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계절근로자 옥죄는 ‘임금 담보’ 제도…법무부는 “딴나라 얘기” 모르쇠

허진무 기자
외국인 계절근로자. 경향신문 자료사진

외국인 계절근로자. 경향신문 자료사진

충남 부여군에서 농사를 돕는 필리핀 코르도바시 출신 노동자들은 매달 임금을 받으면 60%를 필리핀 은행 계좌로 보내야 한다. 취업한 기간 동안 이탈하지 않고 필리핀에 귀국하면 은행에 쌓아둔 임금을 돌려받는다. 이들은 파종기나 수확기에 농어가에서 외국인을 단기간 고용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제도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부여군과 코르도바시의 양해각서(MOU)에 임금 일부를 예치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하지만 부여군을 비롯해 코르도바시와 MOU를 체결한 한국 지자체 네 곳에서 일하는 필리핀인들은 모두 코르도바시에 이런 합의서를 써냈다. 사업장을 이탈하지 않겠다며 임금을 담보로 잡히는 셈이다.

이주노동자 단체는 이런 ‘임금 담보’ 제도가 근로기준법상 ‘임금 직접 지급 원칙’와 ‘강제 저금 금지 원칙’의 취지를 위반하는 데도 법무부가 방치한다고 비판한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임금을 근로자 본인이 아닌 자에게 지급하는 것, 임금의 일부를 공제해 지급하는 것, 강제로 저축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금지한다.

법무부는 26일 “농장주가 임금 전액을 계절근로자의 본인 명의 통장에 직접 지급해 근로기준법 위반은 아니다”라며 “이 제도는 필리핀 코르도바시와 계절근로자 간의 자율 합의에 따른 본국(필리핀) 내의 사항으로 별도 조치 계획은 없다”고 했다.

법무부는 계절근로자가 본국 출국 전에 일정액을 본국 은행에 예치하고 귀국하면 돈을 돌려받는 ‘귀국보증금’ 제도도 운영한다. 법무부는 올해 1월1일부터 ‘계절근로자 활성화 방안’을 시행해 한국 지자체가 외국 지자체와 MOU를 체결할 때 귀국보증금 제도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했다.

이주노동자 단체는 계절근로자가 귀국보증금을 마련하려 많은 빚을 지게 되고, 이자를 갚기 위해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해도 강제적으로 노동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고임금 사업장으로 이탈해 불법 취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견도 있다.

귀국보증금 제도가 계절근로자 유치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올해 충남 아산시는 캄보디아 타케오주와 MOU를 체결하려고 했지만 귀국보증금에 대해 캄보디아 정부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농민들에게 과도한 조항’이라는 의견을, 한국 법무부가 ‘필수 사항으로 삭제 불가’ 의견을 내면서 무산됐다.

법무부는 “외국 지자체마다 경제 사정이나 임금 수준이 달라 보증금의 상한을 설정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의 이탈 방지 제도를 마련해 외국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정하게 했다”며 “계절근로자의 이탈을 부추기거나 귀국 이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는 경우 실태조사를 거쳐 관련 제도를 개선할 예정”이라고 했다.

법무부가 계절근로자를 돈으로 묶어두려는 이유는 이탈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계절근로자 제도 시행 이후 입국자 대비 이탈자는 2017년 1085명 중 18명(1.6%), 2018년 2824명 중 100명(3.5%), 2019년 3497명 중 57명(1.6%)이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중단됐던 계절근로자 제도가 2021년 재개되자 이탈자는 559명 중 316명(56.5%)에 달했다. 2022년(8월31일 기준)에는 7041명 중 635명(9.0%)이 이탈했다.

이주노동자 단체는 계절근로자의 이탈 원인을 열악한 노동환경과 낮은 임금에서 찾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주노동팀장인 최정규 변호사는 “임금 담보 제도는 계절노동자가 귀국 전까지 임금 100%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어 탈법 행위라고 봐야 하고, 귀국보증금 제도는 이탈 방지보다 인권 침해로 이어지지 않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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