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노동자 잊었나…‘인간다운 삶’ 기본권 보장 않는 한국

박용하 기자 ·박은하 기자

체계·방향성 없는 이민정책

1970년대 독일에서 체류권을 보장받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파독간호사들(왼쪽 사진), 지난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이주노동자의 날’ 기자회견에서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있는 이주노동자(오른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경향신문 자료사진

1970년대 독일에서 체류권을 보장받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파독간호사들(왼쪽 사진), 지난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이주노동자의 날’ 기자회견에서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있는 이주노동자(오른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경향신문 자료사진

최장 9년8개월까지 체류하는데
가족동반은 허용 안돼 ‘생이별’

가건물·비닐하우스에 기거하며
산업재해 건수는 내국인의 6배
사업장 이동 횟수 제한에 걸려
회사 옮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해

한국이 감당 가능한 규모 파악해
적정 규모로 유입 제한도 필요
이민 정책 초점 노동자에 맞추고
이민처 설립해 긴밀하게 조정해야

1970년대 독일로 건너가 일한 한국인 간호사 중에는 ‘한쪽 소매가 잘린’ 간호복을 간직한 이들이 있다. 이 간호복은 그들이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운 흔적이다. 노동력 부족 문제를 겪던 독일은 당시 한국에서 다수의 파견 노동자를 데려왔지만,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흔들리자 이들에게 더 이상 체류허가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 피폐한 조국을 벗어나 희망을 찾으려 한 파독 노동자들에게 이런 독일 정부의 입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간호사들을 비롯해 독일 각지의 한인들은 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로 해서 당신들을 도와줬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며, 우리가 돌아가고 싶을 때 다시 돌아가겠다”는 외침이었다. 이들은 독일인들에게 지지서명을 받았고, 간호사들은 독일 정부 방침에 항의하는 의미로 간호복의 한쪽 소매를 자르기도 했다. 그 결과 영주권 획득, 시민권 신청 등이 가능한 외국인법 시행령 개정을 이끌어냈다.

파독 노동자들이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싸운 지 50년, 한국은 이제 사람을 받는 나라가 됐다. 열악한 작업장에서 한국인 대신 일할 사람을 찾기 위해, 저출산으로 줄어드는 인구수를 채우기 위해 한국은 수많은 이주민과 유학생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이곳에 정착하려 한다. 또 “제대로 된 권리를 달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다. 이젠 한국도 그들에게 답을 내놓을 차례다.

하지만 이주민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현재 한국은 이주민 인권 보장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고 이민정책 체계가 잡혀 있지 않다. 또 이주민들의 권리를 제한 없이 보장하기에는 일자리 문제 등을 두고 벌어진 내국인과의 갈등도 심상치 않다. 이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통합을 돕기 위해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한 이유다.

■ 이주민 ‘생이별’ 해결 못하는 한국

스위스 극작가 막스 프리슈의 희곡 <시아모 이탈리아니>(우리는 이탈리아 사람이다)에는 “노동자를 불렀지만, 사람이 왔다”는 구절이 있다. 과거 서독이 이탈리아 이주노동자들을 데려오면서도 사회통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지적한 말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초청한 국가 입장에선 ‘노동력’이지만, 이들도 사람이기에 기본적인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

현재 한국은 이주민들에게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있을까. 가족과의 ‘생이별’ 문제를 보면 그렇지 않다. 비전문직 취업비자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당초 3년이던 체류기간이 사업주들의 요청으로 길게는 9년8개월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가족동반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는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는 권리는 무엇보다 앞서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며 “체류기간이 10년 가까이 늘었는데 가족동반을 허용하지 않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노동여건도 여전히 열악하다.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건수는 내국인의 6배에 달하고, 매년 6000건 안팎의 사건이 발생한다. 농·축산·어업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은 작업장에 딸린 가건물이나 추운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경우도 많다. 회사를 옮기고 싶어도 고용허가제 규정상 횟수가 3년간 3차례로 제한되고, 옮기는 것도 사업주 눈치를 봐야 한다.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사장에게 문제를 지적하다 직장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고, 좀 더 나은 직장을 찾아 전전하다 미등록 신세가 되는 이들도 있다”며 “이렇게 늘어난 미등록 이주민이 4만~5만명가량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고용허가제를 일부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창원 IOM이민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현재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규정이 한계기업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을 붙잡아두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며 “이런 규제는 좀 더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업종을 제한하고 한국인과의 일자리 경쟁만 예방한다면 이동 횟수 제한 규정은 풀어도 크게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산업안전공단이 2017년 실시한 조사에서는 이주노동자의 52.6%가 차별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국은 독일·일본 등 다른 국가들과 달리 외국인 차별·인권침해에 대한 정의와 판단 기준, 구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해놓지 않고 있다. 농·축산·어업과 예술 분야 등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침해를 살펴보거나 보호할 수 있는 체계도 부족하다.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예방하는 체계는 부족한데, 한국인들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따가워지고 있다. 일자리 경쟁 등을 이유로 이주민들을 ‘위협’으로 느끼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주민 포용 정책을 반대하는 집회도 늘고 있다. 이는 이주민들의 소외감으로 이어진다. 산업안전공단의 조사에서 이주민 응답자의 17.8%는 ‘이 나라에 정착하여 사는 것을 한국인들이 싫어한다’고 답했다.

■ 이주민 규모에 대한 판단도 면밀해야

이주민들과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이주민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인구 변화를 보면 향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수요는 큰 편이다. 한국의 생산가능인구는 2016년 3763만명을 정점으로 2020년대는 연 30만명 이상 급격히 줄어들게 되며, 노인 비중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강도 높은 체력이 요구되는 직종이나 간병인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 있다. 현재도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일부 제조업이나 농·축산·어업 분야에선 이주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많다.

하지만 산업적 수요만 보고 이주노동자를 대폭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이주노동자들 중 고용허가제 적용을 받지 않는 재외동포나 미등록 체류자 일부는 한국인들이 몰리는 분야에 진출해 일자리 경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원 부연구위원은 “재외동포 비자나 비전문 취업비자로 들어온 이들이 실제 내국인 일자리를 얼마나 대체하는지 면밀히 조사하고 정책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업체 중에는 경쟁력을 잃은 ‘한계기업’들이 많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들 업체는 이주노동자를 낮은 임금으로 쓰며 버티고 있고,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산업구조가 향후 어떻게 변화될지 고려해 중·장기적인 이주노동자 수요를 판단해야 하지만 이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정은 한성대 교수는 “이주민들도 사람인데 무작정 많이 들어오게 한 뒤 필요 없어지면 나가라고 할 수 없다”며 “산업구조 변화 등을 감안해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민을 적정 규모로 유지하려면 유입 관리도 강화해야 한다. 출입국 제도를 보완하고, 무비자나 취업 목적이 아닌 비자로 들어와 일하는 사례는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태국의 경우 과거부터 무비자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최근 미등록 체류자로 국내에 남아 취업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그간 이주노동자 문제를 인권 중심으로 판단하던 진보진영에서도 최근에는 일자리 문제를 감안해 이주민들의 유입 제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여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을 맡았던 이범 교육평론가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온정적으로 대하는 것과, 이주민의 유입을 어느 정도로 통제할지는 다른 문제”라며 “자본의 국경 간 이동은 통제하는데, 노동이 국경을 넘어가는 것을 놔둬도 된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 체계 없는 이민행정, 변해야 할 때

한국에는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자, 유학생 등 이주민 전반을 아우르는 정책이 없다. 전체를 포괄하는 정책은 법무부의 사회통합 프로그램 정도다. 한국의 이민정책은 과거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에서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다문화가정 정책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주된 정책은 주로 다문화가정에 집중돼 있다. 이주노동자의 경우 등록된 인원만 약 50만명으로 결혼이민자(약 15만명) 수를 크게 앞섰는데, 정책에서 소외됐다는 평가가 많다.

부처별로 정책 조정도 원만하지 않다. 이민정책은 교육·복지·산업·문화 등 여러 부처와 이어져 있어 긴밀한 정책 조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까지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은 개별적으로 다문화 예산을 짜고 정책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특정 부처가 세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과도하게 주도권을 잡으려 하거나 부처·지자체 간 조정이 안돼 예산이 중복 지원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다문화가정 중심의 정책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주민 전체를 포괄하는 이민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책을 조정하는 ‘컨트롤타워’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민정책을 입안·심의·조정하는 중앙정부 부처로서 ‘이민처(청)’ 설립이 필요하다는 말도 여러 차례 나왔다. 하지만 아직 정부는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설동훈 교수는 “부처들 사이에 있는 칸막이를 없애지 못하면 이민정책은 실패할 것”이라며 “현재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이민정책을 주로 다루긴 하지만 검사들이 쉬다 가는 조직이 됐다. 향후 총리실 산하로 이민처를 출범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민 정책의 추가 재원이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간 국내에서는 “아직 국민이 안된 이주민을 위해 국가 예산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동관 IOM이민정책연구원 연구교육실장은 “출입국관리 수수료나 범칙금 등 외국인으로부터 발생하는 세입을 재원으로 하는 ‘이주민 사회통합기금’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며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이민대책을 위한 예산도 확보할 수 있고 국민들의 반감을 줄이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자들의 적응만 바라지 말고, 한국인들도 우리 문화에 관심 가져주세요”

한국인 향한 이주민들의 한마디

지난해 12월25일 마리아 페 아바바오를 비롯한 필리핀 이주여성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함께 지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있다. 마리아 페 아바바오 제공

지난해 12월25일 마리아 페 아바바오를 비롯한 필리핀 이주여성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함께 지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있다. 마리아 페 아바바오 제공


|인도네시아 출신 노동자 리스

“명절에도 고향 못 가고 노동
한국인과 어울릴 기회 없어”


“한국에는 ‘더워’(여름)와 ‘추워’(겨울) 있어요. ‘더워’에는 휴가 있고, ‘추워’엔 계속 일하죠. 추워는 좀 힘듭니다.”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리스(30)는 서투른 한국어로 한국에서 처음 겪은 사계절과 노동의 고충을 표현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버스 운전기사였던 리스는 지난해부터 경북 김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은 고된 일이지만, 그는 일주일 단위로 주·야간 근무를 교대해 하루 10시간 반에서 12시간 반을 일한다.

리스는 월 260만~290만원가량 벌지만 워낙 노동시간이 길어 다른 한국인과 어울릴 기회가 없다고 했다.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거나 친구를 만나 고향 음식을 먹으며 모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그는 고향에 아내와 7세 된 아들이 있다. 한국인은 명절이 되면 가족을 찾아가지만 그는 불가능하다. 한국인들에게 즐거운 명절이 그에게는 일하는 날이다.

|필리핀 결혼이주여성 마리아

“한국인 다 됐다는 칭찬 들어도
필리핀인 정체성 잃어가 서운”


충북 괴산에 사는 마리아 페 아바바오(49)는 1995년 정착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양육지도사와 인근 고교의 다문화강사, 유치원·경로당 영어강사 등을 맡고 있다. 마리아는 정착 초기에는 고향이 그리워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임신하고 아이 낳을 때는 친정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며 “그나마 고향 사람들에게서 친정엄마의 정을 느끼는데,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끼리 몰려다니는 것을 안 좋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마리아를 비롯한 이주여성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결혼이주여성 모임을 보는 시선도 좋아졌다. 필리핀 이주여성 모임은 지난해 ‘괴산고추축제’에서 필리핀 음식을 팔아 90만원을 벌고, 이를 군민장학회와 괴산군에 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에겐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는 “예전에는 ‘한국인 다 됐다’는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필리핀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같아 서운하다”고 했다. 이주민들만 한국에 적응하기를 바랄 게 아니라, 한국인들도 이주민들의 문화적 배경에 관심을 갖고 교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딜노자

“이주자를 다문화라고 부르면
진짜 다문화 상상하기 어려워”


우즈베키스탄 유학생인 갈라노바 딜노자(30)는 한국의 다문화 정책을 비판했다. 다문화교육을 전공한 딜노자는 ‘다문화’가 다양한 문화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탈북자, 유학생을 묶어 부르는 말이란 사실을 알고 의아했다고 했다. ‘다문화’로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의 주류와 분리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딜노자는 “이주자를 다문화라고 부르는 이상 진짜 다문화를 상상하기 어렵다”며 “다문화란 말은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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