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압수된 데이터는 삭제되지 않는다

이범준·전현진 기자
[전자정보 압수수색 시대](3)압수된 데이터는 삭제되지 않는다

“내무부 장관 명령만으로 주거 수색과 데이터 복제를 가능하게 한 비상사태법은
공공질서 보호와 사생활 존중 사이의 균형을 요구하는
1789년 인권선언에 위반되므로 위헌을 선언한다.”

(수사당국의 ‘파리 테러’ 수사 과정에 대한 2016년 프랑스 헌법재판소의 결정)

수원지검 강력부는 2011년 한 제약회사 회장의 배임 혐의 수사에 필요하다며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받아냈다. 회장 사무실에서 저장매체를 확보한 검사는 혐의 관련 자료만 추리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저장매체 자체를 검사실로 가져갔다. 다음날엔 저장매체를 대검찰청 디지털포렌식센터로 보내 이미징(복제)했다. 그리고 해당 복제본을 자신의 개인 외장하드디스크에 다시 복제했다. 하지만 배임 혐의 수사는 진척이 없었고, 이후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났다. 이에 검사는 자신의 외장하드에 있는 복제본을 검색해 제약회사의 약사법 위반, 조세범처벌법 위반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그런 뒤 이런 정보를 같은 수원지검 특수부 검사에게 주고 자신의 외장하드를 압수하라고 했다.

이런 수사 방식은 불법 압수에 별건수사라는 지적이 많지만 검찰의 또 다른 수사가 두려워 항의하는 피의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법원도 이런 식의 영장 청구를 저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 사건에서도 수원지법 판사는 강력부 검사의 외장하드를 압수해 증거로 만들겠다는 특수부 검사의 요구대로 영장을 내주었다. 별건수사를 받게 된 제약회사 측은 이 압수수색은 위법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수원지법은 이를 받아들여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건은 대법원으로 갔다.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검 디지털포렌식센터의 이미징까지만 적법하며, 그 이후 복제부터는 위법하다고 결정했다. 검찰 출신 박상옥 대법관은 “실체적 진실 규명의 요청을 도외시한 것”이라며 반대의견을 냈다. 이 결정이 검찰의 전자정보 압수수색에 처음으로 제동을 건 대법원의 판단이다.

디지털수사망 보관 5만건 중
스마트폰 데이터가 1만4550건
저장 근거는 대검의 내부 예규

영장 내준 법원 “폐기” 당부뿐
언제든 수사 단서·증거 활용
불법 압수·별건 수사 소지

하지만 이 결정도 압수한 전자정보가 축적되는 대검 포렌식센터 서버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대검은 2012년 구축한 전국디지털수사망(D-NET)에 검찰이 압수한 전자정보가 얼마나 저장돼 있는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이 D-NET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하고 더러는 받아낸다”면서 “과거 저장한 데이터에서 새롭게 혐의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 결과 수원지법에서 이런 영장을 발부한 사례가, 서울중앙지법에서는 기각한 사례가 있다. 이와 관련, 오현석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D-NET 스토리지에 업로드된 데이터에 대해 수사주임검사가 삭제 요청을 잘하고 있는지, 혐의와 무관한 증거에 대해 삭제·열람통제가 적정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의구심(이 있다)”이라고 2019년 국회입법조사처 학술대회에서 지적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대검에 D-NET의 현황을 문의했지만, 아무것도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을 얻었다. 압수해 저장해놓은 전자정보의 개수조차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대검 디지털수사과는 “D-NET의 구체적인 이미지 건수 등을 공개하는 것은 계속 중인 재판 또는 수사에 중대한 영향을 초래할 염려가 있어 해당 취재요청에 응하기 어렵다”고 이유를 댔다. 이후 취재를 거듭해 경향신문은 D-NET의 데이터 현황을 처음으로 확보했다. 이 자료를 보면 지난 8년여 동안 검찰이 압수해 저장한 스마트폰이나 하드디스크 등 전자정보의 이미지는 총 14만1739건에 달하고, 이 중 35.2%인 4만9942건을 지난 2월 현재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검이 전국에서 압수한 컴퓨터와 휴대전화 이미지를 폐기하지 않다가 최근 들어서야 활용 가치가 완전히 없어진 자료를 조금씩 삭제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국가비상사태에도
무차별 데이터 복제 막는 등
적법 수사 원칙 확인하는 판결

한국에선 처벌 여론이 압도적
법원도 눈감아주며 증거 인정
피의자들 항의하기도 어려워

수사기관은 영장에 적시된 혐의에 관한 데이터만 선별해 압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 기기 전체를 압수하고 이미징하고 있다. 데이터의 양적 범위를 최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서버에 복제해 언제든지 볼 수 있게 시간적으로도 극대화한다. 이처럼 수사기관이 데이터를 위법적으로 가지려는 이유는 언제든 수사의 단서로 활용해 새로운 증거를 만들 수도 있고, 더러는 법원이 그대로 증거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영장전담판사를 지낸 한 판사는 “불법촬영, 보이스피싱, 마약 등 사건에서 수사기관에 저장된 자료를 압수하겠다는 영장 청구를 받아준 적이 있다”면서 “민생범죄여서 내주기는 했는데 과거에 압수된 정보가 왜 삭제되지 않고 저장돼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수사기법은 민생범죄뿐 아니라 정치, 경제 범죄 등 모든 범위에서 쓰이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어느 시기에나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면서 “그렇게 원칙이 허물어지면 적법한 수사는 아무에게도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공안범죄, 그다음에는 기업범죄, 최근에는 성범죄가 대표적이다. 유럽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적법한 수사와 압수수색의 원칙을 확인하는 판결들이 나오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2015년 파리 테러가 발생하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955년 만들어진 비상사태법에 따라 내무부 장관의 명령만으로 주거 수색이 가능했다. 수색 과정에서 접근 가능한 모든 컴퓨터 데이터도 복제할 수 있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500점 넘는 무기를 찾아냈다. 그런데 수색이 한창이던 2016년 2월 헌법재판소가 “수색 과정에서 안보 및 공공질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의 정보까지 복제될 수 있다”며 위헌을 선언하고, 데이터 복제를 막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처벌 여론이 적법 절차를 압도한다. 서울중앙지검 공안부는 200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자정보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받았다. 전교조 소속 교원들이 미디어법 반대 시국선언을 하자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수사 중이었다. 검찰과 경찰은 특정 날짜를 마음대로 정하고 그날 이후 열어본 파일 8000여개를 모조리 압수했다. 전교조는 영장에 근거가 없는 광범위한 위법 압수라며 법원에 항의했다. 2011년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압수수색영장이 허용한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서 위법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면서도 “일정 시점 이후의 파일들만 복사한 것은 나름대로 혐의사실과 관련 있는 부분으로 대상을 제한하려고 노력을 한 것이므로 영장 집행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위법이지만 위법이 아니라는 이 결정의 주심은 진보 성향으로 알려진 박시환 대법관이었다.

다음달 공판이 시작되는 한 대기업 수사도 위법한 서버 압수수색이 적잖았다는 게 법조인들 설명이다. 변호인들은 검찰을 자극해 재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입을 다물었지만, 그러면서도 “취재 내용이 대략 맞을 것”이라고 했다. 법원과 로펌 관계자 설명을 모으면 검찰이 기업 서버에서 파일이 삭제된 것을 찾아낸 뒤 증거인멸 범죄도구라며 서버 자체를 압수하고, 이후 데이터를 탐색하면서 다른 혐의를 찾아내는 식이었다고 한다. 검찰이 압수수색 과정에 변호인 참여를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아, 영장 범위를 넘어서는 탐색을 막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도 대법원은 변호인 참여가 없으면 위법한 압수라고 선언만 하고, 정작 결론에서는 합법적인 압수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남의 신체를 촬영한 사건 등에서 그런 판단이 많다.

미국에서는 합법적인 압수 과정에서 발견한 추가 정보는 적법한 증거로 인정한다는 기존 판례를 전자정보 압수수색 시대를 맞아 2009년 폐기했다. 2003년 메이저리그 야구단은 선수노조와 합의해 전체 선수의 약물 사용 여부를 검사했다. 양성이 5% 이상이면 이듬해부터 무작위 약물검사와 징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 무렵 연방 수사당국은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는 유력한 정보가 있는 선수 10명의 검사 결과를 압수하는 영장을 받았다. 그런데 압수 과정에서 선수 전원의 검사 결과를 발견하고 이를 복제했다.

이에 제9연방항소법원은 “최초 수사 대상인 10명에 대한 증거만 쓸 수 있다”고 판결하고, 전자정보 압수수색 4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우연한 발견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압수수색 전에 증거분석 계획을 내라. 수사 담당자는 디지털포렌식에 관여하지 못한다. 영장과 무관한 정보는 폐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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