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두글자가 불편한가요? 교육과정에서 노동 ‘통편집’한 정부

조해람 기자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실. 연합뉴스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실. 연합뉴스

정부가 지난 30일 발표한 새 교육과정에서 지난 정부 때 교육목표에 반영하는 쪽으로 논의되던 ‘노동’ 관련 내용이 통째로 빠져 논란이 일고 있다. 교육과정 시안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는 아예 사라졌고, 노동 관련 내용도 고교 과정 교육목표의 일부 항목으로 축소됐다.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 기조’가 교육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새 교육과정은 2017년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2024년 초등학교 1~2학년부터 먼저 적용하고, 이듬해인 2025년부터 중·고등학교에 적용된다.

교육부가 공개한 60장 분량의 시안을 보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직업계고 교과과목 ‘노동인권과 산업안전보건’에만 등장한다. 노동관련 내용은 ‘학교급별 교육목표’의 고교 교육 목표에 “성숙한 자아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일의 가치를 이해”라는 항목 1개에 그쳤다. 반영을 검토하기로 했던 ‘생태교육’도 교육목표에서 사라졌다.

교육부가 지난해 11월24일 발표한 ‘2022년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 중 발췌.

교육부가 지난해 11월24일 발표한 ‘2022년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 중 발췌.

지난 30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의 교육목표 중 고등학교 교육목표 내용. “성숙한 자아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일의 가치를 이해한다”는 내용은 교육목표 중 그나마 노동과 관련된 내용이 명시된 유일한 항목이다.

지난 30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의 교육목표 중 고등학교 교육목표 내용. “성숙한 자아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일의 가치를 이해한다”는 내용은 교육목표 중 그나마 노동과 관련된 내용이 명시된 유일한 항목이다.

교육부는 지난 정부 때인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일과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교육목표 개정 주요과제로 삼아 비중있게 반영하는 것을 검토했다. 당시 교육부가 직접 발표한 ‘2022년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의 주요 과제 첫 번째 항목인 ‘미래 사회에 대응하는 교육과정 혁신’에 포함돼 있었다. 교육목표에 노동교육을 포함하는 것은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건의해 국가교육위원회, 교원·시민단체의 의견 수렴 등을 거쳤다. 유은혜 당시 교육부 장관은 그해 10월 국회 교육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내실 있는 학교노동인권교육 지원 계획을 수립하고, 교과에서 노동인권교육이 체계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내용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14일 서울 동대문구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6월14일 서울 동대문구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교육계와 시민단체들은 그간 진행된 논의가 아무 설명 없이 뒤집혔다며 반발했다. 특히 노동 관련 내용은 물론 단어 사용조차 꺼려하는 새 정부의 반노동 기조가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이날 성명을 내 “대부분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인데도 한국의 교육과정에선 지금까지 ‘노동교육’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이에 새 교육과정에서는 노동교육을 교육목표부터 반영하자는 것이 지난 논의의 결과였다”며 “지난해와 올해는 정권이 바뀌었을 뿐인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교육목표의 핵심 내용이 바뀐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했다. 이어 “생태전환교육과 ‘일과 노동의 의미와 가치’ 항목을 아무런 설명 없이 삭제한 교육부를 규탄하며 이를 원래대로 되돌릴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는 “교육목표가 바뀐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작년 총론 주요사항 발표 이후 오늘의 총론 시안 발표까지 바뀐 것이 있다면 정부뿐”이라며 “윤석열 정부가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교육부는 새 교육과정의 각 항목에 일과 노동 관련 내용을 녹여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에서 “(작년 발표는)노동이라는 단어를 반드시 넣겠다고 명시했다기보다는, 일과 노동에 대한 가치나 태도에 관련된 내용을 교육과정에 반영하겠다는 의미였다”며 “기존 내용과 학교급별 발달 단계 등을 고려해 교육목표에 녹여 넣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내용에 일 관련 내용이 포함된 셈이고, 고등학교의 경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일의 가치를 고민할 내용을 담는 식”이라고 했다.

노동이라는 단어 사용을 피한 것 아니냐는 우려에는 “교육은 보편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하고, 어른들의 (서로 다른)가치판단을 따라가기보다는 의미와 관점을 스스로 결정하게끔 하는 게 타당하다고 봤다”면서도 “물론 이에 대한 찬반 여론이 있다면 양쪽 모두 충분히 들어보고, 연말 발표될 최종 계획에 반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현장실습 중 숨진 홍정운 학생을 위해 전남 여수시 웅천 친수공원에 마련된 분향소에 지난해 10월11일 홍군의 외할아버지 오익환씨가 헌화하고 있다. 홍군은 10월6일 현장실습 도중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제거하다 참변을 당해 숨졌다. 한수빈 기자

현장실습 중 숨진 홍정운 학생을 위해 전남 여수시 웅천 친수공원에 마련된 분향소에 지난해 10월11일 홍군의 외할아버지 오익환씨가 헌화하고 있다. 홍군은 10월6일 현장실습 도중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제거하다 참변을 당해 숨졌다. 한수빈 기자

학생들 대부분이 졸업 후 직장을 갖고 노동자가 되는 만큼 노동과 노동인권 관련 교육을 더 강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진숙경 경기교육연구원 미래교육연구팀장은 이날 류호정 정의당 의원 주최로 열린 ‘2022년 개정 교육과정 총론 노동인권교육 방향’ 국회 토론회에서 “4차산업혁명으로 노동이 다양해지고 있고, 그간 교육과정이 주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해 공급하는 쪽으로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노동인권 교육은 필요하다”며 “총론의 변화는 각론의 변화로 이어진다. 노동이라는 용어의 부재로 인해 (관련 과목 구성에)학습 공백이 생긴다. 대다수 시민이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주현 전국특성화고노조 경기중서부지회장은 “학교에서 질 좋은 노동교육을 충분히 해 주지 않으니 친구들은 부당한 대우를 부당하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도움 요청보다는 홀로 버틴다. (여수에서 실습 중 산업재해로 사망한)고 홍정운님 사건에 대해 친구들과 얘기해도 2인1조 작업이나 안전요원 등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있고, 다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한다. 어릴 때부터 노동의 중요성과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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