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밤새 폭격 맞은 듯 울진 일대 아수라장···“옷만 입고 살기 위해 도망쳐"

글·사진 백승목 기자

뿌연 하늘에 헬기 모습 안 보이고 소리만

매캐한 냄새에 10여분 사이 마스크 그을려

강릉시 옥계면 산불 영상. 강릉시 제공

강릉시 옥계면 산불 영상. 강릉시 제공

5일 울진군 북면 소곡리 마을회관 옆 주택 4~5채가 산불에 전소되면서 무너져 내려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다.

5일 울진군 북면 소곡리 마을회관 옆 주택 4~5채가 산불에 전소되면서 무너져 내려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다.

“뭘 챙길 틈이 없었지. 입은 옷 그대로 도망치기 바빴으니까.”(경북 울진군 북면 사계1리 주민 주훈옥씨)

“목숨 같은 소를 두고 가기는 어딜가. 죽어도 소랑 같이 죽어야지.”(울진군 북면 소곡1리 한우 사육농민 전병호씨)

대형 산불 발생 이틀째인 5일 울진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포항 방면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진 7번 국도변은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이 화마에 할킨 흔적으로 가득했다. 울진읍 소재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하늘은 파란색에서 짙은 회색으로 바뀌었다.

전방 40~50m만 벗어나도 보이는 게 없었다. 산불진화 헬기가 한울원전에서 수도권까지 연결한 송전선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며 연신 물을 퍼부었다. 헬기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그저 ‘두두두’ 하는 엔진소음만 연기 사이로 들려올 뿐이었다.

7번 국도에서 최초 발화지점인 울진군 북면으로 가는 왕복 2차선의 917번 지방도로 주변에서는 마스크를 써도 여전히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하얀 마스크는 불과 10~20분 만에 시커멓게 그을렸다.

5일 울진군 북면 소곡리 한 농가가 산불에 타면서 보관해 둔 트럭과 농기계까지 시커멓게 그을렸다.

5일 울진군 북면 소곡리 한 농가가 산불에 타면서 보관해 둔 트럭과 농기계까지 시커멓게 그을렸다.

북면 소곡리는 폐허였다. 소곡1리 마을회관 옆 주택 4~5채는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기둥과 지붕이 폭싹 내려앉았고, 검게 그을린 채 나뒹구는 장독 몇개가 이 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게 할 뿐이었다.

한 70대 주민은 “아휴~ 말도 마. 생각도 하기 싫어. 전쟁터가 따로 없지. 완전 지옥같은 분위기잖아”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도망가기도 어려웠어. 북쪽 삼척 방향으로는 국도가 차단됐다고 하지. 남쪽 포항 방면으로도 화염이 치솟는데, 그저 이러다 연기 속에 질식사하는건 아닌가 엄청 겁이 났어”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을회관에서 약 1㎞ 내륙 방향으로 떨어진 도로변 한우농가. 축산농민 전병호씨(80)는 “소가 살아남은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힘겹게 말했다. 그는 “군청과 면사무소에서 빨리 대피하라는데, 저 어린 송아지와 내 생살 같은 소를 두고 가기는 어딜가겠어”라며 “밤을 꼬박 지새웠어. 주변에 보이는 물은 모두 퍼다 축사에 뿌리기 바빴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입은 점퍼와 바지는 말할 것도 없고, 얼굴과 머리카락도 온통 그으름과 진흙으로 가득했다. 날이 밝은 뒤 이웃들이 찾아와 “형님요~ 괜찮습니까”라며 서로 간밤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울진군 북면 소곡리 축산농민과 이웃들이 5일 축사에 사육중인 송아지와 한우의 안전과 건강상태를 점검하며 서로 격려하고 있다.

울진군 북면 소곡리 축산농민과 이웃들이 5일 축사에 사육중인 송아지와 한우의 안전과 건강상태를 점검하며 서로 격려하고 있다.

소곡리에서 600~700m 떨어진 북면 주인리의 상황도 다를 바 없었다. 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부는 어렵게 구한 물통에 물을 담아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 담벼락에 뿌렸다. 남편은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혼자 이 집에 사셨다. 산불이 워낙 거세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보다시피 남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불에 세간살이 하나 남을 것 없이 몽땅 타버린 옆집에는 대구에서 온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집주인의 아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옥상태를 둘러봤다. 이 남성은 “양친 어른께서 이 집에서 사셨다. 시골인 만큼 대부분 연로하신 분들이 많아 산불 소식을 듣고 몹시 불안했다”고 말했다.

소곡리와 주인리에서는 이날 오전까지도 유선전화는 불통 상태였다. 통신회사 직원들은 도로가에 새 케이블을 쌓아놓고 통신선 임시복구에 한창이었다. 그 사이로 ‘경기소방’ ‘전남소방’이라고 쓰인 소방차량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산기슭에 아직 타고 있는 잔불을 진화했다.

5일 울진군 북면 주인리에서 한 부부가 산불로 전소된 뒤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옥 주변에 물을 뿌리고 있다.

5일 울진군 북면 주인리에서 한 부부가 산불로 전소된 뒤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옥 주변에 물을 뿌리고 있다.

국내 최대 송이버섯 생산지도 화재 큰 타격
원전, 20여년 만에 또 산불에 위협 받아

산악지대 임산물도 큰 타격을 받았다. 한 60대 주민은 “산불때문에 버섯재배가 또 힘들어졌다. 복구하는 데 수십년이 걸릴텐데 정말 큰 일이다”고 걱정했다. 울진은 전체 행정면적의 90%가 산이고,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국내 최대 송이버섯 생산지이다.

소나무가 많은 산림특성은 산불진화를 더욱 더디게 했다. 가뜩이나 오랜 가뭄에 잔뜩 마른 나뭇잎이 바닥에 두껍게 깔린데다, 소나무 송진액 때문에 불이 쉽게 꺼지지 않았고 이미 꺼진 불도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한울원전 1~6호기가 가동 중인 울진군 북면 부구리 주민들은 산불에 의한 원전사고를 크게 우려했지만, 다행히 별 문제는 없었다. 천모씨(58·부구리)는 “20여년 전 악몽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고 했다.

한울원전은 2000년 강원 동해·삼척 산불이 울진으로 남하해 원전 인근 산림을 위협하면서 방어에 초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또다른 주민은 “그때 보다 이번에 더 위험했다”면서 “20여년 전에는 산불이 직접 원전 쪽까지 확산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불씨가 원전 울타리 내부까지 튀었다”고 말했다.

이재민 대피소로 지정된 울진읍내 울진국민체육센터 2층에서는 대부분 70대 중반부터 90대 고령의 주민들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5일 울진군 울진국민체육센터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산불 피해주민들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 산불이 조속히 진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5일 울진군 울진국민체육센터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산불 피해주민들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 산불이 조속히 진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재민 대피소에 대부분 70~90대 주민들
“뭘 챙길 틈도 없었어” “몸 안 상해 다행”

전연옥 할머니(88·북면 사계1리)는 “빨리 대피하라는데 뭘 챙길 틈도 없었지. 지금 입고 있는 분홍색 조끼와 바지가 전부”라고 말했다. 이어 “10여년 전에 울산에 사는 아들이 조립식 새집을 지어줬는데, 이번에 불에 많이 탔다”고 안타까워 했다.

옆에 있던 주훈옥 할머니(89)는 “어제 저녁 7시쯤에 저녁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도망쳤지. 그나마 이장이 차를 가지고 와서 ‘빨리 나가셔야 한다’고 해서 몸은 상하지 않아 다행일 뿐”이라고 말했다. 사계1리 이장 조수남씨는 “아내와 함께 주변 어르신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면서 “어르신들이 잘 협조해 주셔서 참 감사하다”고 했다.

대피소에서는 이날 점심 무렵 약 50여명이 모여 있었지만, 밤이 되면 더 많은 주민들이 모여들 것으로 내다봤다. 이재민 식사제공을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밥차’도 체육센터 입구에 들어섰다.

5일 이재민 대피소로 지정된 울진국민센터 앞에 자원봉사자들이 이재민들에게 제공할 밥차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5일 이재민 대피소로 지정된 울진국민센터 앞에 자원봉사자들이 이재민들에게 제공할 밥차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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