 회의했다. 이후 윤주형이 죽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장례 절차를 놓고 기아 노조와 해복투가 대립하기도 했다.

비정규직 노조 활동으로 회사로부터 받았던 탄압과 이후 1사1노조 운동으로 정규직 노조에서 배제된 경험 등은 그에게도 좋은 기억은 아니다. 기아의 1사1노조는 정규직이 1차 하청의 비정규직 문제를 함께 풀어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2·3차 하청에 대한 차별을 강화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씨는 “지금은 정규직과 하청노조가 다시 분리됐다. 무엇 하나가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상황에 따라 하나의 노조가 운동에 적합할 때도 있고, 분리되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2008년 노조를 합칠 때도, 2017년 분리할 때도 포괄적인 의견 수렴이 없이 이뤄진 것은 문제였다”고 했다.

15년 노조 활동을 통한 투쟁과 함께 이제 소송도 준비해야 한다. 1심 법원에서는 그가 했던 간접공정 역시 원청의 지배·개입을 받는 업무라고 봤다. 앞으로 이씨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2·3차 하청 노동자들이 비슷한 소송을 진행할 수도 있다. 다만, 2·3차 하청의 경우 노조가 제대로 조직돼 있지 않고, 노동자 드나듬도 크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 파악이 어렵다.

이씨는 “일하면서는 원청에 대한 ‘소속감’이라기보다는 ‘지휘감독’을 받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품 불출 업무가 사실상 아이템(부품)만 다를 뿐이지, 정규직이 하는 방식과 1차하청 노동자가 하는 방식, 내가 하는 방식이 거의 같았다”며 “법원도 이를 인정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투쟁 기간이 길어지면서 복직이 아닌 새로운 회사에 취직해 살 수는 없느냐는 질문도 여러 번 들었다고 했다. 그는 “1차하청도 아니고 2차면 그냥 다른 데 가면 안 되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민주노조 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해고가 부당하기 때문에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화성공장에서 억울한 일이 많았다. 직원들에게 차별받은 일, 어머니가 교도소에 있을 때 돌아가셨고, 윤주형 동지도 투쟁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더 악에 바쳤던 것도 있는 것 같다. 회사가 ‘이렇게 하면 떨어져 나가겠지’ 생각할까봐 버틴 것 같다”고 했다.

1심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까지 다툼이 이어질 것이 분명한 사건이다. 이씨는 “2000년대 중반 활발했던 기아차 비정규직 투쟁이 이제는 잊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아직도 현장 비정규직 내에서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문제다. 끝나지 않았다”며 “이번 소송이 나의 복직투쟁과 비정규직 운동에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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