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왕 손바닥’ 논란… 대중문화 속 손바닥 글씨의 다양한 맥락들

칼럼니스트 위근우

응원? 단서? 이심전심? 멋?…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지난 1일 국민의힘 대선 경선 방송 토론회에 참석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왼쪽 손바닥에 王(임금 왕)으로 쓰인 글자가 보인다. MBN 유튜브 캡처

지난 1일 국민의힘 대선 경선 방송 토론회에 참석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왼쪽 손바닥에 王(임금 왕)으로 쓰인 글자가 보인다. MBN 유튜브 캡처

주술인가 아닌가. 최근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유력 후보 중 하나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손바닥에 ‘王(임금 왕)’이란 글씨가 쓰인 게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되었다. 다른 것도 아닌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토론인 만큼, 그 글씨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 것 아니냐는 의혹과 비판이 같은 당에서도 제기되었다. 윤 후보 측은 단지 열성 지지자가 토론에서 자신감 있게 하라며 적어준 문구이며, 임금 왕 글자인지도 몰랐고 손 씻을 때 손가락 위주로 씻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쉽게 이해되는 해명은 아니지만 그의 말대로 손바닥 글씨를 마냥 주술적 바람이나 미신의 발로로 단정할 수는 없다. 손바닥의 글씨는 굉장히 다양한 맥락에서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를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 응원의 의미? - <슬램덩크>의 송태섭과 이한나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들. 만화 <슬램덩크>에서 응원의 의미로 쓰인 ‘No.1 가드’의 한 장면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들. 만화 <슬램덩크>에서 응원의 의미로 쓰인 ‘No.1 가드’의 한 장면

아마도 윤석열 후보 측에서 주장하는 것과 가장 가까운 사례일 것이다. 만화 <슬램덩크> 중 북산은 전국대회 2차전에서 전국 최강 산왕과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특히 언제나 단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뛰는 포인트가드 송태섭은 산왕의 주장이자 공격 전체를 조율하는 이명헌과의 매치업에 버거움을 느낀다. 물론 작품 내에선 산왕 센터 신현철에게 무너진 채치수, 전국 최강 정우성에게 농락당하던(이후 각성해 따라잡지만) 서태웅의 모습이 더 충격적으로 묘사됐지만, 그건 그만큼 송태섭 대 이명헌의 대결은 처음부터 미스 매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감을 잃은 송태섭을 위해 북산 농구부 매니저 이한나는 그의 손바닥에 ‘No.1 가드’라 적어준다. 송태섭이 자신의 장점을 살려 상대편 진영을 멋지게 휘저어주길 바라는 응원과 믿음의 행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송태섭은 실제 ‘No.1 가드’는 아니란 거다. 그는 도내 대회에서도 상양의 김수겸, 해남의 이정환이라는 도내 최강의 괴물들을 상대해야 했고, 심지어 능남의 에이스 윤대협도 포인트가드로 포지션을 변경해 도내에서조차 No.4 가드로 밀려야 했다. 전국 레벨인 이명헌과의 대결을 앞두고 그가 자신의 매치업 상대들에 대해 푸념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윤석열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손바닥에 임금 왕을 써준 지지자에게 있어 TV토론은 얼마나 버겁고 힘겨운 무대로 느껴졌던 걸까. 대선도 아닌 당내 경선에서 그 지지자는 어떤 상대에게서 이정환, 김수겸, 이명헌의 얼굴을 떠올렸던 걸까. 잠시 상상해보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 몰래 공개한 단서? - <골든크로스>의 강주완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들. 단서 제공용으로 사용된 드라마 <골든크로스>의 한 장면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들. 단서 제공용으로 사용된 드라마 <골든크로스>의 한 장면

손바닥에 쓴 글씨는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주먹을 쥔 상태에선 들키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특정 메시지를 몰래 전달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KBS 드라마 <골든크로스>에서 주인공 강도윤(김강우)의 아버지 강주완(이대연)은 자신의 딸을 죽인 서동하(정보석) 측의 협박 때문에 자신이 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다. 극중 서동하가 속한 ‘골든크로스’는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부와 권력을 지닌 집단이기에 주완은 차마 아들이자 검사인 도윤에게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아들의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런 그가 골든크로스에 매수된 교도관의 눈을 피해 진실을 도윤에게 알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손바닥 글씨다. 그는 면회 온 도윤에게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양쪽 손바닥에 각각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골든크로스 멤버 ‘박희서’(김규철)의 이름과 그가 운영하는 거대 로펌 ‘신명’의 이름을 적어 보여준다. 교도관의 감시 때문에 자세하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결백과 배후 세력의 존재를 알리긴 충분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윤석열 후보가 손바닥의 글씨를 카메라에 드러낸 건, 들킨 게 아니라 몰래 시청자들에게 어떤 단서를 전달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임금 왕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지난 정권 국정농단의 주요 인물인 ‘왕실장’ 김기춘인데, 과연 검사였던 윤석열은 어떤 새로운 단서를 제시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범인은 왕씨?

■ 이심전심의 증거? - <삼국지>의 제갈량과 주유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들. 이심전심의 표식으로 쓴 <삼국지>의 한 장면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들. 이심전심의 표식으로 쓴 <삼국지>의 한 장면

손바닥에 글씨, 그것도 한자를 쓰는 모습은 사실 조금도 새로운 장면이 아니다. 중국 역사소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둔 제갈량과 주유가 서로의 손바닥에 ‘火(불 화)’를 적어 화공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확인한 장면은 너무나도 유명한 장면이다. 다만 서로의 생각을 말로 확인하면 될 걸 왜 굳이 손바닥에 글씨를 쓴 뒤 서로 동시에 공개하는 방식을 택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드라마틱함을 살리려는 나관중의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2010년작 드라마 <삼국지>에선 주유와 제갈량 간에 벌어진 신경전의 맥락을 좀 더 강조한다. 즉 제갈량에 뒤지지 않는 자신의 지략을 제갈량에게 증명하면서 또한 자신의 호적수인 제갈량의 책략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기 위해 서로의 계책을 동시에 보여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것을 이번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토론회에 대입하자면, 동일한 주제나 질문에 대해 각각의 후보가 토론 중 은근슬쩍 남의 답변에 묻어가지 못하게 미리 손바닥에 답변을 쓰고 동시에 제시하는 룰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다른 후보들의 손바닥에 쓴 답변을 우리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인지, 다른 후보들이 일부러 답변을 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이 임금 왕이란 글자로 답하려 한 질문은 무엇이었을지 역추적해보는 건 가능할 것이다. 대통령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좋아하는 라면 브랜드는 무엇인가? 개 짖는 소리는 어떻게 들리나?

■ 멋 부리기? -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클라우스 하그리브스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들.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활용된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한 장면

대중문화 텍스트에 등장하는 손바닥 글씨나 기호들.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활용된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한 장면

너무 실용적인 차원으로만 접근하는 건 추리를 경직시킬 수 있다. 단지 멋과 자기표현을 위해서도 손바닥에 글씨를 쓸 수 있다. 당장 손바닥에 자신이 좋아하는 글씨나 기호로 문신을 새긴 이들의 이미지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클라우스 하그리브스(로버트 시핸)는 한 손바닥엔 ‘HELLO’를 다른 손바닥엔 ‘GOOD BYE’라는 문신을 새겨 넣었다. 작품 속 그의 초능력이 망자와 대화하고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라 그의 ‘GOOD BYE’ 문신이 위자보드의 ‘GOOD BYE’ 문구를 뜻한다는 신빙성 있는 가설이 있긴 하지만 문신 자체가 능력 발현과 연결된 것은 아니다. 즉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글씨는 그의 몸 다른 부위들에 새긴 다른 문신이 그러하듯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미적 표현에 가깝다.

슬램덩크 북산 농구부 송태섭
응원과 믿음 바라는 ‘No.1 가드’

드라마 골든크로스의 강주완
결백 위해 몰래 내민 ‘범인 이름’

삼국지 적벽대전 제갈량·주유
맞수 서로의 계책을 확인한 ‘火’

‘엄브렐러 아카데미’ 하그리브스
나를 드러내려 미적 표현 ‘문신’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윤석열이라고 멋으로 손바닥에 글씨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 그는 이미 SBS <집사부일체>에 출연해 힙합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자신을 소개하는 랩을 읊기도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손바닥에 글씨를 써 좀 더 젊은 이미지를 어필한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물론 딱 봐도 클라우스처럼 문신을 한 건 아니지만 이해해야 한다. 문신 새기는 건 아프고 손바닥은 다른 부위보다 훨씬 더 아프다. 그러니 그냥 펜으로 기분만 냈을 수도 있거니와 만약 헤나라면 손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더 적절한 설명도 가능하다. 적어도 코로나19 시국에 손가락 위주로 씻는다는 답변보단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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