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 살리는 광고를 만들겠다 독자님, 드디어 금요일이 왔어요. 저는 이번 주 큐레이터로 일한 허남설 기자입니다.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한 지점을 건드린 기사를 좋아해요.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 이제석이 2008년 제작한 이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섬찟했던 그 느낌을 아직 잊을 수가 없어요. 이제석이 이 작품으로 당시 국제 광고제에서 거둔 수상 실적은 봉준호 영화감독이 <기생충>으로 오스카상 등을 휩쓴 것에 비견할만하다고 해요. 그런 그가 미국 최대 광고회사를 뒤로하고 한국에서 '광고천재'라고 불리며 일한 지도 어언 14년. 작업물 대다수는 '돈 안 되는' 공익광고였어요. 이제석을 만나 공익광고에 대한 소신을 들어봤습니다. 기사는 약 8분 분량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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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석은 이라크 전쟁 반대 캠페인으로 미국에서 이름을 알리고 대형 광고사에 들어갔지만, 돌연 한국행을 택했다. ☑️ 이제석이 한국에서 14년 동안 제작한 광고 500여건 중 80% 이상이 관공서, NGO와 함께 한 공익광고다. ☑️ 이제석은 "고급 자동차를 사게 만드는 광고보다 배고픈 사람 밥 먹게 해주는 광고를 만들 때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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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익광고를 하는가 2023. 03. 21. 박주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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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4일 경기도 고양시 현천동 이제석 광고연구소 작업실에서 이제석씨가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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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석씨(41)는 여전히 ‘똘끼’가 충만해 보였다. 자신감도 넘쳤다. “무언가로 막히면 뚫릴 때까지 계속 두드린다, 반드시 뚫어버린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가 인정한 ‘광고장이’다. 지방대 출신의 설움을 딛고 2006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간 지 6개월 만에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공모제에서 수상했다. 대기오염의 위험섬을 경고하는 ‘굴뚝총’ 광고로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원쇼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는 카피와 함께 군인이 겨눈 총구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반전 포스터는 세계 유수의 공모전에서 동시다발로 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큰 광고회사인 JWT와 BBDO를 거쳐 FCB에 입사했다. 빅히트작을 연달아 선보인 그에게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장밋빛 미래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2009년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 원하는 광고를 하고 싶어 같은해 ‘이제석 광고연구소’를 차렸다. “공익광고의 개척자가 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그동안 이제석 광고연구소가 제작한 광고의 80% 이상은 공익광고다. 설치미술형 광고와 퍼포먼스형 광고, 게릴라 캠페인과 인쇄 광고 캠페인, 포스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걸었다. 광고주는 주로 지자체나 관공서, NGO단체다. 지난 3월 14일 찾아간 경기 고양시의 이제석 광고연구소 외관은 투박한 컨테이너처럼 보였다. 폐차 직전의 낡은 자동차 몇 대가 놓인 1층은 용접 등을 하는 공장으로 사용하고, 넓은 공간에 책걸상 몇 개와 응접세트가 전부여서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 2층은 회의실로 이용한다고 했다. 도시의 소음이 싫어 본진은 서울 마포에 둔 채 작업실만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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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8일 18일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 앞에서 녹색연합 회원들이 이제석 광고연구소와 공동기획으로 포스코 석탄발전 중단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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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업 후 작업한 작품의 8할이 공익광고예요. 왜 공익광고에 꽂혔습니까. “꿈꾸던 뉴욕 한복판의 초대형 광고회사들에 다니면서도 저는 뭔가 늘 허전함을 느꼈어요. 아이디어는 분출하는데 시키는 일만 하자니 답답했어요. 사람들을 끝없이 자극해 헛된 욕망을 갖게 하는 상업광고 시장에도 조금씩 싫증 나기 시작했고요. 그런 와중에 제가 다니던 FCB에서 식량 기부 자선단체 ‘시티 하비스트’의 공익광고를 제게 맡겼고 즐겁게 작업했어요. 미국에선 광고회사들이 NGO 광고를 의무적으로 할당 제작하거든요. 뉴욕타임스 등 신문사도 수억원짜리 지면에 이런 공익광고를 공짜로 실어주고요. 학생 시절에도 공모전 출품을 위해 공익광고 제작을 많이 했지만, 이 작업을 하면서 공익광고의 가치에 더 눈을 떴어요.” 💻 그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어떤 광고가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좋은 옷과 고급 아파트, 비싼 자동차를 소비하게 하는 것보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게 해주고 얼어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는 게 훨씬 더 행복한 광고라고 생각해요. 죽어가는 사람 살리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기사회생하게 하는 광고가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고요.” 💻 그 일을 시장이 큰 미국에서 하면 더 파급력이 클 텐데요. “제가 세계 공모전 수상으로 유명해지면서 한국에서도 광고 의뢰가 드문드문 있었어요. 출장차 한국을 오가다 초기 사업자금 문제나 업무의 난이도 면에서 한국에서 일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한국에서 통하면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믿었고요. 그래도 2012년까지는 뉴욕에도 제 사무실이 있었어요.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도 생기면서 아예 한국에 뿌리를 내린 거예요.” 💻 천성이 따뜻하거나 혹은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한 건가요. “오해와 편견이에요.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광고장이로서 제 작업에 대한 욕심이 있을 뿐이에요.” 💻 창업 당시 ‘공익광고 개척자가 되겠다’는 말을 했지요. “당시 한국은 크리에이티브의 불모지였고, 공익광고 하면 공익광고협의회만 생각나던 때였어요. 완성도 면에서 아쉬운 면이 많았죠. 단순히 도덕적인 이야기나 올바른 주장을 한다고 해서 공익광고가 아니거든요. 광고를 접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전화를 걸거나 후원을 하는 등의 실제 행동을 이끌어내고, 사용자의 욕구 해결을 전제로 완성해야 해요. 그러려면 관련 기관들과의 협업이 굉장히 중요하죠. 저는 자신 있었어요. 공익광고를 기발하고 재미있게 만든 거장으로, 그래서 국가의 자랑으로 남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 지난 14년간 완성한 광고가 몇 건이나 되나요. “500건 가까이 될 겁니다.” 💻 작업은 재미있습니까. “굉장히 즐겁고 보람되고 뿌듯해요. 광고주의 의뢰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술자리 대화를 하다 자발적으로 마음이 동해 시작하는 일도 많아요. 지난해 8월 홍수 때 ‘깨끗한 빗물받이’ 캠페인을 벌인 것이나, 이태원 참사 직후 압사 사고 위험 구간 표지판을 만들어 홍대 앞 좁은 골목 등에 부착하는 캠페인을 벌인 것 등이 그런 사례예요. 작업의 퀄리티가 높지는 않아요. 이런 캠페인은 타이밍이 중요해 전광석화처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주 안에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하거든요.” 소외계층을 위한 광고를 비롯해 장애인 인권,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광고, 기아와 식수, 범죄와 치안, 환경 그리고 국가를 위한 광고 등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수많은 광고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경향신문, 한겨레, 매일신문, 조선일보, 국민일보 등 신문사와 컬래버 작업도 수차례 했다. 특히 2016년 창간 70주년을 맞은 경향신문 1면의 파격적 편집디자인은 큰 화제를 모았다.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올려놓고 ‘오늘 알바 일당은 4만9천원…김영란법은 딴 세상 얘기. 내게도 내일이 있을까?’라는 메모를 적은 디자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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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6일자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1면 편집디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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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에서 지내던 2008년 7월 미국 뉴욕의 심장부인 맨해튼 거리 곳곳에 “STOP ISLAND THEFT.”(섬 도둑질 그만) 문구와 함께 일장기로 복면을 한 도둑 형상의 설치 광고를 해 주목을 끌었어요. 이후에도 2009년 덴마크에서 열린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총회 행사장에 주최 측의 허락을 받지 않고 코끼리똥 사진을 걸었고요. 이런 게릴라성 광고를 자주 하는 것 같더군요. “광고는 굉장히 폭력적인 거예요. 누가 듣든 안 듣든 상관없어요. 영화는 극장에 가서 돈 주고 보지만, 광고는 그냥 귀에다가 박는 것이거든요. 일일이 허락받으면 어느 천년에 뜻을 이루겠어요. 제가 그동안 수상하고 히트친 작품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보여준 것들이에요.” 💻 광고주는 주로 지자체나 관공서, NGO단체예요.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회사의 재정상태는 괜찮습니까. “지자체나 관공서는 예산이 있어요. 공익광고 제작으로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그걸 보충하기 위해 다른 사업도 겸하며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하하하….” 💻 어려운 점은 없나요. “결국은 공익이 뭐냐는 근본적 고민을 해요. 가장 힘든 점이에요. 모두가 공익이라고 주장하니까요. 심지어 JMS 정명석 같은 자도 자기가 공익이라고 주장할걸요.” 💻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저는 방패 앞에 선 시위대와 방패 뒤에 선 공권력 모두와 일해요. 양측 모두 자신들이 공익이라고 주장하죠. 또 극단적으로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사람과도 만나요. 이들 역시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열변을 토해요. 때로는 저도 헷갈려요. 그러면 산술적으로 따져 다수의 사람에게 이익이 가는 쪽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소수는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죠. 공익이라는 말이 정말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공익 대신 공공이라는 말을 쓸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 광고 수주 여부의 선택 기준이 있습니까. “광고주가 어떤 사람이냐가 기준이에요. 상업광고를 거의 안 하긴 하지만 이 기준은 상업광고 수주 여부를 결정할 때도 동일해요. 완장 찬 것처럼 매너 없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아요. 진정성이 느껴지는 분들과 일하면 행복해요.” 그는 인터뷰 내내 ‘사람’을 자주 언급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행·불행을 주는 것도 ‘사람’인 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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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9일 '세계 인권선언의 날'을 앞두고 이제석씨(왼쪽 세번째)가 지하철 시청역 5번 출구 통로에 광고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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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인쇄 광고나 방송 광고처럼 전통매체를 통한 광고보다 옥외 광고나 캠페인, 퍼포먼스 같은 비전통, 비정형 매체 광고를 주로 하는 이유는 뭔가요. “표현의 자유 때문이에요. 전통매체를 이용하는 광고는 규제가 너무 많아 심의를 통과하는 게 쉽지 않아요. 별것도 아닌 것을 트집 잡아 방송을 못 하게 하는 경우도 왕왕 있어요. 그로 인해 실제로 완성했으나 공개하지 못한 광고도 많았고요. 크리에이티브가 훼손된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아예 길바닥에다 광고를 하기 시작했어요. 스트리트 광고죠. 그게 대박이 나 TV 뉴스에도 보도되면서 지금까지 그걸로 먹고사는 거예요.” 💻 한국이 유난히 규제가 심한가요. “심하죠. 유교 전통을 지닌 국가인 데다 인권 감수성 이슈 때문인지 사고가 대단히 경직돼 있어요. 민원도 많고요. 그러니 공중파 방송 등의 광고는 표현의 제약이 심해요.” 💻 그럼에도 한국에서 계속 작업하는 이유는 뭔가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에요. 정서적 검열 등 각종 규제가 발목을 잡지만, 그런 문화적 토양 때문에 저 같은 놈이 더 돋보일 수 있으니까요.” 💻 무슨 얘기인가요. “매스컴은 제게 ‘광고천재’라는 과한 수식어를 붙여줬어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하는 광고는 개념광고라고 해서 이미 해외 광고 선진국에서는 활발했던 장르예요. 뭔가를 비틀고 후려치고 한 번 돌려서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 광고를 그동안 한국에서는 볼 수 없어 쇼킹하게 받아들였을 뿐이죠. 한국은 이전까지 읽기 위주, 즉 카피 위주의 광고나 연예인 중심의 광고만 해왔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더 돋보일 수 있었던 거예요. 마이너스 요인을 다르게 보면 성공의 발판이 돼요. 주어진 핸디캡을 잘 이용하면 플러스 요인이 되고요.” 그는 “한국에서 사막과 오아시스를 동시에 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한테 가끔 ‘너희는 왜 관공서라는 가장 보수적 집단과 일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꼰대니까’라고 대답해요. 꼰대니까 안 맞지만, 또 꼰대이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거든요.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넌 나를 완성시킨다’고 말해요. 악의 화신 조커나 선의 화신 배트맨이나 서로가 있어야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죠. 정반합의 개념이에요. 그래서 저는 세종시를 지옥이라고 생각해요. 공무원들에게는 날라리들이 필요한데, 그곳은 공무원 천지의 도시니까요.” 💻 이제석 광고의 특징을 한 마디로 어떻게 규정하나요. “쉽고 단순한 광고,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광고죠.” 💻 요즘도 자신을 ‘아이디어 중독자’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일과 생활의 경계를 두지 않아요(웃음). 매 순간 아이디어를 짜내려 고심해요.” 💻 메모가 일상화돼 있다지요.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반드시 기록해 둬야 하기 때문에 냅킨이든 뭐든 눈에 띄는 곳에 닥치는 대로 적어둬요. 예전에는 타고 다니던 자동차 내부 천장과 측면, 바닥에도 사인펜으로 마구 써놔 자동차 안이 온통 낙서투성이였어요.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면 메모할 때 스마트폰을 많이 활용한다는 점이에요.” 💻 일하면서 생긴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나요. “트럼펫 같은 악기를 불기도 했는데, 요즘엔 자동차 정비를 해요. 그렇게 육체를 써서 정비에 몰두하다 보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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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총알같이 달려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부산경찰청 옥외광고(2003). 폐차를 경찰차로 도색한 다음 외벽에 박아 완성했다. 이제석 광고연구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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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2년 대구 태생이다. 훗날 의사가 된 형과 달리 공부를 못하고, 수업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초등학생 때부터 교사들에게 툭하면 두들겨 맞았다. 책과 공책 여백마다 그려댄 만화가 그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림만으로도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죽도록 그렸다. 그렇게 들어간 계명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그를 인정한 공모전도, 기업도 없었다. 동네 ‘간판장이’로 일하면서 명함집 사장에게까지 모멸당하자 독기를 품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1년간 미군부대를 들락거리며 그림을 가르쳐주고 영어를 배웠다. 2006년 9월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School of Visual Arts)’에 입학했다. 💻 미술적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건가요. “손재주는 금손으로 불렸던 어머니로부터, 예술적 기질이나 사이코적 면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아요.” 💻 아버지가 어떠셨길래요. “아버지는 대구의 유명 호텔 주방장이셨어요. 업계에서 나름 명성과 악명이 자자했던 분이에요. 굉장히 다혈질적이고 충동이 일면 불같은 사람이었어요.” 💻 아버지가 폭력적이었나요. “난폭했어요. 모난 돌 취급을 받던 저는 욕도 많이 듣고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아버지뿐만이 아니었어요. 동네 형들한테도 돈 빼앗기며 두들겨 맞았고, 교사들한테도 수시로 얻어 맞았죠. 제가 불우했던 청소년기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잘 안 믿어요. 저도 굳이 다 말하고 싶지 않고…. 돌이켜보면, 보통 아이들이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보냈겠군요. “그런데도 저는 그렇게 우울하거나 공포에 치를 떨면서 잠을 못 자거나 하지 않았어요. 낙천적이라기보다는 멘털이 강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난 별 의미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때리면 맞고, 누워 있으라면 누워 있었어요.” 💻 그런 사람이 어떤 계기로 달라진 건가요. “고등학생 때 제 그림을 보신 어느 선생님이 많은 용기를 주셔서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했어요. 그리고 스무 살 때 대학에 가서 평생 처음 장학금이라는 것을 받아본 거예요. 수석을 했어요. 그러니까 몸에 귀신이 들린 것처럼 20년간 참아왔던 서러움이 터지면서 잘해봐야겠다, 잘살아봐야겠다. 업신여김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초인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눈 떠 있는 시간 동안 미친듯이 일하고 그렸어요. 뉴욕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렇게 맹수가 사냥하듯 일한 게 20년째예요.” 💻 무엇이 오늘의 이제석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생존본능이요. 그로부터 초인적 힘이 나와요. 살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지금도 저는 생존을 위해 굉장히 몸부림치고 있어요. 쫓고 쫓기는 삶, 거기서 스릴과 희열을 느껴요. 만약 이 불씨가 꺼지면 저는 100% 우울증이나 무기력증 혹은 치매가 올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분주한 삶을 살고 있어요(웃음).” 📝 🔎 경향신문 홈페이지에서 기사 전문을 읽으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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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석 광고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면 그가 2007년부터 해온 공공디자인, 공익캠페인 내역이 빼곡해요. "대한민국 공익광고 역사를 만듭니다"라는 소개글에서 이제석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석의 이름 앞에는 으레 '광고천재'라는 말이 붙는데, 저는 인터뷰 기사에서 표현한 대로 '광고장이'라는 말이 그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이제석은 광고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서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떤' 광고를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에 더 가까워 보였거든요. '광고천재'라는 말이 그의 재능과 실력만 조명할 뿐, 꾸준히 공익적 가치를 추구해 온 삶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사에 사진으로도 담겼는데, 특히 이제석이 작업한 경찰 광고는 참 흥미롭고 화제도 많이 됐어요. 일시적으로 설치한 게 아니라 지금도 남아있는 것들이 많고요. 총알처럼 달려 건물 외벽을 찢은 경찰차, 버스를 두 팔로 거뜬히 들어올린 경찰, 경찰의 근육질 팔뚝에 매달린 그네... 서울, 부산, 대구, 속초, 천안 등 전국 곳곳에 퍼져있으니 그 도시에 가면 '이제석 투어'를 해봐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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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관객 수가 200만명을 넘었어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이어 계속 일본 작품이 흥행하자, 최근 일제 강제동원 해법 논란에 대한 여론과 상반된 분위기에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나봐요. 일본 영화 강세의 이모저모를 살핀 기사예요. 이스라엘 시민들이 역사상 가장 큰 시위를 11주째 이어가고 있어요. 현 총리가 추진하는 사법개혁안이 삼권분립을 무너뜨릴 거라고 항의하며 거리로 나온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는 아랍계 시민들은 시위에서도 차별당한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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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올해 태어나는 아이들은 2030년에 일곱 살이 됩니다. 이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할 무렵, 지구의 온도가 전 세계 과학자들이 지금껏 경고해온 ‘마의 수치’, 1.5℃ 만큼 뜨거워지게 된다는 예측이 나왔어요. 이것만큼은 막자고 세계 여러 나라가 협상을 벌이고 규제도 도입했지만, 남은 시간이 충분치 않아 보여요.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 이상 상승하게 되면, 뜨거워진 지구가 스스로 점점 더 뜨거워지는 되먹임 현상을 막기 어렵다고 하거든요. 우리의 일상은 이미 크게 달라졌습니다. 생산되는 작물이 변하고, 잡히는 수산물이 바뀌고, 계절의 날씨가 바뀌고, 불쑥 알 수 없는 이상 기후가 찾아오는 것도 익숙해졌고요. 다음 주의 점선면에선 10년 후 20년 후의 지구를 그려봅니다. 이번 주에 정부가 발표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 정부안도 뜯어볼게요. 기후위기와 관련해 답답했던 점, 궁금했던 점이 있다면 마음껏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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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이 공동의 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가꾸어 가는 참여의식이 참 좋습니다. 우리 지역에서도 실현해 보고 싶네요. 지역의 작은 기업이지만 지역민으로 참여하고 지역을 가꾸는데 역할을 하고 싶어요."
📝 "graciajo님이 점선면Lite <보도블록을 입양한다니>편에 남기신 이야기예요. 나무 한 그루를 '입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서울시에는 시민이 가로수 등 나무 몇 그루를 맡아 관리하는 '나무돌보미'가 있다고 해요. 찾아보니 인천 등 다른 지자체에도 유사한 사업이 있어요. 레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사업이어서 이참에 추천해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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