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대통령

백병규 | 시사평론가
[세상읽기]비정한 대통령

아집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다. 자기중심의 독선과 오만은 사회생활은 물론 모든 생명활동을 위협한다. 망상과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을 망가트리고 고립시킨다. 대화와 소통을 거부하고 관계를 단절시켜 갈등과 분열을 전파한다. 아전인수에 견강부회 증후군을 동반하고 급기야는 ‘공감능력’의 상실에 이른다. 정치인에게 그것은 파멸의 지름길이다. 하물며 대통령인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바로 그 아집에 사로잡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다. 정치권의 초당적인 간곡한 호소와 정의화 국회의장까지 나선 중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해 정치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부의 시행령이 법의 취지와 위임 범위를 벗어났을 때 이의 시정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국회법 개정안이다. 박 대통령은 이것이 정부의 행정력을 무력화시키고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이 자체가 억지스럽고, 과거 자신의 입법 발의까지 부정하는 행태지만, 기실 거부권을 행사한 이유가 따로 있음은 여야를 가리지 않은 그의 격렬한 정치권 비난, 특히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콕 집어 ‘배신자’로 낙인찍으며 다음 선거에서 ‘심판’해 줄 것을 촉구한 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대통령의 권위와 권력에 대한 그 어떤 일말의 도전도 용납할 수 없다는, 무엇보다 새누리당 ‘비박’ 지도부에 대한 경고이자 응징의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세게 나온 데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팬덤’이 여전히 강고하다는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을 터.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를 거치면서 지지율이 많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지지자들이 있다는 자기 확신의 발로일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제하고선 새누리당의 재집권은 요원할 것이라는 겁박이기도 하다.

독선과 오만은 그러나 그 자체가 덫이기도 하다.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최대치의 극렬한 ‘공격’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당장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박 대통령의 언사는 적어도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겨냥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유 원내대표는 새누리당 의총에서 살아남았다. 의총 발언에 나선 40여명의 의원들 가운데 단지 4명 정도만 유 원내대표의 인책 사퇴를 요구했다는 것 아닌가. 박 대통령은 승부수를 던졌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자폭성 겁박에 일단 몸을 낮춰 국회법 개정안을 재의하지 않기로 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어쨌든 거부권 행사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누리당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분과 영향력을 재확인하고 각인시키는 효과도 거두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시간은 박 대통령 편이 아니다. 야당의 거센 반발 등 정치권과의 전면적인 대립과 충돌이라는 위험요소도 한층 배가됐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그 스스로 촉구했던 민심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 메르스 사태가 심각한 판에 국회법 논란은 처음부터 민심의 관심사항이 못됐다.

대통령이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왔는가에 대해 한 번쯤 관심은 갖겠지만, 대통령의 ‘아집’과 ‘불통’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이어 메르스 대처에서 보여준 그 ‘무능’에 고개를 절레절레하기 시작한 민심의 큰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박 대통령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박 대통령은 정치권을 싸잡아 맹비난하면서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삶을 돌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는 끝내야 한다’며 ‘국민의 심판’을 촉구했다.

그런데 정작 박 대통령은 국민 모두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메르스 사태에 대해서는 사과는커녕 ‘중동의 낙타’에서 시작된 ‘신종 감염병’이어서 ‘국제사회와 공조하며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 희생자들에 대해 최소한의 ‘애도’도 표하지 않았다. 정부의 늑장 대처와 구멍 난 방역 때문에 메르스 확진 이틀 만에 숨진 70세의 요양보호사 할머니나 노부부 모두 사망한 애절한 사연 등에 단 한마디도 없었다. 국가적인 재난사태를 맞아 까닭도 모른 채 유명을 달리한 억울한 죽음들, 고인의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던 가족들의 비통함은 외면한 채 주먹 불끈 쥐고 싸움판에 뛰어든 꼴이다. 그것이 과연 ‘국민의 삶’을 보듬는 대통령의 모습일 수 있을까. 그런 비정한 태도에 아무리 맹목적인 팬덤인들 얼마나 같이할 수 있을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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