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박정희에 팽당하고 사라진 김형욱···DJ측과 접촉했었다

이두리 기자

미 망명 중 ‘한민통’에 전보

“나는 당신들 편” 총회 축하

그 후 2년 뒤 파리서 실종

한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실각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주축으로 하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와 접촉했음을 보여주는 사료가 발굴됐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형욱이 1977년 한민통 4차 회의 개최를 축하하기 위해 보낸 전보와 당시 한민통 사무총장이던 이근팔이 김형욱에게 보낸 자필 서한 등 사료 6점을 13일 최초로 공개했다. 김형욱이 한민통의 ‘반(反)유신’ 목표에 합의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개된 사료에 따르면 김형욱은 1977년 8월 17일 한민통 측에 “KCDU(Kro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Unification, 한민통)의 4차 총회 개최를 축하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나는 항상 당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의 활동이 조만간 큰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믿는다”며 동조와 격려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에 이근팔 당시 한민통 사무총장은 김형욱에게 친필 답장을 보내 “한미관계가 인권문제, 박동선 사건 등으로 오늘날과 같이 악화돼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의 국가 안보 자체가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 염려되오며, 이런 어려운 시기일수록 김선생(김형욱)의 앞으로의 역할이 크게 기대되는 바입니다”라고 전했다. 김형욱의 축전은 당시 한민통이 발간한 교포신문인 ‘한민신보’와 미국 내 교포 민주화 운동가들이 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 ‘희망의 소리’ 방송에 소개됐다.

1977년 8월 17일, 김형욱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측에 보낸 축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1977년 8월 17일, 김형욱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측에 보낸 축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이근팔 당시 한민통 사무총장이 김형욱에게 보낸 자필 편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이근팔 당시 한민통 사무총장이 김형욱에게 보낸 자필 편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5·16 군사정변 주역에서 반정부 인사로

김형욱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해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1963년부터 6년간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며 정권 보위를 위한 악역을 도맡았다. 그러나 1977년 한민통에 보낸 축사는 김형욱의 극적인 태세 전환을 보여준다. 한민통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는 민주화운동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으로, 유신체제 타파와 민주 헌정 질서 회복, 남북통일을 목표로 했다. 장신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과 독재 정치에 대한 비판, 한국 민주화에 대한 신념 등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시기 김형욱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적’에 가까운 사이였다. 김형욱은 1966년 6월4일 “최근 정계 일부 인사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남북교류론은 현 국내외 정세로서는 북괴에 유리한 통일 무드를 조성시키고 반공노선을 실질적으로 변질시키는 결과가 되므로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혁신정당은 일체 허용할 수 없다”는 정부 공식 방침을 밝힐 정도로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에 당시 민중당 대변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의 엄숙하고 절실한 염원인 남북통일에 대해 정부 당국자가 공갈과 탄압의 태도로 나서고 있다”고 김형욱을 규탄했다.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안인 이른바 ‘3선 개헌’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한 달 뒤인 1969년 10월20일,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됐다.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이던 이만섭은 회고록에서 공화당이 3선 개헌의 선행조건으로 김형욱의 해임을 제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국회 내 반대세력을 고문하는 등 폭력적인 권력 남용으로 인해 여론이 나빠졌다는 이유에서였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퇴임 직후인 1969년 10월 2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물러나는 이 마당에 만고의 역적 소리를 듣더라도 양심에 추호의 가책을 받지 않을 정도로 나는 국가와 대통령께 충성을 다 바쳤다”고 말했다.

이후 공화당에 입당한 김형욱은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 활동을 하다가 1972년 10월17일 유신체제가 발효돼 의회가 해산하자 의원직을 상실한다. 그는 유신헌법이 선포된 이후 처음으로 열린 9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입후보했으나 공천에서 탈락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밀려난 것이다.

김충식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1990년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에 대한 동아일보의 연재 기사인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형욱은 71년 대통령선거 때 비밀리에 김대중 후보 선거 자금도 댔다”면서 “자신을 잘라버린 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 그리고 야당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대권주자가 된 김대중씨를 붙잡아야 한다는 계산 등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해석을 달았다.

박정희 정권에서 설 자리를 잃은 김형욱은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1973년 8월 15일 동아일보에는 “8대 때 전국구로 진출했던 그(김형욱)는 10월 유신 이후 테니스로 소일하다가 얼마 전 도미하여 체류 중”이라는 짧은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김형욱의 폭로를 보도한 1977년 6월6일자 뉴욕타임즈 지면. 뉴욕타임즈 제공

박정희 정권에 대한 김형욱의 폭로를 보도한 1977년 6월6일자 뉴욕타임즈 지면. 뉴욕타임즈 제공

■뉴욕타임즈 인터뷰로 박정희와 ‘공개 결별’

김형욱은 1977년부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1977년 6월6일 뉴욕타임즈는 ‘박 대통령의 전 보좌관, 미국의 결정 비난’이라는 제목의 김형욱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는 김형욱을 “박정희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결별한, 가장 저명한 한국 지도자”라고 소개했다. 이 인터뷰에서 김형욱은 “박 대통령은 영구 집권을 위해 주한미군을 철군시키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하야해야 하며 새로운 정부가 선출돼야 한다”며 박정희를 강하게 비판했다. “남한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북한과 대화를 모색해야 하지만, 북한은 박 대통령과 협상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강경한 반공 노선을 고집했던 과거와 달라진 사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형욱이 1977년 6월22일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대해 폭로한 사실은 국가정보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 등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같은 제목의 기사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남산의 부장들> 역시 김형욱을 본뜬 캐릭터인 박용각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청문회는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국 정치인들에게 매년 뇌물을 주어 의회 내부에 박정희 정권에 친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 한 ‘코리아 게이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1977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가 소집한 청문회이다.

청문회에서 김형욱은 “공화당 정권은 처음에는 잘 운영되었으나 3선 개헌으로 파멸을 초래했으며 학원·종교·언론 탄압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는 박정희가 이후락에게 직접 지시한 것이며 박동선 사건(코리아 게이트)은 처음엔 내가 시작했으나 그 후 중앙정보부가 지휘했다”고 증언했다. 청문회 결과 작성된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김형욱은 이 청문회에 참석해 증언하기 전 뉴욕타임즈에 한국 국가정보부의 미국 내 영향력 작전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지휘한 요원들의 인물을 밝혔다. 이에 한국 정부는 김형욱에게 접근해 그를 한국으로 귀국시키거나, 제3국으로 보내거나, 증언을 미루거나, 최소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피해가 가는 증언은 하지 않도록 하는 활동을 펼쳤다”고 적혀 있다.

뉴욕타임즈 인터뷰와 의회 청문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부패에 대해 폭로하고 두 달이 지난 1977년 8월16일, 김형욱은 한민통 사무총장인 이근팔과 만나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그 다음날인 17일에는 한민통 측에 4차 총회 개최를 축하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장 연구원은 “축전을 보내는 건 공식화된 행위이기 때문에 한국의 중앙정보부에서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이는 박정희 정권을 상당히 자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축전 전달 사실은 미국 내 교포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공개됐다. 이근팔은 축전에 대한 화답으로 김형욱에게 보낸 편지에 “선생님의 노선이 우리 운동의 목적인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과 김대중씨의 구출과 여러 면에서 일치됨을 발견하여 매우 힘입은 바 있습니다”라고 썼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할 때의 노선을 180도 틀어 대외적으로 반(反)유신, 친(親)김대중 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국군 보안사령부는 1977년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재일동포 2명을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 등으로 기소하고, 이들의 상부 조직으로 한민통을 지목했다. 이를 계기로 법원은 1978년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김형욱 역시 국내에서 ‘반정부 활동가’로 일컬어졌다. 2010년 진실화해위는 한민통 간첩사건이 수사기관의 강압적인 수사로 조작됐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피의자 김씨는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에 연행돼 장기간 불법 구금상태에서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한민통 소속 재일지도원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등 허위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확인됐다.

■파리에서 사라진 김형욱, 사후 반정부 행위로 기소

1979년 10월7일, 김형욱은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당시 김형욱이 숙박 예약을 했던 호텔 관계자는 “김씨가 5일간 머물겠다고 방을 예약한 다음 외출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파리의 한국대사관은 “김형욱의 한국 여권이 무효화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김씨가 파리에 왔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겠다”고 공식 해명했다. 그러나 2005년 진실화해위는 당시 프랑스 공사였던 이상열이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 등에서 탕진하고 있으며,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중앙정보부 연수생들에게 김형욱 살해를 지시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형욱은 친분이 있었던 이상열 공사의 연락을 받고 혼자 파리로 온 것으로 알려졌다.

1982년 검찰은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적용해 김형욱을 기소했다. 사실상 피고인이 사망한 상태에서 ‘궐석재판(피고인이 불참하는 재판)’이 진행됐고, 김형욱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77년 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김형욱을 겨냥해 제정된 이 법은 일반 형사소송법의 원칙을 배제하고 중죄인에게 궐석재판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유죄 선고에 대한 상소가 불가능하고, 전 재산을 몰수하는 처벌 규정 등도 담고 있다. 김형욱의 부인인 신영순씨는 1990년 이 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했고, 헌법재판소는 1996년 특조법 전부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에 대해 장 연구원은 “미국 망명 시기 김형욱의 활동은 미국 의회 및 박정희 정권과 관련된 것만 알려져 있었는데, 미국에 거점을 둔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력과도 접촉했다는 것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라며 “특히 김대중이 1973년 8월 납치사건 직전에 미국과 일본에서 조직한 한민통과 김형욱의 교류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Today`s HOT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틸라피아로 육수 만드는 브라질 주민들 아르메니아 국경 획정 반대 시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이란 유명 래퍼 사형선고 반대 시위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프랑스로 출발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