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만 같으면 된다? ‘각자도생’ 사회의 이상한 ‘공정’

조문희 기자

실체 없는 ‘공정’

[흑백 민주주의④]출발선만 같으면 된다? ‘각자도생’ 사회의 이상한 ‘공정’

100m 달리기 경주가 시작된다. 출발선 앞, 선수들 면면은 다양하다. 국가대표 육상선수, 아마추어 동호인, 고교 선수, 휠체어 장애인이 저마다 트랙 위에서 몸을 푼다. 같은 성인이라도 영양상태가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어제까지 밥도 잘 못 먹은 채 훈련에 임한 선수도 있다. 전문 경주화를 신은 사람 옆에는 샌들을 신은 선수가 섰다. 이 경기가 ‘공정하다’고 말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공정은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올림픽 여자하키 남북단일팀 논란, 조국 사태,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국면마다 공정성 시비와 맞닥뜨렸다. 경향신문이 진행한 신년 설문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4명(40.7%)이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공정을 꼽았다. 평등, 자유, 협력, 성장, 평화 등 다양한 선택지의 비중은 각기 10% 남짓이었다.

공정이 거론된 배경은 달랐지만 뜻하는 바는 같았다. 공정은 주로 출발선의 위치 같은 경쟁의 규칙을 묻는 데 쓰였다. 공정한 경기라면 능력 있는 사람만이 이길 것이라고 봤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은 ‘공정하지 않다’는 반발에 부딪혔다. 장애인, 지방학생 등 소수자를 배려한 입시 전형에 대한 반대는 일부 수험생에게서 매년 나타난다.

오늘 한국 사회의 공정 주장은 ‘스냅 사진’ 같다. 경기가 열리는 순간만을 ‘찰칵’ 조명한다는 뜻이다. 공정을 주장한 이들은 경기 전 선수들이 처한 불평등한 상황엔 관심이 없다. 경기 후 승자와 패자에게 얼마만큼의 자원이 분배돼야 하는지도 논의하지 않았다.

[흑백 민주주의④]출발선만 같으면 된다? ‘각자도생’ 사회의 이상한 ‘공정’

각자도생 사회의 공정론

‘각자도생’. “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꾀함”(표준국어대사전)이란 뜻이다.

이원재 LAB2050 대표는 ‘한국 사회의 공정성’이 “각자도생 사회에서 떠오른 잘못된 담론”이라고 답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1997년과 2008년을 각자도생 사회의 배경으로 지목했다. 각기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해였다. 그는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거치는 동안 별다른 국가적 보호기제 없이 시장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면서 ‘시장화된 개인화’라는 용어를 썼다. 국가가 실업급여 등 사회안전망을 두껍게 마련한 유럽 복지국가의 ‘제도화된 개인화’와 대비된다는 취지다.

대다수 연구자는 외환위기를 노동 불안정 심화의 계기로 본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박과 ‘사회적 대타협’으로 정리해고가 늘고 파견노동이 법제화됐다. 1997년 말 2.6% 수준이던 실업률은 1999년 2월 8.6%로 올랐다. 임시·일용직 비중도 같은 기간 45.9%에서 52.2%로 6.3%포인트 증가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이 다를 때가 많았다. 2000년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은 53.7%였다.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이, 왼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끼우는데 임금이 다르다’는 농담이 통용된다. 시간 외 수당, 유급휴일 등 근로복지 수혜와 고용·건강보험 등 사회보험 가입률, 노동조합 가입 여부도 다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시장에서 대기업 정규직 등 조직 내부자와 외부자의 간극이 크다”며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선 내부시장으로의 진입을 지향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세습 중산층 사회>의 저자 조귀동씨는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한번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공무원이라는 ‘내부자’가 되면 웬만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내부자로 남는다. 반면 중소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기타 비정규직·일용직 등이 되면 끝까지 ‘외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흑백 민주주의④]출발선만 같으면 된다? ‘각자도생’ 사회의 이상한 ‘공정’

같은 출발선에 세우면 그뿐
경기 전의 불평등한 상황과
경기 후의 분배에는 무관심
외환위기·코로나 같은 외풍에
국가는 보호막이 돼주었나

바깥의 찬바람에도 국가는 보호막을 주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 해고된 노동자 중 실업급여를 받은 사람은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지금도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들에 견줘 보장 범위와 수준이 낮다.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이지만 고용보험 의무가입에서 배제돼 실업급여를 받기 어렵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외환위기 이후의 실업·빈곤 증대를 계기로 도입됐지만 부양의무자가 없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고 지급액이 낮아 매년 논란거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외환위기 발생 20주년인 2017년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인식조사한 결과, 외환위기가 현재 한국에 끼친 영향(복수 선택)으로 응답자의 88.8%가 비정규직 문제 증가를 꼽았다. 공무원·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 선호 경향을 낳았다(86.0%)는 반응도 높았다. 같은 해 한국노동연구원이 내놓은 ‘가구소득계층별 미취업 청년 특성’ 보고서는 2016년 대학교를 졸업한 15~29세 청년 미취업자 가운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이들(공시생)의 비율이 68.7%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불평등·세습에 눈감은 ‘그 공정성’

대부분 연구자들은 최근의 공정 담론을 ‘게임의 규칙’이 편파적이어선 안 된다는 요구로 이해한다. 입학시험, 입사시험 등 희소한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질 때 공정성을 따진다는 것이다. 흔히 공정하다고 인식하는 게임의 규칙은 ‘능력주의’다. 학력이나 학벌, 연고 따위와 관계없이 본인 능력만을 기준으로 평가가 이뤄지고 사회적 지위, 권력 등 재화가 분배돼야 한다는 철학이다.

교육학자인 한숭희 서울대 교수는 “공정이란 불평등한 사회를 전제로 한 개념”이라며 “불평등이 심할수록 소수의 제한된 기회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비정규직·프리랜서와 정규직이 평등하다면, 선발이 지금처럼 경쟁적이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시·수시·학종 등 입시 공정성을 둘러싼 민감한 반응도 각자도생 사회 탓이 크다. 어떤 대학을 가느냐가 어떤 직업을 얻고 얼마나 많은 소득을 거둘지 결정한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사회학자 엄기호씨는 이런 공정 담론에 긍정적 역할이 있다고 말했다. “특권이 개입하고 권력이 남용되기 때문에 절차적 정의, 과정적 정의로서의 공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공정 주장은 숙명여고 입시비리, 은행권 채용비리를 규탄하는 주된 근거였다. 최서원씨 딸 정유라씨의 입시비리와 학점 특혜는 2016년 촛불집회를 일으킨 한 계기가 됐다.

하지만 비판도 만만찮다. 신경아 교수는 최근의 공정 담론이 ‘가짜 공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 ‘눈앞의 기회가 고르게 주어지는가’에만 관심을 갖고 장기적으로 형성된 격차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면, 출발선이 같다고 해도 기회의 공정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 후 등굣길이 막히면서 불평등한 교육환경이 논란이 됐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은 “시험공부를 위한 노력도 기본적인 환경이 뒷받침돼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정한 경쟁’ 이전에 ‘공정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 세대의 경쟁 조건은 이전 세대의 경쟁 결과에서 비롯했다. 주병기 서울대 교수는 개천용불평등지수를 분석한 논문에서 2014년 최저환경에서 성공 잠재력을 지녔던 10명 중 4명이 최상위 소득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썼다. 같은 조건에서 2001년에는 1~2명만이 기회불평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가난한 가정 자녀가 신분 상승할 가능성이 날이 갈수록 차단됐다는 것이다. 직업·소득을 얻은 후에도 부모의 영향은 지속된다. 개천용이 된들 집값을 감당해야 하는 청년은 저축을 해낼 수 없다. 반면 부모가 일찍 주거 문제를 해결해준 청년은 상대적으로 유동 가능한 자원이 많다. 금수저, 흙수저로 상징되는 ‘수저계급론’이 등장한 이유다.

한국의 대입시험과 공채는 세습에 영향받는 불평등 구조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정규직 등 희소한 보호막을 누릴 ‘자격’으로만 쓰였다. 자격 없는 자의 권리 요구는 ‘무임승차’로 비판받았다.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은 “인국공 사태에서 정규직, 취준생들은 ‘너는 시험에서 떨어졌으니 받아들여라’라는 말로 차별을 정당화했다”며 능력주의가 불공정한 결과에 침묵하고 외려 용인하는 논리가 됐다고 지적했다.

공정 막는 ‘공정의 역설’

‘부모의 수저가 자식의 수저를 결정한다’는 체념적 인식과 ‘시험 봐서 정하자’는 공정성 주장이 동시에 제기되는 건 독특한 현상이다. 능력이 부모 등의 영향에 기인한다면, 시험을 치러보지 않아도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공정성 연구자인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금수저론은 ‘우리의 출발점은 동등하지 않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를 보여주는 통속이론인데, 이상하게도 박탈감을 말할 때만 쓰이고 능력주의와는 연관지어서 얘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대치동처럼 어느 동네에서 살고 있는지가 교육 수준에 영향을 미치잖아요. 자식의 거주지는 부모의 영향을 받고, 사교육비도 다르죠.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그래서 ‘보정 작업’을 합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의 말이다. 현세대 개인의 경제력 격차에 부모 세대의 영향이 있다면, 이를 보정해줘야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도 “능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나 자원조차 불평등한 사회라면, 공정은 ‘소수자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로 해석돼야 한다”고 말했다.

차별 없는 일자리, 균등한 교육 여건 등 ‘공정한 조건’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었다. 문제는 그때마다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복지를 확대하거나 재교육 예산을 투입하려 하면 당장 ‘역차별’ 논란이 일어나곤 한다. 소수자 우대 전형은 늘 ‘악용’이란 프레임에 시달린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최근의 공정 논란에서는 약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도록 하는 조치가 불공정하다는 주장이 많다”고 말했다.

공정을 말해야 할 약자·소수자는 정작 잊혔다. ‘조국 딸 입시비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도 의제는 오직 입시였다. 고졸 청년이 마주한 노동조건 등을 공정과 정의의 잣대로 보아 개선하자는 목소리는 적었다. 집회를 주도한 측도 주로 서울 소재 유명대학 학생들이었다. 하헌기 소장은 “상위 20% 관문을 어떻게 만들든 계층은 생긴다. 20%가 있으면 80%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20%로 진입하는 관문이 얼마나 공정한가를 떠나 평범한 80%의 삶이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한 조건 갖기 어려운데
정규직 요구 ‘무임승차’ 비판
소수자 우대 등 대안 만들면
역차별 논란 일거나 악용
형식 아닌 진짜 공정은 없나

‘공정의 역설’을 멈출 수 있을까. ‘IMF 세대’에 비유해 ‘코로나 세대’라는 말이 나온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가 서울 거주 19~34세 청년 2011명을 조사한 결과, 29.9%가 ‘2020년 2월 이후 실업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고용 형태가 불안정하거나 소속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더 고통받았다. 프리랜서나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51.3%가, 5인 미만 사업장 소속원은 42.4%가 수입원을 잃었다고 했다. 정규직 노동자 중 실업을 응답한 사람은 16.4%였다. 협소한 공정에의 집착이 외려 강화될 수 있는 배경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정치권을 비롯한 소위 엘리트들이 공정 담론을 제대로 다뤄야 한다고 봤다. 시민들은 엘리트의 입장과 근거를 토대로 특정 의제를 판단하는데, 정치권에서 그간 무엇이 지금 한국 사회에 공정인지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정희원 교수는 “시민들이 공정을 열망하는 것 같으니 정치인들이 ‘공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은 했다. 하지만 정작 공정이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않은 채 앵무새처럼 단어만 반복했다”며 “정책 결정자가 정의의 원칙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정 잣대의 쓰임새를 달리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김공회 경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의 공정’을 말했다. 김 교수는 “예컨대 의료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지금은 지역에 따라 편차를 보인다. 의제로서 논의될 기회도 불공정하다”며 “지방대 졸업생이나 고졸 청년의 취업 등 삶의 국면은 서울권 대졸자에 비해 의제로서 덜 다뤄진다”고 말했다.

한숭희 교수는 정부의 역할이 공정 잣대를 들이대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정한 선발은 진보 정부의 어젠다가 아닙니다. 정부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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