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불확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얼마 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먼지 흙 돌’ 전시를 보러 갔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작품은 열두 살에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안타깝게 요절한 문학가이자 미술가인 차학경(1951~1982)의 ‘퍼뮤테이션(permutations)’이었다. 여동생의 얼굴과 뒤통수를 찍은 이미지를 깜빡거리는 플리커 기법으로 빠르게 연결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얼굴을 병치한 영상 작업이었다. 스크린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천천히 보고 싶었는데 자꾸만 깜빡거리고 다른 이미지로 바뀌는 영상을 보며 나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아시아인의 얼굴을 구별하지 않는 인종차별과 이주민의 불안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전시 도록이 도움이 되었지만, 어쩌면 누군가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이 본래 그렇지 않은가, 눈앞에 보이는 상대의 존재는 불확실하게 여겨질 때가 많지 않은가, 얼굴이 깜빡거리는 불안정한 이미지야말로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물리적으로 가장 정확한 형상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전시장을 나왔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얼마 뒤 오은경의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민음사, 2020)을 읽으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오은경의 시에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자꾸만 있다가도 없어진다. 표제작인 ‘한 사람의 불확실’에서 ‘나’는 지난밤 당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문 너머의 놀이터 풍경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등을 돌린 순간 방에는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당신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제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리벽이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창가에 비친 저는 아이의 곁에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어릴 때 모습 같아 등을 돌렸는데 당신은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까?// 제 방에는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한 번도 같은 자리였던 적이 없었으며 당신의 존재란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시집의 맨 앞으로 돌아가서 ‘매듭’이라는 시를 다시 읽었다. 이 시에서 ‘나’는 어제 당신이 있었던 장소에 가지만 당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돌아 걸어간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아래 파출소와 공원이라는 낯선 풍경을 지나면서 ‘나’는 길을 잃지만 결국 어제 당신이 있었던 장소로 돌아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당신이 어제 있었던 장소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보다 먼저 도착했을 뿐이라는 것. “어제와 같은 장소에 갔는데/ 당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내가/ 돌아갑니다”라는 첫 연은 “당신보다 나는 먼저 도착합니다/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당신에게/ 나는 돌아와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연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당신의 불확실성과 산책길이라는 둥근 연결고리를 지나 나와 당신은 ‘매듭’처럼 다시 연결된다.

코로나19 사태가 덮친 올 한 해 동안 우리가 타인을 감각하는 방식도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는지 모른다. 자꾸 깜빡거리는 당신의 얼굴, 있다가도 없어지는 당신의 존재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잊힌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더해질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서로를 확실성 속에 가둬두지 않는 것. 한 사람의 불확실은 그런 것이기도 하다. ‘매듭’은 어떤 일에서 순조롭지 못하게 막힌 부분이기도 하지만 어떤 일의 마디를 이루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그런 것을 기억하고 싶은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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