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기획

“참사 유족 차가운 길거리 나오는 일 더는 없어야”…안정호 화정아이파크 붕괴 참사 유가족 대표

강현석 기자    고귀한 기자

‘기약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차디찬 천막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지난 15일 안정호 화정아이파크 붕괴 참사 유가족 대표가 광주 서구 사고 현장을 찾아 지난 1년간의 심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강현석 기자

지난 15일 안정호 화정아이파크 붕괴 참사 유가족 대표가 광주 서구 사고 현장을 찾아 지난 1년간의 심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강현석 기자

지난달 5일. 안정호씨(45)는 이른 아침 광주광역시에서 출발해 300여㎞ 떨어진 경상북도 안동시 인근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봉화군 아연 광산 지하 190m 갱도에 광부 2명이 매몰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안씨는 작심하고 새벽길을 나섰다.

광부들은 안씨가 봉화로 향하기 몇 시간 전 기적처럼 구조됐지만 미처 소식을 확인하지 못했다. 뒤늦게 아내로부터 ‘생환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차를 다시 돌렸다. 안씨는 “남 일 같지 않았다. 매몰 광부의 가족들이 짊어지고 있을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고 싶어 봉화로 향했다”고 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씨는 너무 잘 안다. 11개월 전, 그도 칼바람이 부는 도심 골목의 천막에서 48일을 보냈다. 안씨는 지난 1월11일 신축 공사 중이던 39층짜리 아파트가 붕괴해 노동자 6명이 숨졌던 ‘광주 화정아이파크 붕괴사고’에서 ‘스승’과도 같았던 매형을 잃었다.

안씨의 매형은 붕괴 현장에서 소방 설비 설치 작업을 했다. 무술 체육관을 운영해 왔던 매형은 4년 전 생계를 위해 체육관을 접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새벽 5시면 집을 나섰고, 공사장이 쉬는 주말 낚시를 하는 게 취미였다.

2020년 여름에는 전남의 한 공사현장에서 크게 다치기도 했다. 기계에 옷이 감기면서 추락해 6개월 동안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았다. 다시 현장에 복귀한 매형은 집과 가까운 화정아아파크에 투입됐다. 일이 위험하고 고됐지만 “안정적인 수입으로 가족생활이 안정됐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공사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말렸어야 했는데 너무 후회스럽다”

안씨는 “재활이 끝났을 때 공사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매형을 말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 게 너무 후회스럽다”고 했다. 안씨의 매형은 39층부터 23층까지 무너져 내린 건물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 24일간 매몰됐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가족 품에 돌아왔다.

하지만 안씨와 가족들은 곧바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에는 노동자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6명의 시신이 모두 돌아올 때까지 함께하기로 했다.

안씨는 “피 말리는 심정으로 구조를 기다리며 가족들은 두려워했지만 국가와 기업 등 어느 곳에서도 살펴주지 않았다”면서 “차가운 천막에서 버티기 위해, 억울함을 풀기 위해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했고 한 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화정아이파크 희생자들이 모두 수습되는 데에는 참사 이후 꼬박 28일이 걸렸다. 합동 발인식은 48일 만인 2월27일 진행됐다. 칼바람이 불었던 아스팔트 골목에 봄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매형을 떠나보내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의 죽음’은 뉴스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안씨는 3월 고용노동부에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 현황을 물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45명이 죽었다고 하더라. 여기서 사람이 죽었는데 저기서 또 죽었다. 세상이 지옥 같았다.”

공황장애가 찾아왔고 3개월 동안은 제대로 운전도 못했다. 안씨는 “많은 가족은 ‘일상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지만 일부에서는 ‘보상금 받으려고 저런다’는 말이 끊이지 않는 등 피해자인 우리를 비아냥거리고 주눅 들게 했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공사현장에서 안정호 화정아이파크 붕괴참사 유가조 대표가 희생자들의 사망했던 장소를 가르키고 있다. 강현석 기자

지난 15일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공사현장에서 안정호 화정아이파크 붕괴참사 유가조 대표가 희생자들의 사망했던 장소를 가르키고 있다. 강현석 기자

겨우 안정을 되찾아가던 안씨는 요즘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한다. 158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를 보며 “또 누군가의 가족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지난 겨울의 ‘천막’을 떠올렸다.

안씨는 “참사 희생자 가족과 사회적 약자들이 슬픔을 꾹꾹 누르며 길거리로 나오도록 하는 일은 더 이상 만들지 말아야 한다”면서 “이태원 참사가 한 달 넘게 진상 규명을 해야 할 문제냐. 많은 ‘사회적 희생’을 겪고도 시스템을 정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씨는 4월19일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석열 대통령과 ‘재난·안전사고 피해자 유가족’이 가졌던 ‘경청식탁’에도 참석했다. 안씨는 “대통령께서 당시 ‘내 임기 내에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을 똑똑히 기억 한다”면서 “약속이 지켜지도록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께서 ‘내 임기 내에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던 것 똑똑히 기억

지난 15일 화정아이파크 현장을 다시 찾은 안씨는 “아무것도 못 하고 1년이 갔다”고 했다. 바뀐 것은 처참히 찢겼던 건물 외벽을 천막이 가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모든 건물을 해체하고 새로 짓는 데에는 앞으로 5년 8개월 정도가 더 걸린다. 현대산업개발은 “해체를 위해 안전관리계획서와 유해위험방지계획서를 작성해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내년 초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유가족들은 참사 1주년 추모식을 관공서 도움 없이 진행할 예정이다. 광주 곳곳에 ‘화정아이파크 공사현장에서 6명이 죽었다. 안전을 생각하자’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고 시와 구청, 건설사 관계자 등을 초청해 ‘안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로 만들 계획이다.

안씨는 “절망에 빠졌을 때 천막을 찾아와 3만원을 내민 할머니 등 시민들이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면서 “빚을 갚기 위해 다른 참사의 희생자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비영리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계획도 밝혔다.

누군가의 ‘집’이 되지 못한 회색 콘크리트를 한참 바라보던 안씨가 말했다. “매형은 본인 실수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당사자와 유가족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전에는 저도 ‘남의 일’ 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도망치고 싶은데, 참사 이후 저는 이 아파트에 묶인 존재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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