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집, 타버린 마음

전세사기 피해자 65%가 ‘죽고 싶다’…이들을 내버려둬선 안되는 이유

김송이 기자    전지현 기자

(上) 벼랑 끝에 선 전세사기 피해자들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4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의 실효성있는 대책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4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의 실효성있는 대책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10명 중 6명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동네 이웃이자 같은 처지의 피해자를 4명이나 떠나보낸 이들은 “남 일 같지 않다. 제발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경향신문이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39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죽고 싶은 소망이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응답자 18.32%는 ‘보통 혹은 많이 있다’, 47.6%는 ‘약간 있다’고 답했다. 10명 중 6명이 넘는 피해자가 많든 적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얼마나 자주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드냐’는 질문에 6.6%(26명)는 ‘그런 생각이 계속 지속된다’고 답했다. ‘정말 자살 시도를 할 것이라고 확신하나’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이도 4.8%(19명)나 됐다. ‘잘 모르겠다’고 답한 응답자는 53.4%(210명)였다.

자살 고위험군 중에는 실제 유서를 준비하는 등 자살 계획을 세운 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유서를 다 써놓았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3.0%(12명)였다. 이 중 8명은 30대 피해자였다. ‘쓰기 시작했지만 다 쓰진 못했다’고 답한 피해자는 19.5%(77명)였다. ‘죽음을 예상하고 확실한 계획을 세웠다’고 답한 사람도 1.8%(7명)였다.

우울 수준도 심각했다. ‘내가 잘못했거나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자신과 가족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다’는 문항에 ‘거의 매일’이라 답한 이가 절반(49.9%)이었다. ‘7일 이상’은 16.0%, ‘2~3일 이상’은 24.2%로 10명 중 9명이 이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없음’이라 답한 이는 9.9%에 그쳤다.

남성보다는 여성의 우울·자살 위험이 더 컸다. 여성 중 자살 고위험군은 47.7%, 우울 고위험군은 39.3%, 남성 중 자살 고위험군은 40.5%, 우울 고위험군은 32.0%였다.

[잃어버린 집, 타버린 마음]전세사기 피해자 65%가 ‘죽고 싶다’…이들을 내버려둬선 안되는 이유

자살 고위험군 비중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20대였다. 전체 응답자 중 20대 피해자는 58명이었는데 이 중 절반(50%)이 자살 고위험군이었다. 우울 고위험군 비중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40대(42%)였다.

소득이 적을수록 자살 고위험군에 속하는 비중이 높았다.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 미만인 피해자 중 60%, 100만~200만원인 피해자 중 60%가 자살 고위험군이었다. 전체 응답자 중 월평균 소득이 300만원 미만인 응답자는 271명인데 이 중 절반(49.8%)이 자살 고위험군에 해당했다.

자살 위험이 큰 피해자들은 삶의 희망을 잃었지만 “죽지 못해 산다”고 했다. 홀로 아이와 어머니를 부양하고 있다는 30대 여성 A씨는 자살 생각 점수 31점을 기록해 초고위험군에 속했다. A씨는 “이곳으로 이사올 때는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내 집 마련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억대 빚이 생긴 지금은 생명보험이라도 들어 내 목숨값으로 우리 가족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다른 고위험군 피해자인 30대 남성 B씨는 “결혼한 뒤 전세 사기대출을 당하니 삶에 희망이 없다”면서 “아기도 갖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라고 했다.

자살 위험이 큰 피해자들은 정작 주변에 자살 고민을 털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자살 고위험군 174명(자살 생각 자가진단 15점 이상) 중 80%는 주변에 자살 생각을 숨긴다고 답했다. ‘주변에 자살 생각을 속이거나 숨겼다’는 응답자는 50.0%(87명),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다가 숨겼다’는 응답자는 30.5%(53명)에 달했다. 이미 숨진 피해자가 4명이 나왔음에도 더 많은 피해자들이 표면 위로 위험이 드러나지 않은 채 고립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위태로운 심리 상태는 경제적 피해와 트라우마가 겹쳐 가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1일 “경제적 고통과 트라우마에 더해 같은 처지, 같은 동네의 사람을 자살로 잃은 유족과 같은 상황”이라며 “4명의 사망자와 동일한 피해를 입었으니 서로 동일시하며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강렬한 우울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는 “사기 피해자들은 범죄로 인해 생계에 위협을 받을뿐더러 세계가 법과 질서에 따라 돌아간다는 믿음에 손상을 입게 된다”면서 “사회가 안전하다는 생각에 충격이 생기면 허무와 절망, 삶에 대한 부정으로 빠지기 쉽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 교수는 “(피해자들이) 죄책감 때문에 주변에 이야기하지 못할 수 있다”면서 “국가와 사회는 이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해결책을 찾아가자’ ‘가족에게 말하지 않아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내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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