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목욕의 역사···종교의식에서 사교의 공간으로

장은교 기자

여러분은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을 즐기는 편인가요. 공중목욕탕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네요. 찜질방이나 사우나, 온천, 스파(Spa)는 어떤가요. 요즘 우리에겐 목욕만 하러 가는 목욕탕이 더 낯설게 느껴집니다. 집집마다 목욕시설이 갖춰져 있고 온수도 잘 나오지만 그래도 우리는 종종 여러 사람이 함께 벗고 씻는 공중목욕시설을 이용합니다. 단순히 몸을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이와 휴식을 즐기기 위해서죠. 형태는 조금씩 달라졌지만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나라마다 다양한 공중목욕문화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공중목욕탕이 있었는지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인더스문명의 고대도시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목욕탕


인류최초의 공중목욕탕 ‘모헨조다로’ /출처: (cc) M.Imran at en.wikipedia

인류최초의 공중목욕탕 ‘모헨조다로’ /출처: (cc) M.Imran at en.wikipedia

1920년대 영국은 파키스탄에서 고대도시 발굴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영국은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고 지금의 파키스탄은 그때 인도의 한 지역이었습니다. 영국은 파키스탄 신드 지역에서 인더스 문명의 흔적으로 보이는 고대도시유적을 발굴합니다. 현지어로 ‘사자의 무덤’이라는 뜻을 지닌 모헨조다로였습니다. 모헨조다로 유적지는 고대 인더스 문명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줬습니다.

기원전 4000년경으로 추정되는 모헨조다로에는 도로와 학교, 회의장, 곡물저장소로 보이는 공간들이 발견됐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든 계획도시였던 것이죠.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목욕탕이었습니다. 모헨조다로의 한 가운데서 길이 11.8m, 폭 7m, 깊이 2.4m 규모의 대형목욕탕이 발견 됐습니다. 목욕탕 안에는 물이 나왔을 것으로 보이는 여섯 개의 구멍도 있었습니다. 그 옛날 옛적에 수로를 이용해 물을 끌어다 목욕탕을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것이죠. 역사학계는 인더스 문명의 지혜로움과 우수함에 놀랐습니다.

모헨조다로의 목욕탕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형태였고, 바닥은 두 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샤워를 하는 곳이 아니라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전 청결하게 몸과 마음을 단장하기 위한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헨조다로의 ‘거대한 목욕탕(The Great Bath)’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공중목욕탕으로 여겨집니다. 유네스코는 1980년 모헨조다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중요한 사교무대였던 그리스·로마시대의 목욕탕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깨달은 장면을 묘사한 그림 /출처 Bigthink.com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깨달은 장면을 묘사한 그림 /출처 Bigthink.com

그리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부력의 원리를 처음 깨닫고 “유레카(알아냈다)!”라고 외치며 벌거벗은 몸으로 뛰어다녔다고 하죠. 왕의 지시를 받아 연구를 진행하던 학자가 나체로 뛰어다닌 이유는 그가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장소가 목욕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에 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아내라”는 지시를 받고 고민하던 중, 휴식을 취하러 목욕을 하다가 욕조에 몸이 들어가는 만큼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물의 부피와 압력, 무게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르키메데스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목욕을 즐겼습니다. 프랑수아즈 드 보너빌이 쓴 <목욕의 역사>에 따르면 그리스 공중목욕의 역사는 기원전 6세기부터 시작됐습니다. 집에 욕실이 없는 사람들은 저렴하게 또는 무료로 공중목욕탕을 이용했고, 부자들은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목욕을 즐겼습니다.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도 온수욕을 즐긴 그리스인들의 목욕문화가 묘사돼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 건립된 철학 학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 ‘리케이온’은 그리스 남성들이 함께 운동이나 공부를 한 뒤 목욕을 하던 연무장의 일부였다고 합니다.

공중목욕문화는 로마시대에 꽃을 피웠습니다. 배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진 도시 폼페이의 유적에는 화려한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탈의실과 운동기구까지 갖춰져 있던 폼페이의 목욕탕 한쪽에는 다양한 체위의 성관계를 묘사한 그림도 그려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목욕탕과 성매매 장소가 연결돼 있던 흔적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로마제국이 번성하면서 목욕탕은 황제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목욕탕이 크고 화려할수록 황제가 정치를 잘해 시민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상징처럼 여긴 것이죠. 황제들은 소박한 목욕탕과 구별해 ‘테르마이’라고 부른 호화 목욕탕을 짓고 자신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카라칼라 황제가 216년 만든 ‘카라칼라 목욕탕’은 축구장 4개를 합한 정도의 규모로 한번에 2000명까지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목욕탕뿐 아니라 도서관과 강연장, 집회실, 체육관까지 갖춘 종합시설이었습니다.

카라칼라 목욕탕 /출처: tourinrome.com

카라칼라 목욕탕 /출처: tourinrome.com

카라칼라 목욕탕 2009년 모습 /출처: (cc) Chris 73 at Wikipedia

카라칼라 목욕탕 2009년 모습 /출처: (cc) Chris 73 at Wikipedia

306년에 만들어진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은 3000명이 동시 입장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목욕탕을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지었던지, 목욕탕에서 발굴한 청동작품과 대리석 등만으로도 박물관 하나를 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라칼라 목욕탕의 열탕이 있던 자리에선 전차와 말이 등장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가 공연될 정도로 웅장한 규모였습니다.

목욕문화가 번성하면서 로마의 공중목욕탕은 시민들의 중요한 사교장이 됐습니다. 시민들은 함께 운동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중요한 새소식이 목욕탕을 통해 전파됐던 것이죠. 이발과 치료목적의 마사지, 공부도 목욕탕 부대시설에서 이뤄졌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모이고 모든 것이 가능한 ‘핫 플레이스’가 목욕탕이었습니다. 로마시민들은 오랜만에 만나면 “넌 요즘 어느 목욕탕 다녀?”라고 안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목욕탕이 중요한 문화시설이 되면서 궁전에 더 좋은 목욕탕을 갖고 있는 황제들도 일부로 공중목욕탕을 다녔다고 합니다.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세신사에 지불할 돈이 없어 벽에 등을 문지르고 있던 퇴역군인에게 대신 돈과 노예를 내렸고, 이 소식은 금세 퍼졌습니다. 다음날 시민들은 너도 나도 ‘황제가 떴다!’고 알려진 목욕탕으로 향했고 황제 앞에서 벽에 등을 문질렀습니다. 이를 본 황제는 서로 서로 등을 밀어주라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하네요. 이 일화는 황제와 시민들이 함께 벗고 같은 공간에서 목욕을 할 만큼 공중목욕탕에서만큼은 신분의 차이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화려함을 마음껏 뽐냈던 로마의 목욕문화는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호화로운 목욕문화가 로마를 멸망으로 이끈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유럽에서 공중목욕탕을 몰아낸 흑사병


유럽의 목욕문화는 중세를 거치며 쇠퇴하게 됩니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 전 반드시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을 신자의 의무로 여겼던 이슬람교와 달리, 중세 기독교인들은 씻지 않는 것을 보다 도덕적인 행위로 여겼습니다. 공중목욕탕이 매춘으로 연결되거나 사치와 향락의 온상이 되기도 했고, 몸을 씻고 단장하는 것이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행위로 간주됐기 때문이었죠.

캐서린 애션버그는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라는 책에서 “중세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심한 시대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도 한 달에 한번만 목욕을 했다지요. 중세 유럽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그림에는 몸에서 이나 벼룩을 찾는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라 투르, 1638년 작 ‘벼룩 잡는 여인’

라 투르, 1638년 작 ‘벼룩 잡는 여인’

유럽의 목욕문화는 십자군이 터키식 목욕탕 하맘을 보고 온 뒤 다시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공중목욕 최대의 적이 등장합니다. 유럽에서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이었습니다. 원인 모를 병으로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이 죽어가자, 유럽의 의학계는 엉뚱한 곳을 의심했습니다. 공중목욕탕을 통해 질병이 전염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흑사병이 발병한 이듬해인 1348년 프랑스 필리프 6세는 파리대 의학교수들에게 원인을 규명하라고 지시했는데, 교수들은 “뜨거운 목욕이 사람의 몸을 젖게 해 긴장을 풀어주고 열과 물이 피부에 입구를 열어 역병이 쉽게 침투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은 청결이 면역력을 높이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이 상식이 됐지만, 당시 의사들의 주장은 무려 200년동안이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 졌습니다. “죽기 싫으면 목욕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되풀이됐다고 합니다.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공중목욕탕은 물론이고 집에서도 씻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터키의 하맘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63년 작 ‘터키 목욕탕’-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대사의 부인 몬태규가 터키 목욕탕을 방문한 뒤 편지에 묘사한 것을 보고 그린 그림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63년 작 ‘터키 목욕탕’-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대사의 부인 몬태규가 터키 목욕탕을 방문한 뒤 편지에 묘사한 것을 보고 그린 그림

터키의 공중목욕탕 하맘은 십자군 원정을 떠난 유럽인들이 목욕문화를 되살리게 할 만큼 일찍부터 잘 발달했습니다. 터키 국민들은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기 전 항상 손과 입안, 귀와 발까지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따라서 한 마을에는 사원과 도서관, 학교, 병원 등 기간시설과 함께 꼭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터키인들은 고인 물은 청결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맘에는 큰 욕조는 없습니다. 대신 달궈진 대리석 바닥에서 땀을 낸 뒤 때를 밀고 비누거품으로 헹구는 목욕을 합니다.

하맘은 마을공동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장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유럽인들처럼 터키인들에게도 하맘은 사교의 장이자 중요한 정보가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는 결혼 전 ‘신부의 목욕(겔린 하맘)’이라는 행사를 열고 마을 여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결혼 생활의 지혜를 구했다고 합니다. 산후조리도 돌잔치도 모두 하맘에서 이뤄졌다고 하니, 터키인들에겐 하맘이 정말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와 계급을 드러내는 목욕탕


씻으면 죽는다는 잘못된 정보의 시대가 가고 19세기 이후 유럽에선 잘 씻고 깨끗한 사람이 상류층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1860년 영국에서 출간된 <상류사회의 습관: 신사숙녀를 위한 지침서>라는 책에는 교양 있는 신사숙녀들이 매일 몸을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소개하는 글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씻고, 가난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몸을 돌볼만한 여유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죠. 운동과 목욕으로 잘 관리한 몸을 목욕탕에서 과시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영국은 1842년 바스(BATH) 지역에 공동세탁장 겸 목욕장을 개장했고, 1846년에는 목욕탕에 관한 법률도 만들었습니다. 지역이름이었던 ‘Bath’는 이제 목욕을 뜻하는 단어가 됐죠. 공짜 목욕은 가난한 사람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져 적은 금액이라도 꼭 이용료를 받았다고 하네요. 산업혁명과 함께 공중목욕탕 건설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처음부터 시행착오 없이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욕탕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휴양지로 만들었다는 프랑스 비쉬(Vichy) 지방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휴양지로 발전했습니다. 지금 비쉬에는 다양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휴양시설과 함께 좋은 물로 몸이 아픈 곳을 치료하도록 도와주는 ‘온천의사’도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시작된 한국의 목욕문화


한국의 목욕문화는 삼국시대 불교와 함께 시작됩니다. 삼국시대에 목욕은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불교 경전에는 하루에 몇 번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서천왕의 동생들이 온탕에서 유락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찰에서 승려들이 있던 목욕탕이 우리나라 공중목욕탕의 효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 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부터는 목욕이 질병치료와 예방의학의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개방적이었던 고려의 목욕문화에 비해 유교사회였던 조선은 전신욕조차 즐기지 않았습니다. 남녀가 따로 목욕을 하는 것이 당연했고, 집에서 홀로 목욕을 할 때도 옷을 다 입은 채로 ‘부분 목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삼짓날(3월 3일), 단오(5월 5일), 유두(6월 15일), 칠월칠석(7월 7일), 백중(7월 15일) 등에는 전신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풍속화가인 혜원 신윤복이 그린 <단오풍정>에는 단옷날 냇가에서 목욕을 즐기는 여인들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습니다.

신윤복  ‘단오풍정’,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단오풍정’, 간송미술관 소장

왕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온천욕을 즐겼습니다. 온천은 휴식을 즐기기 위해서 찾기도 했지만 병을 치료하기 위해 찾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고려 이후에는 좋은 목욕이 병을 낫게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왕과 귀족들은 ‘물이 좋은 곳’을 찾도록 지시했답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에는 온천을 새로 발견한 사람에게는 3계급 특진을 해주고 직위가 없는 사람은 관리 7등급에 임명시키는 보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온천을 얼마나 귀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죠?

지금도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에는 왕들이 특급휴양지로 꼽은 온천이 있었습니다. 태조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주 이곳을 찾았고 피부병으로 고생한 것으로 알려진 세종도 자주 온천욕을 했습니다. 세조와 현종, 숙종, 영조 등도 온양온천을 이용했습니다. 현종 6~10년 실록 기록에는 왕이 온천에 머물었다는 기록만 50건 이상 발견됐다고 합니다.

은밀하고 개인적인 행위로 자리 잡았던 목욕문화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시 변화를 겪었습니다. 로마와 유럽의 점령군들이 식민지에서 그랬듯이 일본은 ‘청결과 위생’을 강조하며 조선인들의 군기잡기에 나섰습니다. 이유는 달랐지만 개화파 지식인들도 목욕을 중요시 했고, <독립신문>에는 목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도 실렸습니다.

1980년대 목욕탕 풍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 목욕탕 풍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종로 등 역사가 깊은 서울의 골목골목에는 아직도 작은 동네목욕탕이 남아 있습니다. 목욕요금은 서민들의 물가지수로 반영될 만큼 중요했지요. 그러나 1990년대부터 찜질방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2000년대부터는 찜질방과 사우나, 여기에 영화방과 놀이기구까지 갖춘 복합문화공간 형태의 목욕탕이 널리 퍼졌습니다. 목욕탕에 목욕만 하러 가는 사람은 줄어들고, 친구들과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놀이공간이 됐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목욕 문화를 즐기나요. 미래시대의 목욕 문화는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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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교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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