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숨어 있는 한국의 흔적

정수복 | 사회학자·작가

푸른 오월이다. 파리의 하늘은 맑고 햇빛은 찬란하다. 가로수들의 연둣빛 잎사귀들이 미풍에 흔들리고 있다. 파리는 단지 프랑스의 수도가 아니라 세계 문화의 수도이다. 세계 각국의 작가와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어 새로운 문화와 사상과 이론을 창조한다.

[정수복의 도시를 걷다]파리에 숨어 있는 한국의 흔적

작년 가을과 올해 초에 일어난 테러사건으로 다소 분위기가 위축되었다고 하지만 파리에서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 만한 전시와 문화행사들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 퐁피두센터에서는 폴 클레전이 열리고 있고, 오랑주리에서는 아폴리네르전이 열리고 있으며, 오르세미술관에서는 두아니에 루소전이 열리고 있고, 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아메리카의 수많은 원시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케브랑리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이해 특별전을 열고 있다. 발자크가 “파리는 수심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대양”이라고 말했지만 파리는 가히 세계 문화예술의 ‘거대한 저수지’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를 대신해 뉴욕이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의 이끼가 낀 파리 시내를 걷다보면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느낄 수 없는 고유한 문화와 예술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라도 자국의 문화와 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파리를 거점으로 삼는다. 지금 파리에서는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한국문화를 알리는 여러 전시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기메박물관에선 한국 호랑이 그림전이 열렸고, 그랑팔레에선 한국 도자기전이 열리고 있으며, 팔레 르와얄 정원에서는 조형미술가 정현이 세운 수십명의 ‘서 있는 사람’들이 산보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프랑스 파리9구 샤토덩가 38번지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프랑스 파리9구 샤토덩가 38번지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지난 4월16일 파리 건축박물관에서 열린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도시성’을 주제로 하는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행사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을 빠져나와 파리 시내를 빙 두르는 외곽순환도로에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광판과 네온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 가전제품, 스마트폰 등을 수출하는 한국 대기업들의 광고들이 보였다.

내가 탄 택시는 마침 한국 기업의 자동차였다. 택시기사는 자기 차에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서울보다는 덜하지만 파리의 지하철에서도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 기업의 제품이 널리 쓰이고 있다.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파리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파리의 한국인이 되어 파리 시내를 걷다보면 아주 드물게나마 한국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공식적인 장소로는 로댕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그르넬 거리의 위엄 있는 저택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곳이 주불한국대사관이다. 지금 그곳은 당연해 보이지만 그 건물 뒤에는 지난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1900년 5월23일 대한제국의 전권공사 이범진이 엘리제궁에서 프랑스 대통령에게 고종의 신임장을 전달하고 파리16구의 퐁프 거리에 공사관을 차렸다. 이후 한국공사관은 뒤몽뒤르빌 거리의 건물로 이전했다가 1902년 엘로 거리로 옮겼으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폐쇄되었다.

그런데 오페라극장 뒤 프랭탕 백화점에서 멀지 않은 샤토71 거리를 걷다보면 38번지의 오스만식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석판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곳이 1919년 3·1운동 직후 파리평화회의 때 일본의 강제합병을 비판하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한국의 독립이 필요함을 널리 알린 김규식, 조소앙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들이 일하던 장소이다. 발길을 옮겨 파리5구 라탱 구역으로 가보면 팡테옹 앞에 있는 말브랑시 거리 7번지에서 1934년 상해 임시정부가 임명한 주불공사 서영해가 살던 집을 만날 수 있다.

또 파리 서쪽의 불로뉴 숲으로 들어가다보면 포르트 드 파시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대표부의 그럴듯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파리에서 한국 문화와 예술을 알리는 한국문화원은 아직 자기 건물을 갖지 못하고 16구 이에나 거리에 있는 작은 건물의 1층과 지하층을 빌려 쓰고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본문화원이 있다. 센 강을 바라보며 에펠탑 근처에 세워진 일본문화원 건물은 일본의 대기업들이 자금을 출자해 1997년 문을 열어 프랑스에 일본 문화 붐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7구 앵발리드 광장 부근을 걷다보면 붉은 오성기가 나부끼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중국 정부와 기업들이 자국의 문화와 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중국문화원 건물이다. 뒤늦게나마 한국문화원도 샹젤리제 부근에 제법 버젓한 건물을 매입해 이전할 계획이라고 하니 다행이다. 파리에서 문화적 승인이 없는 경제적 성공은 졸부라는 손가락질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노트르담 성당을 지나고 생루이 섬을 지나 센 강을 건너면 젊고 유망한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장소를 제공하는 시테데자르가 나온다. 바로 그 앞에 화강암으로 만든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사한 프랑스 군인들을 추모하는 한반도 모양의 큰 비석이다. 추모비의 한쪽 면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프랑스군을 추모하고 있고 다른 한쪽 면은 인도차이나반도와 알제리에서 전사한 프랑스군을 추모하고 있다.

한편 몽파르나스타워 뒤쪽으로 가면 ‘서울광장’이 있는데 너무 구석진 곳에 있어서 찾기가 힘들었다. 또 미테랑 대통령 재임 시 센 강변에 새로 지은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보면 지하 1층 로비의 벽에 책의 역사를 기술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한국의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라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파리7대학 건물 4층에는 한국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파리 서쪽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에도 서울정원이 있다. 그리고 아시아 미술품을 전시하는 기메박물관 3층에 가보면 ‘수월관음도’를 비롯한 한국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오페라 거리로 갔다. 부근의 한국 식품점에는 다양한 인종의 고객들로 붐비었고 인근의 한국 식당은 프랑스인 고객들로 만석이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파리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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