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집, 타버린 마음

‘다음 비극이 또 나올까’…트라우마와 함께 남은 이들

김송이 기자

(上) 벼랑 끝에 선 전세사기 피해자들

안상미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원장이 18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영정을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동훈 기자

안상미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원장이 18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영정을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동훈 기자

“좋은 일로 모여야 하는데 자꾸 이렇게 만나게 돼 어떡해요.”

인천 미추홀구 A 아파트의 전세사기 피해자 6명은 지난달 25일 오후 8시 인천의 한 장례식장을 찾았다. 전날 4번째로 숨진 인천 전세사기 피해자를 조문하기 위해서였다. 어두운 옷차림으로 장례식장에서 인사를 나누는 이들은 서로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같은 일을 겪어서, 남 일 같지 않아 왔어요.” 고인과 일면식이 없는 이들은 지난 4월 3번째로 세상을 등진 전세사기 피해자가 살던 아파트의 이웃들이다. 먼저 떠난 이웃의 49재가 오는 4일로 다가오는데, 또 다른 죽음을 마주한 것이다.

신정선씨(가명)는 회사에서 일하던 중 아파트 단체채팅방에서 ‘인천 전세사기 피해자 4번째 사망’ 기사를 접했다. “설마 우리 아파트에서 또 사람이 죽은걸까.” 부고를 전하는 뉴스 속 자료화면으로 A 아파트가 나오자 신씨와 주민들의 걱정이 커졌다. 다른 아파트에서 생긴 일임을 나중에 알았지만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신씨는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연이은 죽음을 목격하며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신씨의 경우 같은 지역, 같은 피해자 사이에서 나온 반복된 비극에 슬픔과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신씨의 딸도 마찬가지다. 뉴스에 미추홀구 아파트가 나올 때마다 신씨는 부모님이 괜찮은지 묻는 딸의 전화를 받는다. 신씨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데다 서로 의지하고 있는 같은 아파트 사람들이 경매에 낙찰돼 한 집, 두 집 떠나면 마음 잡기가 더 힘들어질까 걱정된다”고 했다.

“이런 자리 이제 제발 그만 오고 싶어요.” 신씨 곁에 앉아있던 김병렬 전세사기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그는 그간 대책위에서 동분서주하며 전세사기 피해를 알려왔다. 김 부위원장은 “이런 극단적 선택이 없게 하려 ‘전세사기 피해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 쓰인 티셔츠도 맞춰 입었는데 또다시 희생자가 나오셔 어떡하느냐”고 했다.

“내가 오늘은 진짜 장문으로 유서 쓸 거예요.” 김 부위원장의 말에 옆에 있던 신씨는 “안 쓰기만 해봐요”라면서 “유서는 길게 쓰면 아무도 안 보니까 짧고 간결하게 써야 해요”라고 대꾸했다. 벼랑 끝에 선 서로를 이런 식으로나마 붙잡아야 하는 이들의 절박함이 대화 곳곳에 묻어났다.

“다음 희생자가 안 나와야죠. 한편으론 또 나올까 너무 두려워요.” 이희진씨(가명)는 같은 아파트에서 3번째 사망자가 나오고부턴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 깜짝 놀라는 버릇이 생겼다. 침대에 자려고 누웠다가도 밖에서 응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창문을 열고 차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확인한 뒤 핸드폰으로 뉴스를 새로고침한다. “머릿속에 ‘설마, 설마’ 하는 생각뿐이에요. 혹시라도 또...” 말을 잇지 못한 이씨가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 4월 17일 인천 미추홀구에서 세번째로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의 아파트 앞에 조화가 놓여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 4월 17일 인천 미추홀구에서 세번째로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의 아파트 앞에 조화가 놓여 있다. 문재원 기자

집이 경매에 낙찰된 고용현씨(가명)의 핸드폰은 낙찰자의 전화로 빈소에서도 연신 울렸다. 고씨가 출근하고 나면 낙찰자가 집에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는 탓에 부인과 어린 딸은 두려움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다. 주민들과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원회(대책위)에 속해있는 피해자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며 늦은 밤까지 빈소를 지켰다.

김씨와 안상미씨를 비롯한 대책위 소속 7명은 이튿날 아침 발인식에 이어 인천가족공원 화장장까지 고인의 가는 길을 끝까지 함께 했다. 피해자 캠프가 있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과 인천을 연일 오간 탓에 눈 붙일 틈도 없었다.

지난 2월 미추홀구에서 첫번째 사망자가 나온 이후, 이들이 인천가족공원 화장장을 찾은 것이 벌써 4번째다. 더 이상의 죽음을 막아보려고 용산 대통령실과 여의도 국회 앞에서 대책을 마련해달라 외쳤지만 피해자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고인의 빈소에서 정부가 마련한 전세사기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피해자들이 요구해 온 ‘선구제, 후구상’ 방안은 빠졌고 한평생 모은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을 방법은 사라졌다. 사회적 재난이라면서도 대책은 개인적이었다. 고인을 운구한 김씨는 “선택지가 그냥 죽는 것과 개인회생 하는 것, 두 가지밖에 없는 기분”이라고 했다.

화장터에 남은 이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 눈물을 쏟았다. “더이상 이곳에 그만오고 싶다”고 입을 모은 이들은 마음을 추스른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안씨는 정부 차원의 추가대책과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기 위해, 또다른 이들은 생업과 대책회의를 위해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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