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다이어트’ 혹은 ‘관계 다이어트’

김지숙 | 소설가

“AB형은 하루에 약속이 세 개가 잡히면 다 취소해버린다면서요?”

한 모임에서 누군가 꺼낸 말에 격하게 맞장구를 쳤다. 정신 차리고 보니 맞장구치는 사람은 나 혼자뿐, 모두가 나를 외계인 보듯 하고 있다. 눈에는 정말? 이라는 의구심이 덧입혀져 있다. 혈액형 점을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나의 경우, 과도하게 잡힌 약속은 극단적인 선택을 부르고는 한다. 주말에 결혼식이 하나라면 기쁜 마음으로 간다. 결혼하는 당사자와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결혼식의 디테일도 관찰하며 즐긴다. 문제는 하루에 세 개의 결혼식이 있을 때다. 그 때는 결혼식이 축하해야 할 경건한 의식이 아니라 내 주말을 잡아먹는 ‘일’이 된다. 아는 사람 편에 축의금을 보내고 잠을 좀 더 자는 편을 택하지만,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뒤늦게 그 사람과의 관계나 추억도 떠올라 미안해진다. 나에게는 많고 많은 휴일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이 아닌가.

[별별시선]‘약속 다이어트’ 혹은 ‘관계 다이어트’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챙겨야 할 경조사와 새로운 관계가 많아진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만나두면 좋을 사람도 많다. 그러다 보면 가족이나 연인, 오래된 친구에게 소홀해지기 십상인데 그건 또 싫어서 열심히 약속을 잡고 이벤트를 만든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뜸하게나마 존재감을 남겨야 하겠고, 쉴새 없이 깜빡거리며 수다를 쏟아내는 그룹별 카카오톡 채팅방에도 모습을 비쳐야 한다. 내 또래 직장인들은 하나같이 바쁘다. 채팅방에 ‘우리 한번 보자’, ‘그래, 정말 만나자’ 하는 약속의 말들이 오가고 서로 일정이 겹치지 않는 날을 찾기 위한 수백 개의 치열한 대화가 오간다. 결국 몇 개의 약속은 공중에서 산화하고 몇 개는 살아남아 다이어리의 빈칸을 메운다.

읽어야 할 책과 가야 할 전시는 많고, 영화는 끊임없이 나온다. 단풍도 보러 가야 하고 불꽃축제도 가야 한다. 이걸 배우라고, 저기에 가보라고 권하는 말들도 넘쳐나고, 그에 따라 약속도 범람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즐겁자고 잡은 약속인데 약속을 소화하다 보면 공허해진다. 약속 3개가 잡히면 모두 취소해버리는 AB형답게, 나는 쉽게 지쳐버린다. 때때로 잡을 때보다도 힘겹게 약속을 취소하며 후회하다가, 나의 우유부단함을 탓하고 만다.

이런 고민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니 아빠랑 똑같다’고 놀린다. “아침잠 많은 양반이 골프 약속 있을 때는 꼭두새벽에 겨우 나가면서, ‘골프 치러 가기 귀찮다’고 불평한다”며 “그러면 대체 왜 가는 거냐”고 따진다. 이에 대한 아빠의 항변은 사뭇 애처롭다. 아빠는 퇴직 이후 오히려 골프를 열심히 치게 되었는데, ‘몇 번 빠지면 퇴직자 모임에서조차 도태될 것 같아서’란다. 아빠의 말을 듣다가, 약속은 관계에의 불안과 집착에서 나오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리퀴드 러브-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읽으면 더욱 명확해지는 바가 있다. 저자는 탈근대 사회의 관계를 정해진 형태 없이 유동적인 ‘리퀴드’ 상태라고 정의하며 ‘21세기는 유대 없는 인간의 세기’가 될 거라고 진단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스마트폰 메신저로 서로의 관계가 거미줄처럼 연결되다 못해 범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유대가 없다니? 저자는 ‘피로할 정도로 관계가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진정한) 관계가 모두 사막화된 현대의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람들이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관계를 뻗어나가고자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유동적인 관계 속에서 오히려 소통과 관계를 갈구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무섭고 안타깝다.

현대사회에서 관계의 양적인 팽창은 어렵지 않다. 한 시간이면 인터넷 각종 동호회에 백 개쯤 가입할 수 있다. 수 백 개의 댓글을 달 수 있고, 친구들 모두의 페이스북을 돌 수도 있다. 처음 SNS가 유행할 때는 ‘SNS로 체계적인 인간관계 맺기’ 같은 처세술 책이 유행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하면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효율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지 기술을 정리한 정보를 다룬 자료도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진실한 관계를 맺고 집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양적인 만남이 아니라 질적인 만남이 필요하고, 서로에게 집중할 에너지도 필요하다. 앞으로 약속을 잡는 데는 ‘최소주의’를 실천하려고 한다. 더 이상 관계가 피로나 공허가 아닌 의미로 만들기 위해서, 약속과 관계의 다이어트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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