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노동자 ‘37년의 기록’ 투쟁, 그 이후

전현진 기자

‘원풍 노조’ 증언록 - 37년 전, 투쟁을 기억하는 동지들

1980년대 부당해고와 노조탄압이 이뤄지던 그때,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원풍모방 노조 조합원들은 서로에게 힘이 됐다.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원풍동지회 제공

1980년대 부당해고와 노조탄압이 이뤄지던 그때,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원풍모방 노조 조합원들은 서로에게 힘이 됐다.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원풍동지회 제공

남성 직원들이 경찰과 합세해 입구를 막아섰다. 그 뒤편엔 팔짱을 낀 채 무심한 시선을 던지는 한 무리의 정규직 직원들이 있다. 지난달 9일 한국도로공사 본사에서다.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점거농성을 벌이자 사측이 ‘구사대(救社隊)’를 결성한 것이다. 구사대인 남성 정규직과 농성에 나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척점에 섰다. 여성 노동자들은 상의를 벗고 바닥에 앉거나 누워서 구호를 외쳤다. 10월9일 노사합의가 이뤄졌다. 합의에 응한 건 일부였다. 전원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조합원들은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37년 전인 1982년 9월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에 있던 섬유업체 원풍모방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졌다. 노조 탄압을 위해 동원된 폭력배들이 노조 사무실을 에워싸고 노조 간부들의 사표를 요구했다. 이들은 회사 간부와 회사 편에 선 남성 조합원들로 이뤄진 구사대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건장한 남성들도 섞여 있었다.

농성을 벌이는 수백명 조합원 중 다수는 여성이었다. 일부 남성 조합원도 대열에 있었다. 조합원들은 단식으로 맞섰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갔다.

산업화의 그늘 속엔 언제나 저임금 단순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할수록 더 짓밟혔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그 시절에도,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지금도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도로공사의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었고, 원풍의 노동자들은 정규직이었다. 하지만 탄압의 주체는 기업과 국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은 언제나 값싸게 취급된다.

원풍모방 노조에서 활동한 ‘원풍동지회’ 126명이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학민사)에서 지난 삶을 증언했다. 126명 중 117명이 여성이다. 경향신문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책 속에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과 소박한 행복,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싸웠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한 업체에서 일했던 노동자 100여명이 자신의 생애를 구술해 엮은 건 한국 노동운동 사상 처음이다. 1970~1980년대 ‘여공’으로 불렸던 산업역군들의 이야기면서,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기도 하다.

첫 사회생활이었을 원풍에서 치열한 한때를 보낸 원풍의 노동자들. 저임금 노동에 내몰린 상태에서도 노조 활동을 하며 야간학교를 다니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산으로 들로 여행을 떠났던 청춘들이 이제는 장성한 자식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요양보호사, 급식조리원, 가스점검원 등 저마다의 자리에서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원풍 해고 노동자’ 지독한 꼬리표…청춘은 그렇게 환갑이 됐다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1970~1980년대 민주적인 노조 활동으로 ‘전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조합원들은 각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1979년 원풍모방에서 열린 노조 대의원대회.  원풍동지회 제공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1970~1980년대 민주적인 노조 활동으로 ‘전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조합원들은 각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1979년 원풍모방에서 열린 노조 대의원대회. 원풍동지회 제공

저임금 노동자로 발디딘 사회
투쟁은 폭력사태로 끝났고
긴 터널처럼 이어진 삶
때밀이·요양사·산모도우미…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식당에서 일하는 나영금씨(59)는 37년 전 단식농성을 생생히 기억한다. 10대 때부터 원풍모방에서 일하던 그의 별명은 ‘닭 한 마리’였다. 먹는 걸 워낙 좋아해 ‘1인 1닭’은 기본이었다. 동료들과 동해 바다로 놀러가 주변에 있던 남자들과 ‘즉석만남’을 해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다. 다들 숟가락을 놓은 후에도 끝까지 복스럽게 밥을 먹는 나씨를 본 옆자리 남성이 “아이고, 나는 영금씨 못 먹여살리겠네”라고 호감 섞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나씨가 닷새를 굶었다. 1982년 9월27일, 당시 대표적인 민주노조로 이름을 떨치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에 폭력적인 탄압이 가해지던 그날부터다. 사측의 구사대는 남성 직원들과 건장한 남성들을 동원해 노조 사무실을 둘러싸고 집행부를 감금한 뒤 사표를 강요했다. 항의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욕설과 비아냥거림이 쏟아졌다. 나씨와 동료 조합원들은 단식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씨는 농성 중에도 자꾸만 옆의 동료들에게 먹는 얘기를 했다. 옆자리에 누워 있던 친구와 통닭 이야기를 하다 배를 움켜쥐며 울다가 웃었다. “잠을 잘 때면 ‘통닭이 날아간다’ 하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어요. 정신이 몽롱했죠. 밖에서도 전부 저를 걱정했다더라고요. ‘그렇게 잘 먹는 애가 어떻게 밥을 굶느냐’고 말이에요.”

1982년 9월27일 원풍모방 사측 ‘구사대’가 노조 사무실을 봉쇄하고 있다.

1982년 9월27일 원풍모방 사측 ‘구사대’가 노조 사무실을 봉쇄하고 있다.

조합장이 감금되고 노조 사무실이 구사대와 ‘폭력배’들에게 장악된 상태였다. “이런 배고픔 하나 못 참아서야”라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추석(10월1일)이 왔다. 그날 나씨는 팔다리와 머리채를 잡혀가며 동료들과 공장에서 쫓겨났다. 어딘지 모르는 길 위에 버려졌던 그날,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

나씨는 그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원풍동지회’가 126명의 증언을 모은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의 구술 작업을 하면서다. 무자비하게 끌려나왔던 이야기, 동료들과 함께 웃으며 지내던 이야기, 제대로 마치지 못한 학업의 설움을 풀기 위해 퇴근 후 노조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 앉은 자리에서 쭉 읽어나가던 이야기. 젊고 활기찼던 그 시절의 경험은 나씨에게 단단한 자부심과 자존심의 토대가 됐고, 늘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원풍모방에서 강제 해고된 뒤 다른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원풍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쉽지 않았다. 나씨는 결혼을 하고 이혼했다. 네 살 딸을 홀로 산전수전 겪으며 길렀다. 40대 초반부터는 목욕탕에서 때 밀어주는 일을 14년 했다. 수입은 나쁘지 않았지만 안정적이지 않았다. 명절이면 “혼이 빠지도록” 때를 밀었다. 온몸이 아팠다. 잠깐 쉬었다가 2015년 6월 용역업체를 통해 지금의 직장을 구했다.

1982년 9월27일 탄압이 시작되자 조합원들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1982년 9월27일 탄압이 시작되자 조합원들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나씨는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또는 낮 12시부터 오후 9시30분까지 등 시간대를 나눈 3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원풍모방에서 일할 때는 식사시간을 포함, 하루 8시간씩 일했다. 지금은 점심시간을 근무시간에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37년 전보다 오히려 노동시간은 길어진 셈이다.

의료연대본부 서울지부 서울대병원분회에 가입했다. 원풍 얘기를 하면 “전설 같은 곳에서 일한 분이냐”며 반색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서울대병원 청소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몇 차례 지지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나씨는 “예전과 (집회) 방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했던 방식이랑 거의 같았다”며 “과거 원풍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정말 순수하고 전설 같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노동은 계속된다

[커버스토리]한국 여성노동자 ‘37년의 기록’ 투쟁, 그 이후

원풍에서의 투쟁은 폭력사태로 끝이 났지만 삶은 계속됐다. 6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난 김두옥씨(64)는 도시가스 안전점검원으로 20년째 일하고 있다. 환갑이 넘은 그는 두 딸이 결혼해 안겨준 손주 보는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했다.

1973년 5월, 10대의 김씨는 원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면 시집을 못 간다’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해방되고 싶어 온 서울이었다. “시골소녀가 처음 마주한 공장은 두렵고 무서웠”지만, 오래지 않아 노조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동료들의 신망을 얻었다. 1980년 12월, 5·18민주화운동을 위한 모금운동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신군부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던 김씨는 20여일간 감금됐다가 퇴사를 강요받았다.

노금순씨(61)는 산모도우미로 일한다. 1978년 2월 원풍모방에 입사해 1982년 강제 퇴사당했다. 2003년 남편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뒤에는 김밥집에서 일하거나 다단계에 뛰어들기도 했다. 가게를 내서 운영해봤지만 큰 도움은 안됐다. 학교 급식소에서 2016년까지 일했다. 2008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지정돼 생활지원금을 받은 게 큰 도움이 됐다.

김예희씨(60)는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이다. 상경 후 처음 취직한 곳이 원풍모방이었다. 하루 780원씩 월 2만5000원을 벌어가며 5년을 일했다. 1978년 벌어진 ‘동일방직 똥물사건’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고, 노조 탄압에 항의하는 유인물을 돌리다가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요양보호사로 지내면서 주로 치매 환자를 돕는 일을 한다. 생활형편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장성한 딸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는 게 유일한 낙이다. 김씨는 “쉽지는 않지만 마음만은 여유롭다”고 한다.

김광분씨(61)도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1982년 9월27일 폭력사건 이후 강제 해고된 뒤 원풍 출신이라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재취업을 하지 못했다. 결국 취업을 포기하고 결혼했다. 도립병원에서 하루 8시간씩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3일을 일하고 하루 쉰다. 야간수당을 모두 포함해도 월급이 130만원 정도다. 식사는 따로 주지 않아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한다. 2019년의 요양보호사 근무환경은 1982년까지 일한 원풍모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됐다.

김오순씨(58)는 전북대병원 청소노동자로 일한다. 1977년 한국모방(원풍모방의 전신)에 입사한 뒤 1982년 9월27일 강제 사직했다. 1999년 외환위기 직후, 전업주부로 지내던 김씨는 식당 일을 하다가 친구 권유로 청소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영세민 자녀교육비를 지원하는 국가보조금을 타기 위해 의료보험 서류를 떼러 조합 사무실을 찾았다가 용역회사와 노동자가 절반씩 부담해야 하는 의료비를 노동자들이 100%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용역회사가 불합리한 방식으로 과도한 수수료를 챙기고 있었다는 것도 확인했다. 학벌 없고 나이 많은 단순노동자라 월급이 적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불합리한 제도가 저임금 노동의 원인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원풍에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모든 것을 알았으니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두렵고 불안했다. 3년 동안 가슴앓이만 했다. 그러다 전북대병원에 민주노총 전북본부 일반노조가 꾸려지자 50여명의 가입을 유도했다. 불합리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투쟁했고, 임금 보장과 각종 상여금을 제도화하는 단체협약 체결을 이끌었다. 지금은 전북대병원노조 미화분회장으로 일한다. “원풍에서의 생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그는 생각한다.

■ ‘민주화 유공자’ 자부심과 자녀들

1982년 9월27일 노조 탄압 이후 쫓겨난 조합원들이 ‘출근투쟁’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1982년 9월27일 노조 탄압 이후 쫓겨난 조합원들이 ‘출근투쟁’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엄마의 삶 알게 된 자녀들
“우리 엄마는 영웅이다”
이제 그들이 모임을 만들어
원풍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원풍 동지들은 청소노동자로 살아가거나 대학 구내식당, 마트에서 일한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한다. 저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일궈간다. 목회자가 된 동지도 있다. 살림살이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가난은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다. 부자는 부자로 남고, 빈자는 빈자로 살아가는 것만 같다. 저임금 노동자로 사회에 뛰어들었던 이들은 수십년이 흐른 지금도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다.

지금은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모양새로 살고 있지만, 원풍을 떠난 직후에는 대부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경찰 조사를 받고 수감되거나 수배자가 됐다. 고향에서 올라온 부모나 가족의 호통에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썼다. 1982년 9월 노조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단식농성을 벌였던 이강숙씨(59)는 “구만리 같은 오라비 앞길을 네가 막아서 쓰겠냐”는 부모의 한마디에 사표를 냈다. 국가는 경찰이던 오빠를 압박해 이씨의 사표를 받아낸 것이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원풍에서 일한 경력을 아무리 숨겨도 들통났다. 관리자가 따로 불러내 ‘원풍에서 일했던 것을 안다’며 퇴사를 강요했다. 고향집에 정체 모를 남성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또다시 노조 활동을 하는지 감시하던 경찰이 결혼식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결혼 후에야 감시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댁이나 남편에게 원풍에서 일했다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했다.

힘든 세월을 지나왔지만, 떳떳하게 살아가는 자부심
국가로부터 ‘민주화 유공자’ 인정받던 날, 회복된 명예…정말 행복했습니다

원풍을 만나 힘든 세월을 지나야 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가난하고 못 배운 노동자들에게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살게 하는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원풍 동지들은 2000년 무렵부터 순차적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국가로부터 명예를 회복하는 인증서를 받았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없던 남편과 가족들은 “영웅이다” “우리 엄마가 대단한 분이다”라며 기뻐해줬다. 최종예씨(62)는 인증서를 받고 “이제는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다”고 했다.

이제는 자녀들이 원풍의 유지를 이어간다. 원풍동지회 자녀모임인 ‘꿈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이곳에서 자녀들은 엄마가 힘겹게 지내온 삶의 역사를 본다. 교과서에서 원풍에 대한 내용을 본 뒤 전화를 걸어 “엄마가 교과서에 나왔어”라고 말했던 기억도 저마다 갖고 있다.

이 모임에서 만나 결혼한 커플도 벌써 두 쌍이다. ‘원풍 가족’인 셈이다. 최명숙씨(61)의 큰아들은 자녀모임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세 자매가 함께 원풍모방에서 일했던 장형숙씨(58)의 딸이다. 30여년 전 노동운동을 벌일 땐 상상하지 못한 미래다. 최씨는 “원풍노조는 나의 인생살이에 대박을 안겨준 것”이라며 “이렇게 원풍동지회의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으니 내 인생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1976년 원풍모방에 입사해 노조 대의원을 지낸 김두숙씨(61)의 딸 은지씨도 원풍동지회 자녀모임에서 인연을 만났다. 노조 대의원이었던 권점옥씨(59)의 아들이다. 권씨는 결혼 후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에게 원풍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원풍 동지모임도 몰래 다녔다. 그런 권씨가 이젠 원풍 자녀모임이 맺어준 아들 부부를 보며 스스로 어깨를 토닥인다고 한다. “점옥아, 그래 너 잘 살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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