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툰베리’가 보이지 않는 까닭

조운찬 논설위원

지난 22일 지구의날을 맞아 열린 기후정상회의에 10대 소녀 시예 바스티다가 참석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소개로 연사로 참여한 바스티다는 각국 정상들을 향해 “기후 정의가 곧 사회 정의”라며 “세계 각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록 화상회의였지만 울림은 컸다. 그의 연설은 2년 전 유엔기후회의 연단에 오른 그레타 툰베리의 데자뷔였다. 같은 날 툰베리는 미 하원 환경소위원회의 화상청문회에 참석했다.

조운찬 논설위원

조운찬 논설위원

환경운동가 바스티다는 기후난민이다. 멕시코 출신인 그는 고향이 극심한 가뭄과 홍수로 파괴되자 13세 때인 201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바스티다는 동아리에 가입해 환경운동을 벌였다. 2019년에는 툰베리가 결성한 ‘미래를 위한 금요일’의 뉴욕지부를 만들어 등교를 거부하는 기후파업을 이끌어냈다. 이해 9월 기후정상회의 참석차 뉴욕에 간 툰베리를 만나 기후문제를 토론하기도 했다. 바스티다는 ‘미국의 툰베리’로 불린다.

기후위기가 국제 무대에서 본격 거론된 것은 1992년 6월 리우 기후변화협약이 처음이다. 이후 수십 차례의 기후 관련 유엔회의가 열렸지만, 당사국들은 온실가스 규제량과 시행 시기를 놓고 언쟁을 벌이는 등 대책 마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기후협약이라는 게 선언적 약속에 불과해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 다행히 교토의정서(1997)나 파리기후변화협약(2015)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됐지만, 이 역시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30년간 세계 각국이 기후변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미적대는 기성세대를 질타하며 기후위기의 경각심을 일깨운 것은 10~20대 청소년들이었다. 리우환경회의에서는 오존층에 난 구멍을 수리하고 사막을 숲으로 바꿀 능력이 없다면, 제발 지구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캐나다의 세번 스즈키(12)의 연설문이 발표돼 참가자들을 머쓱하게 했다. 2011년 남아공 더반 기후회의에서는 안잘리 아파두라이(21)가 “당신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협상만 하고 있군요”라며 각국 대표들을 경책했다. 2018년 8월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라는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인 툰베리의 활동은 기후행동의 기폭제가 됐다. 시위는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됐고, 툰베리는 일약 기후행동 전도사로 떠올랐다.

한국에서도 기후 단체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청년들의 기후행동이 이어졌다. 2019년 9월21일 기후비상행동 시위에는 이례적으로 5000여명이 참가했다. 몇 년 새 국내에 결성된 청년 기후단체는 기후위기비상행동, 청소년기후행동, 청년기후긴급행동, 멸종저항서울, 빅웨이브 등 10개 가까이나 된다. 그럼에도 청년들의 외침은 울려퍼지지 못하고 있다. 체계적인 기후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기후운동의 저변이 확산되지 못한 것도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기후위기를 대하는 기성세대의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기성세대가 진정 기후대응에 뜻이 있다면 절박한 심정으로 행동에 나서는 청년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활동공간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회피하고 무시한다. 대신 기업인의 요구는 경청한다. 철저한 ‘그린워싱’이다. 오지혁 청년기후긴급행동 대표는 “청년들이 정부 주최 공청회나 포럼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지만, 청년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는 일은 거의 없다”며 “더 이상 들러리로 참여하진 않겠다”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기후위기를 제도개혁이 아니라 플러그 뽑기, 자원 재활용 등 개인적 실천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안일한 인식이다. 한국은 이번 기후정상회의에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내놓지 못한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기후문제를 보는 기성세대와 청년의 간극은 가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다.

바스티다와 툰베리가 영상을 통해 전 세계 시민들에게 기후위기 심각성을 고발하던 그날, 한국 청소년기후행동은 청와대 앞에서 정부의 공허한 기후대책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바스티다의 연설은 언론을 통해 세계로 전해졌다. 그러나 청와대 앞 기자회견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국민청원 동의자는 1000명에도 못 미친다(27일 오후 기준). 미래세대를 대하는 상반된 모습. 서양의 툰베리만 보이고 ‘한국의 툰베리’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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