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전 세계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드는 까닭···한국과 달라서?

이대한

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매일 커피나 차를 마시는 연구소 테라스에서 바라본 레만 호수와 알프스 산의 풍경.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선진적인 연구시스템, 과학자들에 대한 후한 처우를 제공하는 스위스의 대학과 연구소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모인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강소국 스위스의 혁신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매일 커피나 차를 마시는 연구소 테라스에서 바라본 레만 호수와 알프스 산의 풍경.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선진적인 연구시스템, 과학자들에 대한 후한 처우를 제공하는 스위스의 대학과 연구소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모인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강소국 스위스의 혁신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1. 초등학생 시절 나는 이원복 작가의 <먼 나라 이웃 나라>에 빠져 지냈다. 스위스는 여섯 권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나라다.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그런 나라들에 둘러싸여 숱한 침략 속에 독립을 지킨 역사에서 한국의 역사가 겹쳐 보였다.

오늘날 주변 강대국들보다 오히려 더 부유한 경제를 만들어낸 과정도 인상 깊었다. 그때는 언젠가 이곳에서 살아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2년 전, 두 번째 박사 후 연구를 위해 스위스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연구뿐만 아니라 ‘강소국’을 실현한 비결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미국에 사는 동안 어떻게 이 나라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천조국’이 되었는지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지만, 인구에서 국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는 스케일이 다른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거울에 한국을 비춰보기에는 위화감이 컸다.

미국에 살면서는 부러움을 별로 느끼지 않았는데, 스위스에서는 이 나라에 대한 질투에 가까운 부러움을 종종 느낀다. 그 질투심의 이면에는 비슷한 조건을 지닌 한국도 충분히 더 좋은 나라, 더 잘사는 나라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경쟁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머지않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지라, 깊이가 얕을지라도 내가 과학자로서 스위스에서 살고 일하면서 느낀 바와, 스위스라는 거울에 비춰본 한국의 연구시스템에 대한 생각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스위스는 강대국의 침략 속에서도
독립을 지켜내고 부유한 경제 일궈
연구실에서 그 이유를 찾아 냈다

외국인도 차별 없는 체계적 지원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수준의 처우
한국과는 다른 수평적 연구실 문화

120년 전 아인슈타인 배출 ‘강소국’
인구당 노벨상 수상 비율 세계 최고
종종 질투와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취리히연방공대와 함께 스위스의 ‘유이한’ 연방공대인 로잔연방공대 캠퍼스. 2개의 연방공대와 필자가 소속된 로잔대학을 포함한 10개의 칸톤대학(우리나라로 따지면 거점국립대학)은 스위스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취리히연방공대와 함께 스위스의 ‘유이한’ 연방공대인 로잔연방공대 캠퍼스. 2개의 연방공대와 필자가 소속된 로잔대학을 포함한 10개의 칸톤대학(우리나라로 따지면 거점국립대학)은 스위스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2. 스위스는 과학기술 강국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작고 척박한 국토에 변변한 천연자원도 없는 이 나라가 전 세계 최고의 부국이 된 비결이다. 세계적 제약회사인 로슈와 노바티스가 스위스에서 탄생했고, 화학, 정밀기계, 식품 등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이 넘쳐난다.

스위스는 제약과 같은 첨단산업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튼튼한 기초과학을 갖고 있다. 스위스는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며, 아인슈타인을 길러낸 취리히연방공대에서만 무려 22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됐다.

스위스가 이러한 과학기술 강국이 된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그 실마리를 우리 연구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우리 연구소에는 스위스인보다 나 같은 비스위스인이 더 많다. 우선 내가 소속된 연구실부터가 그렇다. 지도교수인 리처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이고, 열댓 명이 넘는 연구그룹원 중 스위스인은 테크니션인 릴리안과 스티브 두 명뿐이다. 나머지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미국, 한국, 일본, 인도 등 세계 각지에서 스위스로 건너왔다. 우리 연구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연구소에 십 수명이 합류했는데, 이들 중 스위스 출신은 한 명뿐이었다.

이런 인력 구성 때문인지 미국에서 일할 때는 미국인들이 기피하는 일을 저렴한 임금으로 내가 채우고 있다는 빈정 상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스위스에서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이곳에서는 스위스인들이 우수한 외국 인력이 최대한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지원해주는 느낌이다. 우리 연구소는 행정적이거나 기술적인 일은 최대한 스위스인들이 떠맡고, 핵심 연구 과정은 주로 외국인들이 진행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은 산업계뿐만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는 학부 졸업예정자들이 암묵적으로 고려하는 연구실의 ‘시그널’ 중 하나가 외국인 비중이다. 내국인이 기피하는 연구실이 중국이나 인도 등지에서 온 외국인으로 채워진다는 인식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한국이 내국인 인재들을 대상으로 ‘전국체전’을 하고 있는 동안 스위스는 전 세계의 인재들을 대상으로 ‘올림픽’을 하고 있다. 문화적, 지리적, 경제적 이유로 한국이 스위스처럼 유럽이나 미주의 인재들을 유치하기에는 아직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최소한 아시아의 유망주들에게는 매력적인 환경을 갖추어 ‘전국체전’에서 ‘아시안게임’ 정도의 스케일로 업그레이드해 나가야 한다. 아시아의 끼 많은 청소년들이 K팝 그룹의 아이돌로 성장하여 글로벌 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것처럼, 아시아의 과학 꿈나무들이 한국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열린 연구인력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필자가 일하는 로잔대학 통합유전체학 연구소 로비의 풍경. 거대한 지구본이 매달려 있는 이곳에는 스위스인보다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 과학자들이 더 많으며, 이들이 첨단 연구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필자가 일하는 로잔대학 통합유전체학 연구소 로비의 풍경. 거대한 지구본이 매달려 있는 이곳에는 스위스인보다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 과학자들이 더 많으며, 이들이 첨단 연구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한국을 아시아와 전 세계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언어적 장벽을 낮춰야 한다. 내가 스위스의 연구실에서 빠르게 적응하고 편안하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이유는 언어적 장벽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연구소 바깥을 나가면 언어(프랑스어) 제약으로 인한 불편함이 적지 않지만, 최소한 연구소 내에서는 영어로 모든 의사소통이 해결된다.

국제사회에서 영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서로 다른 모어를 사용하는 화자들이 의사소통하기 위한 ‘공통어(링구아 프랑카)’이다. 나만 하더라도 우리 연구소의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대화할 때도 영어를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에서 최고 연구경쟁력을 갖춘 싱가포르와 홍콩이 모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도 최소한 대학과 연구기관에서는 영어만 사용하더라도 교육과 연구에 어려움이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한국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만큼 매력적인 선택지로 느껴질 수 있도록 획기적인 처우와 비전을 제공해야 한다. 스위스는 입지와 환경 등 매우 매력적인 조건을 갖췄는데 처우까지 훌륭하다. 미국에서는 모아둔 저축을 까먹어야 했지만, 이곳에서는 내 월급만으로 세 식구가 사는 데 어려움이 없다.

연구 수준이 높고 체계적인 지원시스템이 갖춰진 데다 과학자들을 잘 대접해주는 나라이니 자연스럽게 전 세계의 인재들이 스위스로 모이고, 한 번 오면 떠나지 않으려 한다. 실제로 이곳에서 교수, 포닥(박사 후 연구), 대학원생 선발 인터뷰에 모두 참여해보았는데, 미국과 유럽의 명문 대학이나 유명 연구소의 소위 글로벌 ‘톱’급의 인재들이 이곳으로 오고자 한다.

반면 미주나 유럽 국가들과 똑같은 처우를 제공해도 인재를 유인하기 쉽지 않을 한국의 대학과 연구실들은 돈은 적게 주고 일은 더 많이 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해 신설되어 박사 후 연구원을 지원하는 세종과학펠로십은 아예 외국인들의 지원을 막았다. 외국인들의 지원을 장려해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한국의 과학자가 꼭 한국인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외국인이 한국의 과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외국인 인재들이 과감히 한국행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경제적, 문화적, 생활적 지원을 해주고, 학계 바깥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인재들에게도 국내 기업에 취직하거나 직접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을 마련해야 한다. 그 플랫폼을 구축한 스위스는 우리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두 배가 훨씬 넘는 부자나라이면서 여전히 견고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4. 마지막으로 선진적인 ‘연구문화’를 강조하고 싶다. 연구시스템에서 장비와 인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문화’이다. 과학자들은 지도에 없는 길을 내고 미지의 지적 영토를 개척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현대 과학은 골방에서 혼자 무언가를 발견하는 작업이 아니다. 동료 과학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협업해야 한다. 억압적이고 수직적인 문화 속에서는 그런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한국의 수직적인 사회구조는 연구실에서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이는 호칭과 언어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 연구실에서 교수‘님’과 선배‘님’(사수)은 윗사람이다. 반면 미국과 스위스에서 나와 지도교수는 서로를 ‘옆사람’으로 대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친근한 관계이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의견을 나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과학에서만큼은 수평적인 소통이 장려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의견 교환 속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나고, 실수나 착오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불 꺼지지 않는 연구실’ ‘월화수목금금금’ 같은 신화로 상징되는 노동집약적인 연구문화도 벗어나야 한다. 소위 사람을 ‘갈아 넣는’ 방식의 연구는 생산성도 떨어지고 연구자들의 삶도 비참해진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보다는 오래 일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후진적인 연구문화는 외국 인재를 유치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된다.

연구는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의적인 생각은 번아웃된 뇌가 아니라 맑고 생기 넘치는 뇌에서 나온다. 그런 뇌를 만드는 것은 제대로 된 휴식이다. 이곳에선 텅 빈 연구소에서 야근하거나 주말에 출근하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남들은 모두 쉬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만 주어진 시간에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든다.

근무 시간을 줄이면서도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의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선 안 된다. 근무시간이 줄어들면 가용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긴장도가 높아진다. 그만큼 연구의 효율과 집중도가 올라간다. 쉬는 시간도 덩달아 늘어나 두뇌도 더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한국도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에게 주어지는 잡무를 최대한 줄여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뿐만 아니라 충분한 휴가를 보장해주어 창의력이 샘솟는 뇌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한국은 내가 <먼 나라 이웃 나라>를 읽고 또 읽던 그 시절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선진국들과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인들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조선, 철강, 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팬데믹, 기후위기, 인공지능, 미·중 패권전쟁, 우주개발 등 문명의 전환기를 맞닥뜨린 상황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도 높다. 120년 전 아인슈타인을 배출하고, 여전히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강소국 스위스가 한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데 참고가 되는 ‘롤 모델’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재 끝>



[다른 삶]스위스에 전 세계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드는 까닭···한국과 달라서?

▶이대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3년 동안의 연구를 마친 후, 대서양 건너 스위스 로잔대학에서 초파리를 해부하며 뇌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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