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확인할 경우 이를 군 조직에 즉시 보고하라는 지침을 민간인 상담관에게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사건 은폐를 막고 가해자·피해자 분리 등 조치를 신속히 취하겠다는 취지이지만, 자칫 피해자가 알려지길 원치 않는 당사자의 신원과 피해 내용이 소속 부대 등에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우려한 피해자가 상담을 기피해 더욱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24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국방부는 지난해 8월 ‘수사기관 등에 신고 전 피해자 지원제도 시행 지침’을 만들어 전 군에 배포했다. 성추행을 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이예람 공군 중사 사건이 발생한 지 2개월 여 지난 시점이었다. 지침에는 성폭력 사실 인지 시 성폭력 예방·대응 전담조직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내용,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더라도 심리상담과 의료지원 등을 제공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지침에 따르면 민간인인 성고충상담관은 피해자로부터 성폭력 피해 사실을 확인할 경우 피해자가 원치 않더라도 군 양성평등센터(현 성고충예방대응센터)에 즉시 보고해야 한다.
이를 두고 민간인 상담관 제도의 도입 취지에 반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군은 부대 선임이 성폭력 피해 상담을 하던 제도를 개선해 2014년부터 민간인 가운데 전문상담관을 채용했다. 피해자의 신고율을 높이고, 가해자를 군 조직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의무 보고’ 지침대로라면 상담 내용을 군이 모두 파악해 관리하게 된다. 상담관의 독립성은 유명무실해진다.
해군 출신 성추행 피해자 A씨는 “성추행을 신고했다가 수사과정에서 신고 내용이 유출돼 피해를 본 적 있다”며 “상담관에게는 센터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보고가 됐는지 센터에서 수차례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이어 “상담내용이 다 보고된다면 어떻게 편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지난해 상관으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입은 육군 B씨도 “오히려 피해자를 특정하는 수단으로 쓰일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전직 성고충상담관 C씨는 “상담관은 기본적으로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라며 “피해자 의사에 반해 상부에 보고한다면 앞으로는 그 상담관은 찾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담관과 피해자와 신뢰 관계가 틀어지면, 피해자는 심리 조력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의 경우 성폭력 상담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보고나 조사를 진행하지 않는다. 사건이 발생하면 시민인권보호관이나 시민권익담당관이 피해자와 상담한 뒤 피해자가 조사를 원할 경우에 한해 사건을 접수하고 조사 절차를 밟는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 중사 사망 사건 이후 비슷한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든 지침”이라며 “성폭력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수사 개시 전에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라고 밝혔다. 이어 “센터에 상담내용이 보고되더라도 일선 지휘관에게 공유되지는 않는다”며 “피해자들의 불안감은 이해하나 신원이 특정될 우려는 적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