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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넓게 덮인 산···울진 산불 피해 현장을 가다

유경선 기자
역대 최대 규모의 피해를 낸 울진 산불 이후의 모습. 22일 울진군 북면 일대의 산이 얼룩덜룩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소되어 까맣게 탄 부분, 나무가 누렇게 말라 죽어가고 있는 부분, 살아남은 나무가 푸른 빛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들이 보인다./ 한수빈 기자

역대 최대 규모의 피해를 낸 울진 산불 이후의 모습. 22일 울진군 북면 일대의 산이 얼룩덜룩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소되어 까맣게 탄 부분, 나무가 누렇게 말라 죽어가고 있는 부분, 살아남은 나무가 푸른 빛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들이 보인다./ 한수빈 기자

국내에서 발생한 역대 산불 중 가장 피해가 컸던 울진 산불이 잡힌 지 23일로 열흘이 지났다. 불은 꺼졌지만 울진의 숲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다. 산불이 아니었으면 새 움이 트고 있을 3월 울진의 산은 죽음으로 넓게 덮여 있었다. 열흘간 총 2만923㏊를 할퀸 울진 산불 피해 현장을 지난 22일 찾았다.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지켜낸 금강송 군락지의 속살도 들여다봤다.

울진은 소나무 자생지다. 푸르러야 할 3월의 침엽수림은 지금 검정·누렁·초록의 삼색을 띠고 있다. 꼭대기까지 모두 타버린 나무들은 검었고, 겨우 불길을 피한 나무는 초록빛을 띠었다. 나머지 수목들은 언뜻 보면 가을숲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누랬다. ‘지표화’(지표에 있는 잡초, 관목, 낙엽 등을 태우는 산불)로 피해를 입은 나무들이다.

산불은 낙엽을 땔감삼아 바닥을 타고 번지거나, 거센 바람을 만나면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 수관화(나뭇가지와 잎을 태우는 불)를 일으킨다. 바닥을 따라 움직이는 불길은 나무의 밑둥을 태운다. 밑둥에 화상을 입은 나무들은 서서히 죽어간다. 나무껍데기 표피층 아래 얇은 생장세포 형성층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물과 양분을 빨아올리는 뿌리가 죽으니 나무는 점점 말라간다. 그렇게 소나무들의 잎이 누래진다. 눈길이 닿는 산마다 세 가지 색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얼룩덜룩했다.

이렇게 누런 나무들이 날이 지날수록 늘어나고 있다. 현장에 동행한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박사는 “이날이 세 번째 현장조사인데 일주일 전보다 누런 면적이 확연히 넓어졌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 박사는 “나무가 누래지는 갈변 현상은 산불 3~5일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고, 10~15일 이후부터는 나무 고사가 진행된다”면서 “현재 초록빛인 나무들도 면역이 너무 떨어진 상태라, 봄·여름에 가뭄이나 병충해 스트레스가 심하면 결국 쓰러지게 된다”고 말했다.

울진 산불 피해지역인 경북 울진군 산불 조심 표지판이 22일 검게 그을려있다. /한수빈 기자

울진 산불 피해지역인 경북 울진군 산불 조심 표지판이 22일 검게 그을려있다. /한수빈 기자

■2000년 4월 동해안 산불이 지나간 숲, 22년 동안 회복하고 또 전소

산불이 남긴 참담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 곳은 울진군 북면의 도화동산이다. 2000년 4월 동해안 산불을 계기로 만들어진 곳이다. 2000년 4월 산불은 이번 울진 산불 이전까지 역대 가장 큰 산불이었다. 울진군은 민·관·군이 사투를 벌여 산불을 잡은 일을 기념한다는 의미로 2002년 이곳을 백일홍 동산으로 조성했다. 그런데 도화동산 일대의 숲이 22년 만에 다시 모두 타버렸다. 도화동산부터 검성리, 부구리, 덕구리, 소광리를 따라 움직이는 내내 피해지가 눈에 들어왔다.

도화동산 근처 북면 나곡리에는 소나무·전나무·이팝나무 등으로 조림된 숲이 있다. 오와 열을 맞춰 만들어진 숲이 모두 탔다. 수관화가 휩쓸고 지나간 검은 산이다. 불이 꺼진 이후로도 비가 두어 차례 내렸지만 탄 냄새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매캐한 냄새가 마스크 안까지 파고들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재가 폴폴 피어올랐다. 나무줄기에 손을 댔다 떼니 새까만 재가 묻어났다. 허 박사는 “일주일 전보다 타는 냄새가 많이 빠진 것”이라고 했다.

임도에서 자라나던 지피식물은 잿더미를 뚫고 싹을 틔운 상태였다. 땅굴 동물들이 흙을 판 흔적, 고라니가 딛고 지나간 발자국이 보였다. 활엽수 몇 그루가 나무 끝에 겨울눈을 매달고 있었지만 이게 새싹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고 허 박사는 말했다. “잎이 타버린 침엽수는 이중고를 겪는다”고도 했다. 침엽수는 사철 잎을 통해 엽록소를 생산하는데, 이 활동이 멈추면 살아날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진다는 것이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생태계가 얼마나 회복될지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추적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울진 산불 이후 22일 경북 울진군 도화동산에 잿더미 위로 고라니 발자국이 찍혀 있다. /한수빈 기자

울진 산불 이후 22일 경북 울진군 도화동산에 잿더미 위로 고라니 발자국이 찍혀 있다. /한수빈 기자

■200년 금강송 8만 그루 자라는 보호구역에도 불똥…“겨울가뭄이 보호자원 태웠다”

울진 산불은 규모도 컸지만 피해 내역도 전대미문이었다.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에까지 불똥이 튀었다.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일대는 1680년 조선시대 숙종 때부터 보호되던 금강송 원시림이다. 황장목(금강송)을 보호하는 ‘황장봉산 제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지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국가가 보호한 역사가 400년에 가까운 곳이다.

임도를 따라 보호구역 안으로 진입했다. 허가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보호구역 초입부터 산의 지표가 남김없이 그을려 있었다. 누렇게 죽어가는 소나무들도 눈에 띄었다. 통신 신호도 닿지 않는 보호림 깊은 곳에까지 화마의 흔적은 뚜렷했다.

이번 울진 화재를 피해간 22일 경북 울진군 금강송 일대의 모습 /한수빈 기자

이번 울진 화재를 피해간 22일 경북 울진군 금강송 일대의 모습 /한수빈 기자

산이 깊어질수록 숲은 원시 상태에 가까운 자연림의 모습을 했다. 단일 수종으로 조성된 숲이 아닌, 여러 수종이 조화롭게 섞여 자라는 숲이다. 허 박사는 “굴참나무·서어나무·생강나무 등 활엽수가 섞여 자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숲 구성이 산불 피해를 막아낸 요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소나무만 있는 숲은 송진이 땔감이 되면서 산불 기폭제가 되거든요. 독일에서도 침엽수림을 조성할 때, 활엽수를 섞은 숲이 건강한 숲이라는 기조로 조림 패러다임을 전환했어요.” 서 전문위원도 활엽수가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는 데 동의했다. “굴참나무와 상수리나무는 낙엽이 길쭉한 모양이라 바닥에 붙어있지 않고 경사를 따라 밑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나무 아래 낙엽이 없고 흙만 남아 있으니 지표화가 더 진행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죠.”

고개를 넘어 반대쪽 골짜기로 갔다. ‘500년 소나무’와 600살이 넘은 ‘대왕소나무’ 등 보호수들이 있는 곳이다. 이 군락지는 다행히 불길을 피했다. 국립소광리산림생태관리센터 직원들이 임도를 저지선으로 삼아 사투를 벌였다. 2013년 문을 연 센터는 소광리 일대 3705㏊의 보호림을 관리하고 있다. 천동수 주무관은 “200년 된 금강송이 8만5000그루 자라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피해 면적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울진이 고향인 천 주무관은 “이런 겨울 가뭄은 처음이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3개월 내내 강수량이 0㎜에 가까웠다. 지난 18~20일에는 40㎝가 넘는 눈이 내렸다. 진작 왔어야 할 야속한 눈이었다. 천 주무관은 “예전에는 12월부터 눈이 계속 쌓여 있던 곳”이라며 “이번 겨울에는 계곡수가 다 마를 정도로 가물었다”고 했다. 그는 산불이 소광리 쪽으로 향해 오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응봉산 꼭대기에서 불이 번져오는 걸 보는데, 화선이 한 10㎞ 되더라고요. 이틀이면 넘어오겠다 싶었어요. 배낭에 있던 빵과 물을 꺼내놓고 ‘제발 비 좀 오게 해달라’고 절을 올렸습니다. 야속하게도 해만 쨍쨍하더라고요.”

■복원에는 정답 없다…“민가는 응급복구, 나머지 지역은 자연복원 검토해야”

전문가들은 복원에 정답은 없다고 말한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숲은 화재에 취약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렇다고 자연 복구에만 기댈 수도 없다. 특히 민가와 인접한 곳은 나무뿌리가 죽으며 놓아버린 흙이 산비탈을 타고 흘러내릴 위험이 크다.

허 박사는 “죽은 나무를 빨리 손보지 않으면 뿌리째 뽑혀 쓰러지는 도복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서 전문위원은 “피해면적이 2만㏊가 넘는데 죽은 나무를 베어내는 것도 어마어마한 작업”이라며 “마을과 가까운 곳은 응급복구를 하되, 나머지 지역은 인위적으로 복구를 할 것인지 자연 복구를 기다릴 것인지 토론을 통해 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금강송 보호구역이 준 시사점도 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은 인공조림지보다 나무 사이 간격이 충분하고 활엽수와 침엽수가 섞인 덕에 불이 속수무책으로 번지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허 박사는 “인공 조림지는 산불 앞에 도미노처럼 넘어갔지만 자연림에서는 본연의 회복력이 조금씩 관찰되고 있다”며 “응급복구가 필요하지 않은 곳은 자연이 스스로 회복할 시간을 주면 10~20년 뒤에는 숲이 형성된다”고 말했다. 한국산림과학회는 오는 25일 숲 복원방향을 놓고 심포지엄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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