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결실과 착한 분배…악명 높은 물가도 악하지 않더라

이대한

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스위스의 외식 물가는 소득 수준이 높은 현지인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로잔에 위치한 올림픽박물관의 카페테리아에서 주문한 지역 특산물인 농어과 생선 페르슈(perche)튀김과 감자튀김 세트 가격이 31프랑, 약 4만원이다.

스위스의 외식 물가는 소득 수준이 높은 현지인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로잔에 위치한 올림픽박물관의 카페테리아에서 주문한 지역 특산물인 농어과 생선 페르슈(perche)튀김과 감자튀김 세트 가격이 31프랑, 약 4만원이다.

#1. 미국으로 떠날 때 본능적인 공포의 대상이 ‘총기’였다면, 스위스행을 결정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물가’였다. (사실 알고 보면 스위스도 총기 보급률이 매우 높다.) 물가가 얼마나 무시무시하면 ‘살인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까.

스위스의 물가는 화폐 액면가의 스케일만으로도 겁을 먹기에 충분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비싼 동전의 액면가는 5프랑이다. 한화로 어림잡아 6000원이 넘는다. (2021년 10월3일 기준, 1프랑=1270원) 가장 저렴한 지폐의 액면가는 10프랑, 한화로 1만3000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놀랍게도 가장 높은 지폐의 액면가는 1000프랑에 달한다. 6000원짜리 동전과 130만원짜리 지폐가 통용되는 나라에서 1년 넘게 살아보니, 물가에 대한 걱정은 반은 현실이 되었고 반은 기우였다. 예컨대 내가 일하는 로잔대학의 구내식당 점심 식사의 가격은 대략 10프랑 내외이다. 한국 대학의 학생 식당에서 먹던 가격보다 두세 배는 더 비싸다. 학교 식당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한 편이다. 학교 앞 햄버거 가게에서 세트 메뉴를 시키려면 거의 20프랑 가까운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딸아이를 공립어린이집에 전일제로 보내려고 알아보니 매달 2000프랑(254만원)을 부담해야 한다는 안내를 보고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스위스행을 결정했을 때 가장 두려웠던 물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이 곳의 생존법은 사람들의 손을 덜 빌리는 것…핵심은 ‘외식 줄이기’
아낀 돈으로는 국경을 넘나들며 여행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가족과 나누는 저녁이 일상인 나라…적게 일해도 결코 곤궁하지 않다

반면 한국이나 이전에 살던 미국 물가와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많았다. 예컨대 나와 아내 두 사람이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하는데 100프랑 정도의 통신비를 부담한다. 장바구니 물가도 생필품을 포함한 공산품의 경우에는 가격이 별 차이가 없고, 농축산품이나 신선식품도 일부 제품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한국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비싼 정도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농축산 상품 중 ‘국산’이 비싸고 좋은 품질로 인정받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스위스 상품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수입한 물건보다 비싸며, 스위스 국기 표시가 포장에 부착되어 원산지가 강조되어 있다.) 빵과 유제품, 와인 등은 오히려 한국보다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특히 레만호수 건너에 있는 프랑스 마을인 에비앙에서 생산되는 에비앙 생수는 다른 생수 제품들과 가격이 비슷해 열심히 마시고 있다.

이처럼 들쭉날쭉한 스위스 물가의 패턴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물가의 차이가 ‘얼마나 스위스 사람들의 손을 탔는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단순한 원리를 금방 파악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비싼 동전인 5프랑

스위스에서 가장 비싼 동전인 5프랑

가장 비싼 지폐인 1000프랑

가장 비싼 지폐인 1000프랑

#2. 반지하 방에서 자취를 하던 대학원생 시절, 하루는 바지락 된장찌개가 너무 먹고 싶어서 직접 해 먹기 위해 장을 보러 갔다가 ‘현타’가 왔다. 바지락, 채소, 두부 등 필요한 재료를 샀더니 1만원이 훌쩍 넘는 것 아닌가. 맛은 있어 다행이었지만 설거지를 하면서 조금 후회는 했던 것 같다. ‘그냥 나가서 사 먹을 걸. 더 저렴한 가격에 남이 해주는 음식을 편하게 먹고 설거지도 안 해도 되었을 텐데.’

나를 허탈하게 했던 바지락 된장찌개 사건은 스위스에서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스위스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이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스위스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8만7950달러로 3만3790달러인 한국에 비해 2.6배에 달한다. 당연히 임금도 높다. 내가 살고 있는 로잔 옆 동네 제네바 칸톤(자치 행정 단위, 미국의 ‘주’에 해당)에서는 지난해에 국민투표를 통해 시간당 23프랑의 법정 최저임금을 도입하기로 했다. (스위스 연방 차원에서는 정해진 최저임금이 없다. 2014년 22프랑의 최저임금 헌법안이 제출되었지만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최저임금 제도를 운용하는 다른 세 칸톤에서도 대략 20프랑 내외의 최저임금을 설정하고 있다.

스위스의 물가가 악명 높은 이유는 아마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스위스 물가를 체험하기 때문일 테다. 여행 중엔 어쩔 수 없이 현지 사람들의 서비스를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외식이다. 끼니를 직접 해결하기 어려운 여행 중에는 자연스럽게 식당을 찾게 된다. 하지만 스위스에서는 소박해 보이는 식당이라도 별생각 없이 음식을 주문했다간 놀라운 숫자가 찍혀 있는 영수증을 받아 들게 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시간당 3만원의 임금을 받는 스위스 노동자가 된장찌개를 끓여주고 설거지까지 해준다면 얼마의 식대가 청구될까?

사실 외식은 스위스 사람들에게도 비싸다. 전식, 본식, 후식을 가장 단출하게 구성하고 와인 한 잔 정도만 즐겨도 보통 1인당 50프랑가량은 지출하게 된다. 조금 더 ‘먹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계산서에 찍히는 숫자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간다. 그렇기에 아무리 소득이 높은 스위스인들이라 할지라도, 외식을 자주 하기에는 재정적 부담이 상당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외식을 절제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너무나도 크다.

#3. 지난 1년 동안 내가 터득한 스위스에서의 경제적 생존법은 스위스 사람들의 손 빌리는 일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대중교통이 아닌 택시나 우버를 이용한 일이 임시 숙소에서 이사할 때 빼고는 한 번도 없다. 이사 온 집에 전등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아 당황했는데, 사람을 부르면 몇백 프랑을 부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이웃 크리스의 도움을 받아 전등을 달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핵심은 외식을 줄이는 일이다.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상 외식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점심도 보통 저녁 식사에서 남은 음식들로 도시락을 싸가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연구실 구성원들 거의 모두가 직접 도시락을 싸 온다. 지난 1년 동안 동료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딱 한 번뿐일 정도다.

게다가 스위스는 이렇게 절약한 돈을 ‘여행’에 쓰기 좋다. 유럽 한가운데에 위치해 주변 나라들로 쉽고 저렴하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 예약하면 제주도에 다녀오는 항공비로 유럽 곳곳을 다닐 수 있다. 게다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주변 국가들의 물가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그곳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외식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외식을 즐기고 스위스로 돌아오면 더욱 외식을 삼가게 된다. 이 돈을 주고 외식을 할 바에야 아껴서 여행을 한 번 더 가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편 외식을 줄이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돈을 아끼는 방법도 있다. 바로 국경을 넘는 것이다. 차가 없는 우리 가족은 쓸 수 없는 옵션이지만, 차가 있는 사람들은 종종 혹은 정기적으로 국경을 넘어 프랑스에서 장을 봐오기도 한다. 우리도 한 번 차를 얻어타고 40분 거리에 있는 국경 너머 프랑스 마을의 카르푸에서 장을 보았는데, 장바구니 물가가 30% 정도는 더 저렴한 것 같았다. 한 지인은 차를 고치는 비용이 스위스에서는 너무 비싸 국경 건너 프랑스 카센터 여러 곳에 견적 요청을 뿌린 후 가장 저렴한 곳에 수리를 맡겼다고도 한다. 국경에 위치한 제네바에서는 아예 프랑스에 살면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많다.

#4. 한국에서 바지락 된장찌개는 해 먹는 것보다 밖에서 사 먹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만, 스위스에서는 간단한 햄버거를 사 먹을 때조차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나라에서 타인의 노동을 빌리는 비용에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 살면서 나는 ‘부국’을 경험하고 있다. 이곳 부자 나라에선 사람은 비싸고 물건은 상대적으로 싸다. 최신 스마트폰의 가격은 스위스나 한국이나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동일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평균 노동시간은 두세 배가 차이 난다. 결과적으로 필수품과 기호품을 구매하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노동의 양이 훨씬 적다.

그래서인지 스위스 사회의 분위기가 한국보다 뭔가 더 여유롭게 느껴진다. ‘워라밸’에서 ‘워크(일)’의 무게가 줄어든 만큼 ‘라이프(삶)’와의 밸런스를 맞추기가 더 쉽기 때문일 테다. 이미 충분한 소득이 있는데 굳이 야근하고 주말 근무를 하며 가족과의 여가를 포기하고 심신을 혹사할 필요가 있을까.

상품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 경제 시스템 속에서 국가별로 상품의 가격은 균등해지지만, 여전히 노동의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경제 주체로서 개인은 국가 내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불평등이라는 이중의 불평등 구조에 놓여 있다. 스위스 안에도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부의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국가 간의 불평등 구조에서 압도적으로 부유한 경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물질적 곤궁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성장과 분배가 모두 중요함을 스위스에서 몸소 체험 중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이 잘 분배될수록 임금이 상승하고, 그만큼 공동체는 노동의 압박에서 해방된다. 알고 보니 스위스의 높은 물가는 성장과 분배의 합작품이었다.

성장, 분배, 물가, 문화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고, 그 성장의 결실이 잘 분배되면 어떤 문화적 변화가 일어날까. 임금이 높아지면 분명 외식 물가도 덩달아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때엔 화려한 한국의 외식 문화도 큰 변화를 맞게 되지 않을까. 바지락 된장찌개를 해 먹는 것보다 사 먹는 것이 훨씬 더 비싸지는 그런 날이 온다면, 분식집에서 김밥과 라볶이를 즐기고, 한밤중에 치킨을 시켜 먹는 일 또한 큰마음을 먹어야만 할 수 있는 값비싼 일이 될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적게 일하고, 가정을 꾸린 대부분의 사람이 가족과 함께 직접 식사를 준비하고 즐기는 그런 저녁이 있는 삶을 거의 매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스위스에서는 이미 현실인 이야기다.



[다른 삶]성장의 결실과 착한 분배…악명 높은 물가도 악하지 않더라

▲이대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3년 동안의 연구를 마친 후, 대서양 건너 스위스 로잔대학에서 초파리를 해부하며 뇌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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