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47년 만에 무죄…달라진 건 많지 않다

전현진 기자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

EP.01 재일동포 이동석, 그리고 사법부의 시간

EP.02 47년 만에 무죄…달라진 건 많지 않다

EP.03 1972년의 고문 당한 진술 믿을 수 있다는 2022년의 법원

[국가폭력 224건] EP.02 47년 만에 무죄…달라진 건 많지 않다

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법정에 들어선 노인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평생 동안 꼭 듣고 싶었던 말을 이날 들을 수 있을까. 노인은 목에 깁스를 하고 있어 더 불편해보였다. 하얀 눈썹 밑으로 작게 보이는 눈은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이 어떨지도 알 수 없었다.

휠체어를 탄 노인은 유정식씨다. 지난달 7일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에서 유정식씨에 대한 재심 선고기일이 열렸다. 이날 선고는 원래 6월 진행될 예정이었다. 유정식씨는 예정된 선고를 며칠 앞두고 새벽에 화장실에 가다 넘어졌다. 후경추에 나사 6개를 박아 넣는 척추 골절 수술을 하고 입원해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교도소에서 23년 동안 살았던 이 남자. 1975년 처음 법정에 선 그는 건강한 39세 청년이었지만, 이제는 휠체어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82세 노인이 됐다.

앞선 재판들이 마무리되고 유정식씨의 차례가 됐다. 사건번호를 부르자 변호인들이 앞장섰다. 유정식씨도 누군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자리를 잡았다. 재판장이 변호인에게 보청기를 착용했는지 묻더니 ‘소리가 안 들리시면 옆에서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선고 요지를 읽어내려갔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고, 이를 배제하면 유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그를 23년 동안 감옥에 가둔 47년 전의 판결이 뒤집혔다. 달라진 건 시간 뿐이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증거능력이 없어서 배제한대요.”

한참 요지를 듣던 신윤경 변호사(법무법인 동화)가 말 없이 앉아있는 유정식씨의 귀에 대고 설명해줬다. 어려운 법률용어를 설명하는 모습이 곤란해 보였다.

“내가요?”

유정식씨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못 알아 듣는 듯 했다. 그러다 ‘무죄’라는 설명까지 듣고는 “아이구 감사합니다”하고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재판장은 선고를 마친 뒤 “과거의 명예가 뒤늦게 회복돼 앞으로 걸어갈 삶에 유익이 되고 위로가 되길 소망한다”고 했다. 유정식씨는 무죄 선고에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재판장의 말은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함께 방청 온 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들도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서로를 돕고 위로하는 모임에서 만난 인연으로 법정까지 함께 왔다. 유정식씨는 법정을 빠져나오면서 감격한 듯 손을 흔들었다. 휠체어 위에 앉은 그의 눈은 작지만 또렷하게 떠있었다.

유정식씨(가운데)가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법정을 나와 함께 온 일행들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유정식씨(가운데)가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법정을 나와 함께 온 일행들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일본 대학원 유학 뒤 사업…탄탄대로 생각하던 그때 찾아 온 ‘손님’

이날 선고된 무죄 판결은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확정됐다. 47년만에 벗겨진 누명. 행복한 결론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이 남긴 상처는 깊었다. 그의 몸은 물론 마음도 약해졌다. 원래는 약하지 않았다. 1960년대 말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 사업을 펼치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유정식씨는 1940년 일본에서 태어난 뒤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산원예고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1961년 건국대 축산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1967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직후 축산기술 연수생 자격으로 일본에 가게 됐다. 닭가공 처리기술을 연수한 뒤 이듬해에는 도쿄대 농학부 대학원 생물학과에 진학해 농업경영학을 공부했다.

고학력자가 드문 시절, 대학을 나와 일본 유학까지 떠난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유학 도중 결혼을 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도 구했다. 4년 여 간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사업을 벌였다. 유리 겉면에 그림을 새기는 ‘에칭 글라스’를 일본에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서울 명동의 코스모스백화점과 부산 광복동 부산백화점에 매장을 냈다. 상품을 전시하면서 본격적인 사업을 벌이기 시작한 지 4개월쯤 지났을 때 그들이 왔다.

1975년 2월 상품 상담을 하고 싶다는 두 사람이 찾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섰지만 그들은 손님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의 양팔을 잡고 끌고 나갔다.

“소리 지르면 창피 당할 거야.”

1층으로 끌려나가자 국방색 ‘지프차’가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차 안으로 밀어넣어 뒷좌석 가운데 앉혔다. 상의를 벗겨 얼굴에 씌워놓는 바람에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린 뒤 알 수 없는 건물의 지하로 끌려갔다. 햇빛은 들지 않고 전등만 초라하게 비추는 곳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마침내 어떤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여보내진 뒤 그들은 군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 옷을 입어야 쉽게 때릴 수 있다는 듯.

그 후로 이어진 건 무차별적인 폭행이었다. 주먹과 발, 몽둥이로 머리와 가슴, 옆구리 할 것 없이 맞았다. 밤낮 구분도 안 되는 공간에서 영원처럼 시간 감각 없이 맞았다. 비명소리를 지르다 쓰러지면 오금에 각목을 끼워 꿇어 앉히고 발로 밟았다.

“이 새끼야. 너 여기가 어딘지 알어?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리는 곳이야!”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었다.

그들은 북한에 몇 번을 갔다왔냐고 물었다. “김달남을 어떻게 아냐”고도 했다. 김달남씨는 일본에서 연수 생활 중 2~3차례 만난 재일교포였다. 김달남씨가 한국에 유학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 아는 교수님을 소개해 준 것이 전부였다. 김달남씨와는 그 후로 만난 적이 없었고 소식도 주고 받지 않았다. 그 사이 김달남씨가 재일교포 간첩으로 몰려 수사를 받았던 것이다.

수사관들은 믿지 않았다. 고문은 계속됐다. 수사관들은 서로 바꿔가며 때렸다. 얻어맞고 기절한 게 두 번 기억나는데,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상태로 기절했다. 의식을 조금 찾아 눈을 뜨니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있었다. 그제서야 폭행이 줄었다.

폭언을 들어가며 조사가 계속됐다. 수사관들은 프린트된 종이를 주고는 “읽은 뒤 이와 똑같이 자술서를 쓰라”고 시켰다. 수사관의 지휘와 조언을 받으며 자술써를 썼는데 순간 공포심이 일어나 머뭇거리면 다시 맞았다. 잠을 재우지 않아 제 정신이 아니었다. 식사도 몇 번 한 적이 없었다. 물도 제대로 못 마셨다. 화장실 한 번 가기 힘들었다. 화장실에 갈 때면 수사관 2명이 동행했다. 화장실 옆에 있던 물탱크를 가리키며 ‘저게 뭐 하는 건지 알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당한다’고 협박했다. 물고문을 하겠다는 얘기다.

1975년 4월1일 경향신문 7면에 보도된 유정식씨(맨 위)의 검거 보도. ‘학원·정계 침투 간첩 사건’으로 당시 알려졌다.

1975년 4월1일 경향신문 7면에 보도된 유정식씨(맨 위)의 검거 보도. ‘학원·정계 침투 간첩 사건’으로 당시 알려졌다.

■고문·불법체포 묻지 않은 판사들

고문 끝에 그는 자신이 간첩이라고 자백했다. 공작원에 포섭돼 북한에도 다녀왔고, 공작금을 받았으며 간첩 활동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것이라고 했다. 연수 시절 한국 음식을 해준 교포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조총련 관계자들과의 접선이었고, 금품을 수수한 불온한 활동이 됐다. 북한에 다녀온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술서에 그렇게 썼다.

허위 자술서를 쓰는 시간이 오히려 위안이 됐다. 자신을 재판에 서게 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내놓을지 알 수 없는 이 자술서. 상상력을 동원해 글을 쓰는 순간만은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검찰에서도 겁에 질린 상태로 있었다.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관들은 ‘법정에서도 그대로 시인하면 징역을 조금 받고 나오니 절대 부인하지 말라’며 훈수를 뒀다. 재판 심리 전 뒷자리에서 누군가 옆구리를 찔렀다. 법정까지 따라온 수사관이었다.

“재판 중에 딴소리하면 또 끌려갈 테니 절대로 헛소리 하지마.”

그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습관이 생겼다. 지난 재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울부짖는 듯 했다. 협박을 당하니 진실을 말할 마지막 용기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겁에 질려 제 정신이 아닌 듯 판사나 검사가 질문을 할 때면 그저 “예” 하고 넘어갔다. 판사는 그가 불법적으로 체포된 건 아닌지, 고문을 당한 건 아닌지 따져 묻지 않았다. 판사들은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그가 간첩이라는 것도 확정됐다.

교도소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독방을 전전했다. 눈을 뜨면 벽만 보였고, 쥐구멍 같은 곳으로 넣어주는 배식으로 연명했다. 밤에 누워 잠이 들면 몸이 땅속에 가라 앉는 기분이 들며 가슴이 조여왔다. 숨이 멈추는 공포를 경험하기도 했다. 겨우 병원진료를 보고 약을 먹을 수 있었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10년 쯤 지났을 때였다. 그 무렵 시골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감옥에서 전해들었다.

허리나 무릎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고문 직후 어금니 2개가 깨졌고 교도소에 수감 중에 4개가 더 깨졌다. 글자도 안보였다. 이명이 들렸다. 귀에서 윙-하고 바람소리가 심하게 나 마주보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하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졸도해 쓰러지기도 했다. (출소한 뒤에도 지하철이나 시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기절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1998년 3월 가석방 돼 출소했다. 23년 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였다. 1심 재판 중 이혼 당해 자녀들과도 떨어져 지금껏 만나지 못했다. 투옥 중 아버지와 형님, 형수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이나 친구 모두 연락이 끊겼다.

■몸과 마음에 남은 깊은 생채기

2005~2006년 이용훈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겠다며 과거 간첩 조작 사건 등을 다룬 판결문 6000여건을 검토해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건 224건을 선별했다.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 제대로 따져보기 위해 대법원 소속 판사가 1차 선별한 문제적 판결들인 셈이다. 유정식씨에게 사형·무기징역을 선고한 사건번호는 62번째에서 찾을 수 있었다. 224건에 본인이 사건이 포함돼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2006년 즈음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 못 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유정식씨는 10여년 전 어떻게 살았는지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 뒤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 무렵 대학 후배의 소개를 어렵게 받아 잠시 공장에서 일을 했었지만 이내 그만두게 됐다고 했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재심을 청구한 건 시간이 한참 흐른 2020년 1월이었다. 출소 후 오랜 시간 동안 재심을 청구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같은 답이 나왔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2005~2006년은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한 기간이었다. 진화위 조사 결과는 재심 사유로 삼을 수 있어 많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문을 두드렸다. 유정식씨는 “분명하진 않지만 그 무렵 인권변호사라는 분에게서 재심을 받아보겠냐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당시 제안을 거절했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같은 이유였다.

유정식씨가 재심 선고 이후 그동안 지내온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유정식씨가 재심 선고 이후 그동안 지내온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대법원에서 자신의 사건에 문제가 있었는지 검토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는 그런 가정법을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고문과 억울한 옥살이는 그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냈고, 옥살이 이후의 시간들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뿐이다.

재심을 청구하기로 한 건 다른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과 만나면서다.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서로 비슷한 상황을 겪어 구구절절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해줬다고 했다. 동료이자 친구들이 준 용기가 그를 재심 청구로 이끌었다. 재심은 2021년 10월 개시됐다. 재심 개시 후 선고 전까지 재판은 두 차례 열렸다. 두 번의 재판으로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혐의가 모두 허구였음이 밝혀졌다. 무죄를 선고한 그날은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차라리 너무 허무해 보였다.

선고 당일 재판에 함께 온 이들이 유정식씨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며 그의 인사를 담았다. 유정식씨는 휠체어에 앉아 아직 잊지 못한 일본어로 이야기했다. 일본에 있는 오카우치 요시에씨는 유정식씨를 위한 구원회 활동을 일본에서 벌였다. 구원회는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이들을 위해 일본에서 모인 후원 모임이다. 유정식씨에게 구원회 활동을 한 이들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이야기하지 못했다. “삶의 기반이 무너졌거든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야 해서 누군가에게 다시 연락하기 미안스러우니까….”

유정식씨는 몸이 편치 않다며 인터뷰를 위한 만남이 어렵다고 했다. 그는 지난 8일 척추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뒤 다른 병원을 알아본다고 했다. 그는 전립선 질환과 척추 골절 등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과 퇴원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억울한 누명을 벗어냈지만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3년의 옥살이로 몸은 여전히 무너진 상태다. 그저 마음의 짐만 조금 덜었을 뿐이다.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 코끼리’는 짧은 기사에 충분히 담을 수 없는 사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장문의 디지털 기사로 전하는 경향신문 뉴콘텐츠팀의 스토리텔링 롱폼 콘텐츠입니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