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다 빈대의 흔적”…쪽방촌·고시원은 ‘빈대와의 전쟁’ 중

오동욱 기자    김세훈 기자
지난달 30일 찾아간 동자동의 한 고시원 방문 위에서 발견된 빈대의 변이다. 시트지 옆으로 하얗게 이미 빈대가 까고 나간 알도 보인다. 오동욱 기자

지난달 30일 찾아간 동자동의 한 고시원 방문 위에서 발견된 빈대의 변이다. 시트지 옆으로 하얗게 이미 빈대가 까고 나간 알도 보인다. 오동욱 기자

“이게 이번 여름에 빈대 잡아 죽인 자국이에요.”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한 고시원 총무인 안모씨(55)가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시원 벽지 곳곳에 검은 얼룩이 져 있었다. 폭 5㎜, 길이 3㎝ 남짓한 까만 선이다. 방문 위 찢어진 시트지 사이로는 빈대 똥으로 추정되는 검은 알갱이들이 무수하게 박혀있었다.

고시원 한 곳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구 중림동의 고시원 거주자 한모씨(69)의 벽지에는 같은 얼룩이 더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올해 여름에는 일주일 만에 300마리 정도의 빈대를 잡았다”며 “저녁만 되면 발끝부터 막 사타구니까지 타고 올라와서 괴로웠다”고 했다. 한씨는 말하는 와중에도 연신 팔다리를 긁었다.

전국 각지에서 빈대 발견 신고가 잇따르는 가운데 특히 주거 취약계층이 빈대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동자동·중림동 쪽방촌에는 지난 5월부터 빈대가 기승을 부린 것으로 파악됐다. 지자체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동자동의 한 고시원 사장 A씨(66)는 “분해서 장갑도 안 끼고 (빈대를) 잡아 손이 피투성이가 됐다. 사람을 뜯어먹으면서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곳의 세입자인 박모씨(66)는 피부 곳곳이 빈대에 물려 울긋불긋했다. 그는 “밝으면 빈대가 안 나온다는 말을 듣고 요즘 잠을 잘 때는 불을 켜 놓고 잔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방문한 동자동의 한 고시원 복도 벽지엔 빈대가 죽은 흔적이 남아있다. 고시원 세입자들이 빈대를 발견할 때마다 손으로 잡아 벽에 피가 굳은 자국이다. 오동욱 기자

지난달 30일 방문한 동자동의 한 고시원 복도 벽지엔 빈대가 죽은 흔적이 남아있다. 고시원 세입자들이 빈대를 발견할 때마다 손으로 잡아 벽에 피가 굳은 자국이다. 오동욱 기자

이 지역에 빈대가 처음 발견된 것은 2020년 무렵이다. 매년 빈대가 나타나는 빈도는 늘어났다. A씨는 “3~4년 전부터 빈대가 보였는데 올해가 가장 극심하다. 이전에는 1주일에 한 번 정도 약을 쳤다면 이제는 2~3일에 한 번 쳐도 계속 빈대가 출몰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중림동의 한 고시원 사장인 정모씨(47)는 “중구청이나 지자체에서 코로나 방역만 나올 뿐 빈대 관련 방역은 나온 적이 없다”면서 “보건소에서도 빈대 출현에 대해 뭔가를 알려주거나 물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중구청 관계자는 “지난 6월 취약계층 지원 차원에서 중림동의 일부 지역에 빈대 방제를 한 차례 한 적이 있다”며 “지금껏 바퀴벌레와 모기 등을 방제하긴 했지만 빈대에 대해서는 방제를 해오지 않았다”고 했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올해 빈대 관련 민원 4건이 접수됐다. 주거 취약계층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방역작업을 했다”며 “민원 접수 내용에 따라 방역한다”고 했다.

지난달 31일 방문한 중림동 한 고시원의 방엔 빈대가 죽은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시원에 살고 있는 한모씨가 올해5월부터 빈대를 발견할 때마다 손으로 잡은 흔적이다. 오동욱 기자

지난달 31일 방문한 중림동 한 고시원의 방엔 빈대가 죽은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시원에 살고 있는 한모씨가 올해5월부터 빈대를 발견할 때마다 손으로 잡은 흔적이다. 오동욱 기자

고시원·쪽방촌 주민들은 개인 방제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동자동 고시원에 거주하는 김모씨(64)는 “빈대 퇴치 약을 사러 약국을 방문했지만 약사가 ‘요즘 빈대 나오는 곳이 어디있냐’면서 에프킬라를 줬다”고 말했다. 정씨는 “2021년 빈대 출몰 때 방제 업체를 불렀지만 건물 전체 방역비로 3500만원을 달라고 해서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어 “이후 각종 살충제, 농약, 뱀이 싫어한다는 백반까지 다 써 봤다. 최근엔 빈대가 싫어한다는 계피 우린 물과 식초까지 뿌렸다”며 “그런데도 한 세입자의 방에서 빈대가 나와 옆방 등 총 4개의 방을 폐쇄했다”고 했다. 폐쇄된 방에 문을 열자 죽은 빈대가 내뿜는 비릿한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전문가들은 쪽방촌 빈대 문제는 주거 복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1일 “3~4년 전부터 동자동과 중림동 쪽에 빈대 이야기가 돌았다. 지금까지 대책을 내놓지 못한 것은 ‘약자와의 동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주거 취약계층이 거주하는 시설에는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허선 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주거 취약계층의 건강권, 생존권이 침해당하는 상태이고 개인이 대응하기 어렵다면 정부와 지자체가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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