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만 먹어온 한국인과 ‘미소(일본식 된장)’가 그리워진 일본인이 만나 미소를 만들었다. 함께 장을 담그기 전까지 서로 알지 못했던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됐고,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서울 성북구 장위동 ‘공유부엌’ 사람들 이야기다.
지난 12일 장위동 골목 한켠에 위치한 도시재생센터 공유부엌에 한국인 2명과 일본인 4명이 모였다. 이날 모임의 주제는 ‘일본식 된장 만들기’. 일본식 된장이니 당연히 일본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야겠지만 모임의 대장은 김혜자씨(77·장위2동 주민차치회장)다. 그는 자타공인 ‘장 담그기의 달인’이다. 직접 만든 장아찌도 일품이다. 11살 때부터 부모님을 대신해 장을 담갔으니 올해로 66년째 다. 나이토 에이코씨(54), 고야 수요씨(47), 미스미 유키씨(50), 고야 데루미씨(61), 그리고 유일한 청일점인 문만식씨(61·장위2동 주민자치회 부회장)는 대장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나눠준 콩을 있는 힘껏 으깨세요.” 18시간 이상 불리고 3~4시간 동안 쪄낸 백대콩 3㎏이 500g씩 6봉지로 나뉘어 배분됐다. 힘껏 방망이질을 시작하자 고소한 콩 냄새가 부엌 전체로 퍼져나갔다. 고야 데루미씨가 유창한 한국말로 “나 어릴 때는 엄마가 빻은 콩을 동그랗게 만들어 그 위에 설탕을 솔솔 뿌려 나눠줬어요”라고 말했다. 콩물과 섞인 콩가루 뭉치가 저마다의 입에 하나씩 들어갔다.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결혼 전까지 일본에서 살았지만 이들 역시 미소를 직접 담가본 적은 없었다. 결혼 후에는 미소시루(일본식 된장국)보다는 가족들을 위해 된장찌개를 더 많이 끓였다. 이들은 모두 한국인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20년 이상 한국에 정착해 살아온 결혼이주민이다.
장 담그기 모임이 시작된 데는 고야 수요씨의 영향이 컸다. 그는 지난해 처음 재래식 된장을 담갔다. 윗 집 어르신이 가르쳐준 덕분이었다. 된장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결혼 후 여섯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그에게 장 담그기는 ‘관계맺기를 위한 매개체’가 됐다. 모두 발효식품이지만 같은 듯 다른 한국과 일본의 장을 담가 보면서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됐다. 공통점도 알아갔다. 그렇게 ‘옹기종기 장독대 모임’이 결성됐다.
“내가 어쩌다 한국 남자에게 걸려서 정신 차려보니 애가 셋인데 그것은 한국말로 ‘콩깍지가 씌워졌다’고 하지요?” 빻은 백대콩과 소금, 누룩, 귀리를 열심히 섞던 고야 데루미씨가 말했다. 이 말에 고야 수요씨는 “저는 콩깍지가 아직 있어서 애가 여섯인가요. 첫째가 스물 셋인데 막내가 이제 다섯 살이예요”라며 웃었다. 말수가 적은 나이토씨와 미스미씨는 이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미소를 보탰다. ‘도쿄올림픽 한일전에서 어느 나라를 응원했느냐’는 뻔한 질문에도 고야 데루미씨는 재치있게 “친정 편 들면 시댁이 싫어하고, 시댁 편 들면 친정이 싫어하지요?”라고 했다. 현미된장과 귀리된장이 완성되는 동안 공유부엌에는 쉴새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옹기종기 장독대 모임’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달 31일 첫 모임에서 수박껍질을 활용한 장아찌를 만들었다. 당연히 김혜자씨가 비법을 전수했다. 이들은 날이 쌀쌀해지면 고추장도 담글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