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도전을 멈춰줘

인아영 문학평론가

“왜 이런 식으로 하는지 모르겠어요. 별로 안 받고 싶어요. 아무리 제가 제일 큰 득표차로 승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모두가 다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거는 뭐… 어쩌라고요?” 여성 뮤지션 10명이 모인 힙합 리얼리티쇼 <굿걸:누가 방송국을 털었나>(mnet, 2020.5~)에서 열아홉 살의 래퍼 이영지는 쇼가 만들어내는 경쟁 구도와 도전 서사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일종의 상금인 플렉스 머니를 한 명에게만 몰아줌으로써 뮤지션들 간의 대결 상황을 유발하는 구도에 불편함을 표한 것이다. 이 발언에는 단지 가장 어린 후배의 면구스러움만이 아니라, 불필요한 긴장과 갈등을 만들어내는 서사 자체에 대한 불만이 작동하고 있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끝없는 도전을 요구하는 예능 서사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점점 더 가혹하고 자극적으로 변천해왔다. 한쪽에서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루저’를 자처하거나 서로의 지적인 수준을 ‘초딩’이라고 놀리는 성인 남성들이 육체의 물리적인 한계나 낯선 환경에서의 생존에 도전하며 일차원적인 감동과 가학적인 재미를 선사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거장 가수들끼리의 경연, 심사위원들이 신인을 발굴하고 데뷔시키는 오디션, 상금을 걸고 경쟁하는 서바이벌 등 음악 경연 프로그램 열풍이 10년째 유지되고 있다. 전자가 1인자라고 불리며 방송계에서 독보적인 기득권을 가진 중년 남성 개그맨이 여전한 신인의 자세로 서툴지만 패기 있게 도전하는 청년의 역할을 십수 년째 연장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후자는 혹독한 방송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과 육체를 갈아 넣으며 절박함을 전시하고 열정을 지불해온 ‘진짜’ 청년들이 방송사와 연예기획사가 결탁한 사기극에 희생당하는 장면으로 귀결되었다. 이 무참한 양극화의 원인에는 표면적으로 희망과 성장을 약속하는 도전 서사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수성이 숨어있다. 성공해서 감동을 유발하든, 실패해서 아쉬움을 남기든 도전 서사는 결국 신자유주의적인 경쟁 시스템이나 기존의 권력 구도 자체를 승인, 재생산, 강화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굿걸>을 비롯한 최근 예능 서사는 불필요한 도전을 최소화하는 대신 출연진의 수행적 실천을 강조하는 쪽으로 영리하게 방향을 틀고 있는 것 같다. 무모한 도전을 요구받는 청년들이 얼마나 가혹한 감정노동을 요구받으며 착취당해왔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난 시점에서, 기만당해온 시청자들의 피로감에 역치가 건드려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플렉스 머니 500만원을 다른 출연진에게 선물하는 데 사용한 이영지의 행동은 지겹도록 반복돼온 ‘여적여’가 아니라 ‘여돕여’ 구도를 마련하고,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이 방송사의 기획을 의심하면서도 소수자 인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스피커로서 기꺼이 쇼를 활용하는 모습은 자신의 구조적 위치와 역할을 정확히 습득해온 세대의 욕망과 수행성을 보여준다. 이는 예능에서 오랫동안 답습해온 도전 서사의 규칙 자체를 중단하고 심문한다. 방송사가 짜놓은 각본과 연출 안에서 움직인다는 비판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예능에서 기존과는 다른 서사가 만들어져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꽤 중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예능 역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가 곧장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페미니스트 래퍼나 ‘여돕여’와 같이 누락되거나 왜곡되었던 현상을 재현하고 재생산하면서, 우리가 새로운 세대, 여성들 사이의 관계, 장르에 따른 음악의 재현 관습을 상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부당하거나 폭력적으로 여겨지는 이야기를 거부하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슬릭이 누구도 해치지 않는 음악을 지향하듯, 누구도 해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생산되고 소비되면서 힘을 얻어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 우리 안으로 스며들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런 이야기를 원한다. 그런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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